탱고가 내게 왔다
섹스의 목표는 오르가즘이다. 달리기를 하는 사람들은 러너스 하이(Runner's High)를 꿈꾼다. 프로 스포츠들은 승리가 목표다. 그럼 몸으로 하는 행위의 일환인 ‘탱고’의 목표는 어디에서 찾는가?
탱고를 이루는 요소는 몇 가지로 압축된다. 함께 추는 이들과의 커넥션(신체-정서적), 아름다운 음악, 술, 탱고 아래에 깔린 특유의 정서 등.
땅게로스들에게 ‘탱고의 목표는, 더 나아가 존재 가치는 무엇일까?’라는 질문을 던지자 각자 분분한 답을 내놓았다. 힘듦을 잊는. 재미가 있는, 사람을 찾는, 나를 찾는 춤이기에 춘다고 말한다.
개인적인 입장에서 탱고의 목표 중 하나는 꼬라손(Corazón)이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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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razón : 심장, 마음, 사랑이나 애정, 용기, 열의 등으로 해석되는 이 단어는 ‘탱고에서 느낄 수 있는 아주 특별한 감각’을 뜻하는 말로 사용된다.
‘시다, 차갑다’ 처럼 정형화된 감각이 아니기에, 꼬라손을 표현하는 방법도 다양하다. 20년 가까이 춤을 추고 있는 L은 꼬라손을 ‘세상은 다 흑백이고 나와 춤을 추고 있는 너와 나만 칼라인 것 같은 기분’이라 말했다.
동갑 친구인 A는 ‘발바닥에서부터 피어 오는 미묘한 감각’이라 하기도 한다. 혹자는 그 많은 사람 사이에서 나와 함께 춤추는 둘만 다른 세상에 분리된 것 같다는 표현을 하기도 한다.
이 말들을 합쳐보면 꼬라손은 춤을 추며 심장이 뛰고 가슴이 떨리는 꿈결 같은 순간이나 감각을 뜻하는 것 같다. 비현실적일 만큼 이 순간이 좋지만, 이는 연애의 감정과도 다르고 음악이 끝나면 신기루처럼 사라진다.
얄궂은 점은 둘이 함께 춰도, 반드시 둘 다 동시에 느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설명만 듣고 보면 음악과 춤을 매개로 이뤄지는 열반(涅槃)인 것 같기도 하다.
꼬라손이 오는 빈도도 사람마다 다르다. L은 몇 년에 한 번 오는 감각, A는 몇 주, 몇 달에 한 번쯤 느껴지는 감각이라고 말한다. 나의 탱고 스승 중 하나인 G는 “8년 동안 탱고를 추며 네 번 정도 꼬라손이 있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누구는 자주, 누구는 참 드물게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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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직 꼬라손을 모른다.
산타할아버지는 일 년에 한 번(?)이라도 볼 수 있지. 대체 내게 꼬라손은 언제쯤 오는 것일까? 초급 때부터 너무나 궁금해하고 있지만, 아직도 감각 대신 언어로만 알고 있다.
최소 1주일에 3회 이상, 1년 반 넘게 밀롱가를 다니고 춤을 추고 있는데. 양으로는 어디 가서 부족하지 않은 데. 억울하기 짝이 없다. 히말라야의 빅풋이나 네스 호의 네시처럼 존재는 한다는데 본 적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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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저녁, 밀롱가가 끝나고 대화 화제로 꼬라손이 올랐다. 억울하게도 못 느껴본 나는 꼬라손을 알콜성 부정맥이라고 말했다.
“어, 술을 많이 마셔서 심장이 평소대로 안 뛰는걸 꼬라손이라 착각하는 거 아니에요?”
사람들이 빵 터졌지만, 누구 하나 꼬라손이 무엇이고 어떻게 해야 꼬라손이 오는지는 모른다.
요새 눈을 감고 추는 법을 다시 익히고 있다. 눈을 뜨고 밀롱가의 많은 이들과 소통하는 것도 좋지만, 나와 함께 추는 바로 앞의 땅게로에게 좀 더 몰입해 보기 위해서다.
술이 없으면 춤을 안 추는 사람이라 눈만 감으면 지구 자전이 고스란히 느껴져 쉽지는 않지만, 나름대로 노력 중이다. 이 눈을 감는 행위에는 ‘이렇게 하면 꼬라손이 오려나’라는 실낱같은 희망도 섞여 있다.
밀롱가에서 우리는 서로 껴안고 있지만, 각자의 몸짓으로 하나의 동작을 만들어 낸다.
하늘에서 내리는 수많은 눈송이의 모양이 전부 다르듯 밀롱가 안 모든 이의 표현과 해석이 다르다. 남자가 멈추면 그 공백 안에서 여자는 순간을 채워 나간다. 점이 선이 되듯, 탱고라는 시간을 채워 나가는 일련의 과정 안에서 우리는 꼬라손을, 더 나아가 열반을 추구한다.
어떻게 보면 내가, 사람들이 탱고를 계속 추는 것은 구도(求道)의 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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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대 녹음된 Osvaldo Pugliese의 Adios Corazó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