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숙한 행복이 지겨워질 때.

그렇게 엄마가 된다.

by 묘연

난 말이야. 널 만나기 전 까지는 매우 자유로웠어.

정해진 목적지 없이 그저 운전대를 잡고 신호를 따라 가보는 곳이 목적지였지. 떠날 곳이 정해지지 않은 것처럼 돌아올 곳도 정하지 않았어. 내가 있는 곳이 집이었고 내가 가는 곳이 여행지였지.

그런데 그게 어떤 날은 너무 외롭고 허무하게 느껴지고 불안하고 무서웠어.

내게 가족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부모님은 그 둘이 너무 행복하셨고 형제들은 자기 일에 바빠서 내가 어떤 마음을 갖고 사는지 관심도 없었거든. 이러다 매일 떠돌기만 하는 삶이 이어질 것만 같았어. 그림은 점점 어두워지고 글엔 초점이 없었지.

그렇게 삶이 하얀 종이에 엎질러진 잉크처럼 아무렇게나 물들어갈 때쯤 난 너와 결혼하겠다고 결심했지.


왜냐면 넌 언제나 편안해 보였기 때문이야.

작은 자취방에서 혼자 꿈을 꾸고 혼자 먹고 혼자 자고 혼자 생각하고 혼자인데도 넌 나처럼 불안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았어. 작은 침대에 누워 작은 핸드폰 액정에 사랑한다는 문자를 쓰고도 언제나 만족할 줄 아는 사람이었지.

어떤 날은 매우 그래서 너에게 간다는 말도 없이 아무 때나 불쑥 찾아가 사랑한다며 내뱉어도 넌 언제나 그 자리에서 너도 그렇다고 편안하게 말해주었지.

마치 날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어쩌면 넌 진짜 나를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몰라.

난 거기가 내 집 같았어.

함께 있으면 난 늘 잠이 왔어.

마치 엄마품에 있는 새끼 고양이처럼 난 너의 작은방에서 웅크리고 잠만 자다 간 적도 많았지.

그런 너와 결혼하고 작은 집에서 신혼생활을 시작했고 우린 아니 나는 너무 즐거웠어.

우리의 소꿉놀이가 이토록 편안한 일상이라니 평생 해도 지겹지 않을 것 같았어.

그저 따듯하고 아늑했어.

엄마품처럼.


그런데 지금은 아냐.

그냥 지겨웠나 봐.

매일 똑같이 반복되는 하루가 지겹고 재미가 없어.

이 작은 집이, 매일 보는 익숙한 방안의 천장이, 매일 밟아 닳아 없어질 것 만 같은 이 장판이 매일 같은 각도에서 보는 창밖의 풍경이. 모든 게 다 지루해.

한시도 아이에게서 나 혼자만의 시간을 떼어낼 수가 없었어. 글을 쓰는 대신 친구들에게 푸념을 하고 그림을 그리는 대신 온 집안을 청소하고 밤이 되면 아이를 재우면서 씻지도 못하고 쓰러져 자는 생활의 반복.

넓은 세상에 작은 러닝머신을 하나 두고 그 위에서만 죽을 듯이 달리는 사람같이 느껴졌어.


너는 내 눈물을 닦아주며 여행을 가자고 했어.

그리고 휴가를 냈지

사실 니가 여행을 가자고 말 한 순간부터가 난 여행의 시작이었던 것 같아.

휴가 냈다며 보낸 한 줄의 메시지가 마치 어디나 갈 수 있는 백지 수표 같았어.

물론 1박 2일의 짧은 여행이었지만 짧지만 완벽한 여행을 위해 그 전날은 아예 여행 준비로 하루를 지불해야만 했어. 아이의 이유식을 만들어야 했고 아이가 입을 옷가지들을 빨아 챙겨야 했고 손수건이며 기저귀며 하다못해 숟가락 하나 물통 하나 아이가 여행 가서 앉아있을 의자까지 챙겨야 했거든.


그렇게 바리바리 준비해서 우리가 간 곳이 경기도 가평이라면 사람들은 웃을까.

지금 생각해보니 사실 여느 때와 다르지 않았어. 시간에 맞춰 아이의 밥을 챙겨야 하고 간식을 챙겨야 하고 기저귀를 갈아야 하고 유산균을 먹어야 하고 씻겨야 하고 재워야 하고...

그렇지만 그날은 왠지 아이에게 밥을 떠먹이는 일이, 기저귀를 갈아 채우는 일이 전혀 지루하지 않았어. 성현이도 그랬던 것 같아.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곳에서 밥을 먹고 새소리를 들으며 부는 바람을 맞으며 잠드는 일이 즐거웠을 거라고.

그곳이 어딘지는 중요치 않았어.

낯선 방에서의 아이와의 하룻밤은 어제보다 더 애틋했고 당신과의 하룻밤은 언제보다 더 뜨거웠지.

우린 마치 잘 짜인 한 팀 같았어. 서로 때문에 웃었고 서로 때문에 즐거웠고 서로 때문에 행복했거든.

그렇게 우리의 팀워크가 더할 나위 없을 때 우린 집으로 와야만 했지.

여행을 떠났던 길보다 돌아오는 길이 더 즐겁고 설레었어. 우리 이 여행 멤버들과 매일을 살아갈 수 있다는 사실이 너무 기대 됐거든.

혼자일 때는 느낄 수 없었던 돌아오는 기쁨이 선물같이 내게 주어졌어.


그래. 난 어쩌면 이렇게 사랑하고 아끼는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 세상을 서성거렸는지도 몰라.

이렇게 사랑하는 사람들을 만나려고 이 곳 저곳을 기웃거렸는지 모른다고.

우리 그리고 이렇게 사랑하는 아이와 함께하기 위해 매일 사랑을 속삭이고 내일이 없는 것처럼 사랑을 나눴는지도 몰라.

완벽하지 않은 너와 내가 만나 완벽한 아이를 만들었어.

그러려고 이렇게 많이 사랑했나 봐.

멋지게 살아온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어제 지루하다고 했던 변함없는 일상이 다시 시작되었지.

나는 오늘도 짬을 내어 작은 식탁에 노트북을 켜놓고 글을 쓰고

아이는 낮잠을 자고

당신은 회사에서 일을 하고 있어.

다를 거 없는 하루지만 이 세상 너와 나 그리고 우리의 아이 이렇게 셋은 짧은 여행을 비밀스레 담고 있는 오늘은 어제보다 더 특별한 게 분명해.


우리 이렇게 살다가 또 이 익숙한 행복이 지겨워지면 여행을 떠나자.

그리고 이렇게 또 근사한 삶의 의미를 가져오자.


KakaoTalk_20170707_121230384.jpg 우리만의 밤하늘의 별을 보는 것. 오직 우리끼리만... 그래서 특별한 가족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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