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나였고, 나는 너였어

잊힌 목소리의 속삭임

by 월하연



일상이 반복되었다. 하지만 이번엔 지루하지 않았다. 매일 마시는 차, 매일 들리는 발소리, 매일 같은 길을 걷는 루틴 속에서도 나는 살아 있다는 감각을 느꼈다. 무엇보다도, ‘나’라는 이름으로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이 생경하면서도 따뜻했다.


윤서라는 이름은 조금씩 내 몸에 스며들었고, 사람들도 그 이름을 불렀다. 어떤 날은 시장을 다녀왔고, 또 어떤 날은 도서관에서 시집을 빌려 읽었다. 밤엔 글을 썼다. 기억나지 않는 이야기를, 그러나 분명히 내 안에서 자라나고 있는 이야기들을.


그날도 나는 책상 앞에 앉아 작은 노트를 펼쳤다. 펜을 들어 첫 문장을 적으려 했지만, 손이 멈췄다. 이유 없이, 이유 없이 갑자기 울컥했다. 가슴 한복판이 무겁고 뜨거웠다. 그리고 그 틈을 비집고 누군가의 속삭임이 흘러들어왔다.


『… 왜 나를 버렸어?』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분명 들렸다. 목소리는 나지막했지만 날카로웠고, 어딘가 어두운 골짜기에서 반쯤 지워진 언어처럼 묘하게 끈적였다.


『너는 나였잖아… 왜 잊었어? 나도, 살아 있었어.』


나는 천천히 다시 앉았다. 심장이 빠르게 뛰었지만, 이상하게도 도망치고 싶지는 않았다. 오히려 기다렸던 듯한 감정이 나를 감쌌다. 어쩌면, 이건 내가 아직 통합하지 못한 마지막 조각일지도 모른다.


그 밤, 꿈을 꾸었다.


어두운 복도였다. 그 복도 끝에 누군가가 서 있었다. 몸은 작았고, 손에는 찢어진 인형을 들고 있었다. 인형은 눈이 하나 없었고, 실밥이 풀려 있었으며, 오래전 누군가의 품에 안겨 있었던 흔적을 지니고 있었다.


그 아이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하지만 그 존재는 또렷했다. 그 아이는… 내가 외면했던 마지막 나였다.


“왜 이제야 왔어?”


꿈속에서 나는 대답할 수 없었다. 그저 숨을 헐떡이며 아이에게 다가갔다. 그러나 가까워질수록 아이는 한 걸음씩 물러섰다. 거리감은 좁혀지지 않았고, 어느 순간 아이의 눈이 반짝였다. 그것은 눈물이 아니었다. 그것은 분노였다.


“넌 나를 잊었잖아. 다 안아준다고 해놓고, 결국 나만 남겼잖아.”


나는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말했다.


“미안해. 정말로… 미안해. 나도 몰랐어. 네가 이렇게 깊이 남아 있었는지.”


그 아이는 조용히 인형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내 앞까지 걸어와 인형을 내게 건넸다.


“이제는… 함께 안아줘.”


나는 인형을 품에 안았다. 그리고 아이의 손을 잡았다. 따뜻했다. 믿기지 않을 만큼 따뜻했다.


눈을 떴다. 새벽이었다. 나는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나 노트를 펼쳤다. 손이 떨렸지만, 펜은 부드럽게 움직였다.


‘어두운 복도 끝에서, 내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 나는 진짜로 모든 나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다. 그 목소리, 그 눈빛, 그 손끝마저도.


오늘은, 내 안의 마지막 자아가 나를 용서한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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