탱고가 내게 왔다
탱고에 붙는 수식어 중 가장 땅게로스(탱고를 추는 남녀)들에게 익숙한 말은 ‘하나의 심장, 네 개의 다리’다. 함께 추는 수많은 춤 중에서도 서로 남녀가 이마(혹은 볼)와 상체를 맞대고 추는 춤은 탱고가 유일하다.
둘이 함께 추는 춤이기에, 한 몸처럼 유려하게 흘러야 하는 춤이기에. 탱고에서 파트너십은 수많은 땅게로스가 ‘한 번쯤…’ 생각하는 관계다.
물론 어떤 시각에선 계륵(?) 같은 존재이기도 하다. 파트너십이 없는 사람들은 자신의 춤을, 나아가 자신을 가장 잘 이해하는 파트너를 원하고, 파트너가 있는 이들은 이 파트너십에서 오는 여러 가지 애환, 이로 인한 관계 유지의 어려움과 고민을 토로한다. 누구나 꿈꾸고 누구나 어려워하는 그 관계. 그야말로 양날의 검이다.
아르헨티나의 유명한 탱고 마에스트로 커플들을 보면, 파트너십의 흥망성쇠를 엿볼 수 있다. 사람들은 공연 영상을 보며 ‘이 사람은 이 사람과 파트너일 때가 전성기였는데, 파트너가 바뀌고 나니 느낌이 달라졌다’ 등의 말을 하고는 한다.
탱고 파트너십은 세 가지 형태로 분류할 수 있을 듯 하다.
① 강습이나 연습(쁘락띠까)을 함께하는 파트너
② 밀롱가에 함께 가는 친구(서로 출 상대를 한 명이라도 확보하기 위한 관계일 때도 있다)
보통 ①과 ②를 따로, 혹은 함께 하는 이들이 존재한다.
③ 연인이 둘 다 탱고를 출 때. 연애와 함께 1+1 같은 관계랄까?
파트너는 연인일 때도 있지만, 연인이 아닐 때도 생각보다 아주 많다. 대회 출전을 위해 반짝 파트너를 결성하기도 하고, 연습이나 밀롱가를 함께 다니는 동료일 때도 많다.
하지만 많은 땅게로스들은 ③의 경우를 생각하며 파트너라고 하면 일단 ‘쟤들, 사귀는 것 아니냐’라며 의심하는 경우가 많다.
탱고를 배운지 얼마 안 됐던 초기, 파트너십 제의를 받은 적이 있다. 하지만 제의하신 분과 실력 차이가 너무 컸고(민폐일 것 같았다), 서로 파트너와 추는 일이 자연스럽게 가장 많아지기에, 춤 스타일이 고정되어 버릴 수도 있다는 단점으로 고사한 적이 있다. 그만큼 시작하면 고민도 많고, 쉽지 않은 관계가 바로 파트너십이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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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과 J 커플(둘은 탱고 파트너 관계다)과 거하게 낮술을 마신 날이었다. 취한 R의 입에서 이런 이야기가 나왔다.
“결혼은 인륜이고, 파트너십은 천륜이라니까?”
“네? 저는 둘 다 안 해봐서 모르겠어요”
“결혼은 생각해 봐. 집안도 서로 알아야 하고 재산도 서로 섞여. 이혼은 쉬운 줄 알아? 헤어지는 것도 얼마나 어려운데”
“그렇죠”
“근데 파트너는 말이야. 마음에 안 들면 헤어지면 그만이야. 그래도 이렇게 오래 유지되는 관계는 천륜이 아니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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탱고 파트너끼리는 밀롱가에서 서로 첫 딴다(Tanda : 10~15분 정도로 이뤄지는 한 세트의 음악)와 마지막 딴다를 함께하는 것이 암묵적인 룰이다. 파트너가 있는 사람에게 첫 딴다와 마지막 딴다는 신청 자체를 하지 않는다.
오며 가며 아는 연인이자 탱고 파트너인 G와 E는 탱고판 유명 인사다. 강습부터 시작해 10년간 이어 온 그들의 견고한 파트너십은 그야말로 많은 땅게로스가 꿈꾸는 롤모델이 아닐까 싶다. 이 중 G가 한 말을 몇 다리 건너 들었다.
“나는 E와 파트너십이 깨지면 탱고 자체를 그만둘 거야”
탱고를 직업으로 삼고 있는 사람이 이 정도까지 말할 수 있다니. 한편으로는 대단하고 서로가 서로를 저렇게까지 생각할 수 있구나 싶어 다른 한편으론 부럽기도 했다. 수많은 연애의 형태만큼 파트너십도 다양한 형태를 띠는 것 같다. 누구보다도 서로의 춤을 잘 이해하는 관계, 탱고를 추는 땅게로스들은 누구나 꿈꾸는 관계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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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트너십이란 관계는 여전히 나에게 큰 과제였고, 앞서 말한 이유로 파트너를 만들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파트너십 대신 알콜십(?)을 열심히 다지며 탱고를 이어왔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그런 나에게도 몇 달 전 파트너가 생겼다. 나의 파트너 Y는 ②의 파트너로 서로 강습과 연습을 함께 하고, 밀롱가에 앉아서는 술을 적극적으로 영위하고 있다.
Y와 나는 ‘우리 술 그만 마시고 춤 좀 추자’며 동반으로 듣는 강습을 신청하게 됐다. 이후 자연스럽게 수업과 연습을 함께한다.
서로 “밀롱가에서 사람 구실 좀 해야지”라는 말로 동기부여를 하며 채찍질하고 있다.
동기부여를 위해 앞으로 함께 할 몇 가지 계획을 세워 두었으나, 서로의 정진과 노력이 있어야 가능한 일들이기에 계획의 실현 여부는 시간이 지나봐야 알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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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트너십이 깨졌을 때, 파트너가 맺어질 수 있는 것만큼 수많은 이유가 있을 것이다. (겪어보진 않은)결혼과 이혼도 힘들겠지만, 오래 이어진 파트너십의 끝도 감정적으로 쉽지는 않은 것 같다.
또 다른 커플인 D와 N의 파트너십이 끝났다. 오랫동안 이어온 파트너십이기에 둘이 밀롱가에서 춤을 추고, 연습을 하고 공연 준비를 하는 것을 많은 이들이 지켜봤다. 이들의 관계가 끝난 줄 모르는 사람들이 밀롱가에 같이 나타나지 않는 N에게 D의 안부를 물었다.
N은 약간 화난 얼굴로 "저한테 D의 안부 묻지 마세요." 라는 짤막한 말을 남겼다.
감정이 섞이면서도 섞이지 않는 관계.
올곧게 서 있어야 하면서도 부드러워야 하는 탱고와도 닮았다.
하지만 탱고판의 가장 얄궂은 점은, 그만두지 않고 이 판에 남아 있다면 언젠가는 다시 마주친다는 점이다. 어느 밀롱가에서든, 어느 곡 앞에서든. 서로 다른 사람과 춤을 추고 있는그 순간일 수도 있다.
서로 마주친 밀롱가에서, 함께 가장 첫 곡을 추는 암묵적 약속도, 마지막 곡을 함께하는 순간의 기억도 사라지는 그때. 그때가 바로 파트너십의 마지막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