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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미 Feb 27. 2024

나의 살사문화답사기

살사로의 외도 


1.

고백한다. 

내가 탱고를 사랑한다고 말한 것도 가식이 섞였었나 보다. 한동안 탱고와 거리 두기를 하고 싶었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다. 춤과 음악, 술의 삼각형을 이루던 나의 탱고 라이프가 무너졌다. 고무줄이 늘어난 만큼 빠르게 줄어들듯 내가 쏟은 열정에 비례해 탱고와 나의 관계도 빠르게 식어갔다.      

물론 탱고와 거리두기를 하며 긍정적인 일도 많았다. 살기 위해서만 꾸역꾸역 쳐오던 테니스가 재밌어졌고 살이 빠졌으며 건강해지고 얼굴이 밝아졌다. 밤에는 잠을 일찍 잤다. 술을 끊다시피 했다.

이와 비례해 삶의 재미는 빠르게 없어졌다. 21시 이후에 집 밖을 안 나가니 사람이 재미가 있을 수가 있나.

‘마약을 끊은 뒤 재활을 하면 사람이 이런 기분일까’라는 생각도 해봤다. 나에게 탱고는 이완이자 위로의 시간이었는데 별 병신 같은 것들 때문에. 점점 탱고를 추러 간 자리에서 춤도, 말수도 줄어들었다. 밀롱가에 앉아 마시는 술도 맛이 없었다.           



2. 

그래서 나는 살사를 배우러 떠났다. 지고지순한 조강지처처럼 한 춤만 바라보던 인생과 작별을 고하고 짜릿함을 맛보기로 했다.

어차피 홍대에는 스윙-살사-탱고로 이어지는 수많은 동호회와 아카데미, 춤출 공간이 존재한다. 지켜보면 20대는 스윙, 30대부터 40대 중후반까지는 살사(요새는 바차타), 40대부터 탱고에 입문하는 사람이 많은 것 같다. 

춤이라는 취미를 시작하면 희한하게 한 가지에 만족하지 않는 것 같다. 어릴 때부터 시작하면 스윙-살사-탱고의 테크트리를 타는 경우가 많다. 자연스럽게 ‘인생 마지막 춤’인 탱고를 추는 사람들은 대개 다른 춤을 추던 경력직이다.


직접적인 계기도 있었다. 살사에서 탱고로 이주한 B는 자신이 몸담은 동호회에 여자가 모자라 개강을 못 하고 있다며, 동호회 가입을 권했다. 심지어 입문하면 살사화를 선물해 주겠다는 강력한 어필까지 있었다. 

B와 커피를 마시며 살사가 얼마나 밝고 즐거운지(노화 방지에 효과적인지)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니 흥미가 생겼다. 조용히 살사동호회 초급 등록을 했다.     

놀랍게도 살사는 기대한 만큼 신났다. 탱고를 배우던 초급 시절 지하철 스크린도어 앞에서 ‘오초’를 연습하던 것처럼 횡단보도에서 초록 불을 기다리며 ‘왼 오 왼 오 왼 원’ 하는 베이직 을 스스로 밟을 정도였다.      


심지어 살사는 

탱고보다 춤의 진입장벽이 낮았고


탱고보다 춤이 신나고 많이 움직이고

(뒤풀이 안 하면 살찔 일이 없겠다 싶을 정도의 운동량)


탱고보다 춤추는 사람들이 밝다! 젊다! 배타적이지 않았다

(탱고의 늙고 배타적이고 음울한 요소에 대해서는 다음에 설명하겠다)          



3. 

탱고로 소셜댄스에 입문한 입장에서 바라보는 살사빠는 참으로 신기했다. 탱고처럼 쭉 앉아서 남들 추는 걸 구경하는 광경은 없었다(모든 이들이 앉을 테이블이 아예 없고 팔꿈치와 술잔을 올려놓을 공간만 있다).      

눈빛으로 춤을 청하는 탱고의 ‘까베세오’대신 “추실래요?”라는 말과 손이 오가고, 지키지 않으면 눈으로 쌍욕을 날리는 LOD(Line of dance) 대신 ‘서로 충돌만 없으면 니들끼리 알아서’라고 한데 뒤엉켜 추면서도 부딪히지 않는 메시 급의 공간창출능력도 신기했다. 

게다가 데낄라를 한 잔 쭉 들이켜고 춤을 추다 보면 살사, 바차타는 물론 라인댄스까지 골고루 음악이 흐른다. 다들 짠 것처럼 한 안무에 합을 맞춰 추는 라인댄스는 매번 신기했다(이쪽의 문화는 후술한다).

게다가 매주 2팀 정도의 공연팀들이 나와 공연을 하고는 했다. 마에스트로 공연이나 특별한 이벤트가 아니면 공연을 자주 하지 않는 탱고와는 사뭇 다른 광경이었다.      

레프트턴 라이트턴이 늘 헛갈리고 웨이브를 못 해서 ‘피노키오’ 같은 뻣뻣한 춤사위를 구사하는 나조차 이렇게 신나면 반칙 아닌가. 비트만 들어도 가슴이 뛰는 것이 흡사 클럽에 처음 갔던 그 어린 시절을 떠올리게 했다.

심지어 선생님 복도, 동기 복도 좋았다. 모난 사람도 적응을 못 하는 사람도 없었다. 몸과 춤 실력은 참으로 저렴하기 짝이 없었으나 열정과 노력 하나만큼은 진심인 사람들이었다. 춤을 처음 배우던 그때로 돌아간 느낌도 들었다. 

심지어 머리를 쓰다듬고 돌리는 일련의 동작에서 예뻐 보이려면 머리가 길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2n년 간 고수해 오던 짧은 머리도 기르기 시작했다.      


탱고와 정말 많이 다른 그 풍경과 문화 속에서 나는 금요일 밤을 흘려보냈다.           



4. 

모든 동호회 초급기수들의 수순이다. 살사 초급공연을 준비하게 됐다. 강습을 하는 이들 입장에선 적극적인 초급공연 참석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기에 서슴없이 손을 들었다. 꼴에 다른 춤을 춰봤다고 심리적으로는 공연이 부담스럽거나 어렵게 느껴지진 않았다. 몸이 저질인 것이나 웨이브가 초라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심지어 우리 기수 공연의 ‘쎈타’는 전업 밸리댄서였던 J와 유명 블루스 댄서인 Y가 포진하고 있었기에 꿈도 꾸지 않았다(그녀들의 습득 속도를 생각하면 나는 오징어였다). 

살사는 탱고보다 캐주얼하고 가볍고 신나고 부담 없었기에 탱고 공연을 준비하며 받았던 스트레스들은 없었다. 심지어 공연곡은 신나고 안무는 ‘잘 추기’가 어렵지만 흉내 정도는 낼 수 있었다. 


즐겁게 연습실을 빌려 연습을 하고 옷을 뭐 맞춰 입고 공연을 하냐 다들 화기애애하게 공연을 준비하던 그 시기,      


나는 n회차 코로나에 걸렸다.                



5. 

결론을 말하자면 나는 요새 살사빠에 가지 않는다. ‘소셜 댄스’ 생활은 주 1~2회의 탱고 생활로 밀도를 유지하고 있다. 내가 갖는 춤에 대한 사랑은 여전하지만 복잡한 현생으로 인해 조금은 마음을 접어 놓았다. 

하지만 ‘왼 오 왼 오 왼 원’으로 탈 수 있는 박자의 음악이 들려오면 스텝이 자동으로 나오는 걸 봐선 언젠가는 또 돌아갈 수 있을 것 같다.      


데낄라와 열정, 흥과 기운, 광기가 넘치는 살사는 오늘도 홍턴과 보니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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