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조하지만 따듯하다.

by 묘연

나도 그럴 때가 있었다.

전화 너머로 남자 친구의 목소리가 설레었을 때가.
세상이 그의 숨으로 가득 차있는 것 같았을 때가.
그의 날 숨이 내 들숨이 되는 게 행복했던 때가.
아침에 눈을 뜨면 이불속에서 어제 나눈 그와의 대화를 곱씹어보고 혼자 웃었던 때가.
80바이트 안에 마음을 꾹꾹 눌러 담아 문자를 보내고 답장을 기다리며 설레던 때가 있었고,
밤에 나눠도 나눠도 끝이 없는 대화 끝에 먼저 끊으라며 서로 하나 둘 셋을 말했던 적이 있었다.

더 이상 그 설렘을 놓치고 싶지 않았을 때, 우린 서로 평생 헤어지지 않겠다는 다짐을 세상 앞에 하고는 같이 살게 되었다. 그것은 평생 함께 설레고 싶다는 뜻도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그건 우리가 더 이상 설렐 수 없다는 것을 의미했다.

5년의 연애 끝의 결혼 그리고 시작된 신혼은 상상과 달달하거나 깨 볶는 일만 있지는 않았다.
가끔은 같이 있어도 외로워지고 고독해지고 서로를 채워주지 못해 투정 부리는 일도 많았다.
‘내 인생의 남자는 너뿐이야.’라고 생각하니 그에게 바라는 게 많아져만 갔다.
내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남자가 그이어야만 했다.
하지만 어느 남편이 아내가 바라는 이상적인 모습만 가지고 있으랴,
나는 그 마음이 채워지지 않을 때면 연예인들에게 빠져들었고 가끔 만나는 결혼 안 한 친구들의 설레는 연애담을 들으며 그 욕망을 대신 채웠다.
하지만 그건 나를 불행에 빠뜨리는 일이 분명했다.
비교가 시작되었고 로맨틱한 남의 남자들이 아니 그 남자들의 사랑을 받는 친구들이 부러웠다.
이나영이 부러웠고 이효리가 부러웠고 고등학교 친구들과 대학교 친구들이 부러웠다.
아니 어쩜 세상 모든 여자들이 부러웠는지 모른다.
가끔 남편과 기념일을 대수롭지 않게 넘기거나
밤에 사랑을 나누고는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자고 일어나 생활을 할 때면 무뎌진 삶 속에서 새로운 연애를 남몰래 꿈꾸기도 했다.

그러다 임신을 하고 아이를 낳고는 내 인생에 두 번 다시 설레는 새로운 연애는 없을 거라는 사실을 확인 사살한 기분이었다. 이 가정에서 막중한 책임을 맡게 된 나는 지금 여기 이곳에서 행복해야만 하는 사람이 되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모래사막 같은 건조한 일상에서 오아시스를 찾았어야 했다.
아니 그 건조함에 적응을 해야 했는지도 모른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건조한 부부생활에서 아이들은 내가 남편에게 쏟아야 할 마음을 절반 이상 가져갔다.
아침에 남편 출근 준비 소리에 깬 아이에게 우유를 먹이느라 매일 챙겨주었던 남편의 아침을 더 이상 챙기지 못하게 되었고 같이 씻고 누워 하루하루를 이야기할 시간에 아이를 재우느라 아이와 같이 일찍 잠들어버리기 일쑤였다. 서로의 사랑을 이야기하는 대신 하루 중 아이와 있었던 이야기를 하는 시간이 길어졌고 함께 쇼핑을 다니면서 서로에게 어울리는 것을 찾아주는 대신에 아이의 것을 더 사는 일이 잦아졌다.
그렇게 서로 마주 앉는 일보다 옆에 앉는 일이 많아졌고.
서로의 눈을 마주치기보다 함께 같은 곳을 바라보는 일이 많아졌고
손을 잡는 일보다 서로의 짐을 들어주는 일이 많아졌다.
어쩌면 정말 사는 동안 두 번 다시 연애의 설렘을 느낄 수 없을지도 모르고
촉촉한 로맨스는 드라마에서만 볼 수 있을지 모른다.
매일매일 모래처럼 건조한 일상이 계속되어 빨개진 눈으로 그에게 촉촉한 로맨스를 갈구하게 될지도 모른다.

입은 웃는데 눈은 뻑뻑하다.


저녁에 퇴근을 하고 돌아온 남편은 어쩌면 더 건조한 세상에 갔다 왔는지도 모르겠다.

아이들의 웃음소리에 신이 나고 아이들의 귀여운 모습에 굳었던 마음이 녹는다.

덩달아 웃고 덩달아 신이 난다.

하지만 하루 종일 아이들과 함께했던 나는 아이들의 귀여움에 무뎌져 더 이상 웃음이 나오지 않는다. 대신 하루 종일 보지 못했던 남편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그의 건조한 눈에서는 끈적끈적한 애정이 녹아 나오고 마치 이 넓은 세상에 오직 아이들만 존재하는 것처럼 아이를 쳐다보고 낮에는 한 번도 내지 않았을 것 같은 높은 목소리를 낸다. 그리고 귀엽고 사랑해 미치겠는 그 감정을 공유하고 싶어 가끔 나를 쳐다본다.

미쳐 바꾸지 못한 사랑이 가득한 눈으로 내 눈을 바라본다.

그럴 때마다 난 그의 눈빛이 한적한 밤하늘의 커다란 달처럼 느껴진다.
설렘은 빼고 따듯함으로 무장한 큰 달빛.
그럼 난 빨개진 눈을 애써 감추고 따듯한 달빛을 가만히 느껴본다.

건조하지만 따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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