너는 나였고, 나는 너였어

이름 없는 나

by 월하연

문이 열린 순간,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눈부신 빛이 퍼져 나왔지만, 그것은 뜨겁지 않았다. 차라리 오래된 기억처럼 아득하고 부드러운 온기였다. 한 발자국씩, 우리는 그 빛을 향해 나아갔다.


빛 너머엔 방이 있었다. 우리가 깨어났던 처음의 방과 닮았지만 조금 더 작고, 조금 더 따뜻한 분위기를 품은 곳. 방 한가운데에는 작은 흔들의자가 있었고, 그 위에 누군가가 앉아 있었다.


작은 소녀였다.


머리는 짧게 깎인 채, 다리를 모으고 양손을 무릎 위에 올린 그녀는 조용히 우리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그녀를 보는 순간 나는 숨이 멎는 줄 알았다. 가슴이 저려왔다. 낯선데 너무 익숙했다. 누군가를 이렇게 애절하게 그리워한 적이 있었던가.


“저 아이는 누구야?” 술집 여자가 물었다.


그러나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노래 소녀는 숨을 죽인 채 눈을 크게 떴고, 아코디언 아이는 피리를 움켜쥔 손을 놓았다. 전장의 나는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그 아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우리 모두를 천천히 바라보며 작은 미소를 지었다.


“난… 이름이 없어.”


소녀가 말했다. 그 말이 공기를 흔들었다.


“난 아무것도 되지 않았고, 누구도 되지 않았고, 그래서… 그냥 기다리고 있었어.”


그녀의 목소리는 단순한 고백이 아니라, 절규에 가까웠다. 그러나 울지 않았다. 눈물 대신 침묵으로, 슬픔 대신 가만히 자신을 숨기며 살아온 존재. 누구도 찾아오지 않았고, 누구도 불러주지 않았던 자아.


“넌 언제부터 여기 있었어?”


내가 조심스레 물었다. 소녀는 고개를 갸웃하더니 대답했다.


“언제부터냐면… 글쎄. 네가 태어나기 전부터. 너희 모두가 생겨나기 전부터 여기 있었어. 아마 처음이었을 거야.”


우리는 그녀의 말에 아무도 대답하지 못했다. 그녀는 우리가 알지 못했던, 가장 오래된 나였다. 우리 모두의 시작이자, 뿌리. 그러나 오랫동안 잊힌 존재.


그 순간, 공간이 흔들리며 ‘그’가 다시 나타났다. 이번엔 처음과는 다르게, 어딘가 지쳐 보였다. 웃음은 여전했지만, 눈빛은 흐려져 있었다.


“아직도? 아직도 너희는 나를 부정하려 해? 나 없이는 너희가 존재하지 못했다는 걸 알고 있잖아.”


소녀는 그의 말을 조용히 듣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가 입을 열었다.


“너는 내가 만든 거야. 내가 나를 너무 싫어해서 만든, 어둠의 형상. 내가 나를 사랑하지 못한 벌이었고, 나를 버린 대가였어. 너는 이제 사라져야 해.”


운명은 미소를 거두지 않았다. 그러나 한 발자국도 다가오지 못했다. 우리 모두가 그녀의 주위를 감싸고 섰기 때문이다. 마치 오래된 진실을 보호하듯, 처음으로 하나가 되어 그녀 앞을 지켰다.


우리는 말없이 서로의 손을 맞잡았다. 그리고 그 안에서, 우리 모두는 아주 조용히 하나의 멜로디를 떠올렸다.


그것은 기억 속의 노래였다. 아주 오래전, 아무도 들어주지 않았던, 그럼에도 멈추지 않고 흥얼거렸던.


소녀가 입을 열었다. 아주 낮고 부드럽게, 속삭이듯 노래를 시작했다.


『모든 이름은 나였고, 모든 슬픔은 나였어…』


우리 모두가 그녀의 음에 따라 노래했다.


『돌고 돌아 여기까지, 나는 나를 만나러 왔어…』


공간이 진동했다. 조종자는 비명을 지르지도 않았다. 그는 단지 아주 조용히 사라졌다. 바람이 잦아들 듯, 그림자가 흐려지듯. 그리고 그 자리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흔들의자에 앉아 있던 소녀가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우리를 천천히 바라보았다.


“이제, 나도 이름을 가질래. 내가 누구였는지 기억하겠어.”


그 말과 함께, 그녀의 눈이 처음으로 반짝였다. 빛이 퍼졌다.


그리고, 우리는 마침내 처음부터 존재했던 나를 품었다. 이름 없는 나에게 이름을 주었고, 그것은 곧 우리 자신의 구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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