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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심한 째까니 Sep 06. 2024

그녀의 알약

남편이 '오래 자기 기능 보유자'라고 부를 정도로 오래 잘 수도 있다. 특히 아침잠이 많다. 초등학생 때는 일요일 아침에 방영하는 만화영화를 볼 수 없었다. 일어나 보면 다 끝나 있었다. 무슨 어린이용 만화영화를 그렇게 이른 시간에 했는지 지금 생각해도 좀 너무한 거 같다. 새 나라의 어린이는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야 하던 시절이어서 그랬나? 동네 아이들이 만화영화를 다 보고 하나둘 모이기 시작하는 시간에 일어났다. 그래서 다른 날보다 더 빠르게 지나가는 일요일이 내게는 훨씬 더 짧았다. 중고 시절에는 밥을 거르고 학교에 가는 일이 다반사였다. 대학 때는 오전 수업 중간에 들어가곤 했다.   

   

한때는 내가 아침잠이 많은 것을 엄마 탓으로 돌렸다. 엄마는 늦잠 자다 공장 가는 새벽 버스를 놓치기 일쑤였다. 집으로 돌아온 엄마는 도시락을 찬장에 넣고는 밀린 집안일을 했다. 모래 담긴 사발을 옆에 두고 스테인레스 냄비를 박박 닦거나 온갖 양념 병을 꺼내 놓고 깍두기를 담갔다. 어린 시절, 집에 엄마가 있으면 버스를 놓친 날이었다.

    

나만큼이나 잠이 많던 그녀에게 이상한 일이 생겼다. 큰아이 돌 무렵 이모에게 전화가 왔다. 엄마가 통 못 잔다고 했다. 뜬 눈으로 보내는 날이 많아지자 이모가 걱정돼 내게 알려온 것이다. 엄마를 데리고 신경정신과에 갔다. 의사는 엄마에게 이것저것 물었다. 그리고 그는 상실감에서 온 불안이 불면증을 일으킨 것이라 했다. 그 원인은 내 결혼이었다. 한 집안의 가장을 부양만으로 한정 지을 수 없겠지만 결혼 전까지 친정의 가장은 나였다. 경제적, 정서적으로 엄마는 나를 많이 의지하고 있었던 거 같다. 솔직히 결혼으로 나는 많은 것을 별 죄책감 없이 내려놓을 수 있었다. 약간의 생활비를 보내는 것으로 내 할 일은 다 끝났으면 했다.      

대기실 밖 의자에 앉아 있는 늙은 아기가 나를 바라본다. 옆에 앉았다. 별일 아니라고 약 먹으면 이제 잘 잘 수 있을 거라 다독였다. 그녀에게 그리고 내게. 엄마는 몇 알의 약에 집착했다. 약이 없으면 못 자는 시간이 길어졌다. 점점 약을 끊으라고 하는 이들이 많아지자 다들 겪지 않아 쉽게 말한다며 짜증을 냈다. 알약의 개수도 늘어갔다.

    

몇 년 전, 엄마는 사는 집 계약이 끝나 이사해야 했다. 남편과 의논해 광양에 엄마 집을 구했다. 평생을 여수에 살던 사람이라 전에 얘기했을 때는 그곳을 떠나고 싶어 하지 않았다. 이번에는 그러마 해서 내가 사는 아랫동네로 왔다. 이사 후 제일 먼저 간 곳은 동네 신경정신과였다. 의사는 새로운 환자에게 궁금한 것들을 물었다. 13년 전처럼. 의사는 엄마의 불면증의 원인을 고립감이라 판단했는지 바깥 활동을 많이 하라고 조언했다. 그리고 약을 좀 줄여 보자고 덧붙였다. 다른 이가 얘기할 때마다 펄쩍 뛰던 그녀가 알겠다고 한다. 그 대답에 미소 짓는 의사와 달리 난 그냥 흘려들었다.

      

엄마는 어느 날은 아삭한 배추 겉절이나 달달한 잔멸치 볶음을 가져가라고 또는 염색약이 다 떨어졌다고 전화했다. 나는 틈날 때마다 그녀의 현관문을 열었다. 그녀가 다시 내 영역으로 들어왔다. 어쩌면 처음부터 벗어난 적이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녀는 더 이상 신경정신과에 가지 않는다. 그녀는 알약을 버렸다. 이제 그녀는 잘 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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