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렁이는 존재
나(1)에서 '나는 우주'라고 했던 말은 '이 세상은 거대한 하나의 유기체다'라는 말과 일맥상통합니다. 하지만 '나'는 확실히 '남'과 다르게 느껴집니다. 이전 글에서 강조하고 싶었던 핵심은 '남과 나의 구분이 존재하지 않는다'가 아니라 '고정된 신체 안에 갇힌 가능성을 확장할 수 있다'입니다. 확장된 시야를 갖는 것만큼이나 남과의 경계를 잘 구분하는 것도 중요한 일입니다.
'나'는 어디서 끝나고, '남'은 어디서 시작될까요. 뇌과학적으로 보면, '나'와 '남'의 구분은 뇌가 끊임없이 계산해 내는 결과입니다. 두정엽과 섬엽은 신체 감각을 통합해 "이 몸은 내 것"이라는 감각을 만들어내고, 측두-두정 접합부(TPJ)는 "저 사람은 저 사람의 생각이 있다"라는 것을 계산해 나와 타인의 시점을 구분합니다. 더 나아가, 우리가 "나는 이런 사람이다"라고 느끼는 심리적 자아는 아무것도 하지 않을 때 자동으로 켜지는 디폴트 모드 네트워크(DMN)가 만들어냅니다. 자전적 기억을 연결하고, 자기 서사를 이어 나가는 네트워크죠.
결국 '나'라는 감각은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매 순간 뇌가 만들어내는 하나의 결과물입니다. 그렇다면 뇌는 왜 굳이 나와 남을 구분하려 할까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생존'때문입니다. 신체적 생존 가능성을 높이기 위해서는 자신에게 가해지는 위험을 빠르게 판단하고 반응해야만 합니다. 또한, 사회적 생존을 원활하게 유지하려면 통제와 예측의 경계가 필요하죠. 이 구분이 흐려지면 주체감을 상실하고, 에너지 과부하 상태가 됩니다. 결국 자아는 뇌가 세상을 계산하고 살아남기 위해 설정한 기준점입니다. 흥미로운 건, 이 기준점이 고정되어 있지 않다는 겁니다. 사랑할 때와 명상할 땐 경계가 흐려지고, 위협 앞에서는 경계가 강해집니다.
이 경계를 잘 다루기 위해서는 남과 구분되는 축소된 나의 개념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전체 우주에서 나와 직접적으로 관련된 것들을 잘라내어 생각해 봅시다. 성격, 경험, 관계, 거주지, 직업, 취미 등 많은 것들이 포함될 수 있습니다. 마인드맵을 그려보면 도움이 됩니다. 귀찮다면 상상으로도 충분합니다. 나를 잘 표현하는 개념부터 시작해 가지를 쳐가며 자신의 경계를 체크해 나갑니다. 주의할 점은 관련성이 낮은 것을 포함하거나, 관련성이 높은 것을 배제하지 않도록 조심하는 것입니다.
이 형태 또한 고정된 것이 아니라 언제든 변화할 수 있습니다.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이 바뀌는 일은 아주 빈번하게 일어납니다. 특정한 상황에서는 오랫동안 중요하다고 여겨왔던 가치관이 무너질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형태가 유동적이라는 것은 남과 나의 경계를 딱 잘라 구분 지을 수 없는 이유가 됩니다. 타인을 보고 '왜 저래?'라고 생각했던 행동을 자신이 하고 있던 경험이 있지 않으신가요. 하지만, 그러면서도 남과 구분된 자신을 느끼고, 주체가 되어 움직입니다. 그것이 이 글에서 말씀드린 축소된 개념의 나입니다. 우리는 모두 일렁이는 형태로 존재하고 있습니다.
'나'의 경계를 파악하는 노력의 이점 5가지
1. 행동을 효율적으로 결정할 수 있게 됩니다.
나의 형태를 파악한 후에는 모든 행위가 이 형태를 변화시키거나 유지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이미 원형을 잘 알고 있으므로 어디에서 파생된 연결고리를 강화하거나 끊어야 할지 파악하기가 쉽습니다. 또한 역으로, 어떤 행동을 강요받고 있는 상황에서 스트레스를 느낀다면 나의 어떤 부분과 부딪히는지, 더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볼 수 있게 됩니다.
2. 왜곡된 자아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됩니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인정하고 싶지 않은 어두운 면이 있습니다. 그런 모습까지 ‘나’에 담아 받아들이게 될 때 비로소 행복이 시작됩니다. 억압된 자아, 과장된 자아는 내가 아니기 때문에 마음을 불편하게 합니다. 수치심과 열등감, 불안감에서 벗어나고 싶다면 본인의 그림자를 직면하고 인정해야 합니다. 그림자는 없애야 할 대상이 아니라 안고 가야 하는 대상이라는 것을 기억합시다.
3. 페르소나와 자신을 분리할 수 있게 됩니다.
이는 왜곡된 자아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두 번째 이점과 연결되는 부분입니다. 사회생활을 위해 만들어진 가면, 페르소나는 도구일 뿐입니다. 페르소나인지 진정한 자아인지 구분하기 위해서는 그 특성이나 행동이 마인드맵의 중심과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를 판단해 보면 됩니다. 자신을 설명하는 핵심 개념들과 얼마나 차이가 나는지 비교해 보면 페르소나는 페르소나로만 두는 것이 가능해집니다.
4. 사람마다 다른 형태의 ‘나’를 갖는다는 것을 이해하게 됩니다.
살다 보면 남을 이해하고 싶어도 이해할 수 없을 때가 많습니다. 이 때문에 부정적인 감정을 느끼기도 하죠. 남이 나와 다르다는 것을 받아들이면 이를 조금이나마 달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도 각자의 위치에 존재할 뿐입니다.
5. 다른 사람의 생각과 감정을 모두 책임지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사람 간의 관계는 본질적으로 상호 영향을 주고받는 구조입니다. 그러나, 상대와 나를 구분하지 않고 과도하게 공감하거나 책임감을 느끼는 경우, 자신을 지키지 못하고 필요 이상의 에너지를 쏟게 될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의 생각과 감정은 그 사람의 것입니다. 이를 지나치게 배려하거나 통제하려고 하는 건 욕심일 수 있습니다.
나는 고정된 존재가 아니라 환경과 선택 속에서 끊임없이 변화하는 존재입니다. 때로는 자신을 지키기 위해 경계를 단단히 세워야 하고, 때로는 성장을 위해 그 경계를 기꺼이 넓힐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유전적으로 설계된 신체와 제한적인 환경을 가지고 태어나지만, 그것이 인생을 결정짓지는 않습니다. 자신을 확장하여 원하는 바를 이루고, 존재하지 않았던 연결고리를 만들어내 원하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어제의 선택이 오늘의 나를 만들고, 오늘의 선택이 내일의 나를 만들어갑니다. 나는 아직 완성되지 않았고, 그 여백이 나를 살게 할 겁니다.
It's not our abilities that show what we truly are. It is our choices.
-해리포터와 비밀의 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