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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arecord May 17. 2019

얼마나 사랑했는지.

# 그녀를 보내며

 할머니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차가운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에도 인간적이고 따뜻한 모습의 스스로를 볼 때마다 그녀의 사랑이 씨앗이 되어 나의 뿌리가 되어준 것에 감사해했다. 포대기에 쌓여 있던 시절 그녀가 없었더라면 나라는 사람은 얼마나 삭막한 영혼이었을지.  

 하지만 여느 현대의 가족들이 그렇듯 어린 시절 나는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고향을 등지고 도시로 올라와 성장하고 세월을 보냈다. 오랫동안 할머니는 내게 환영 같은 어린 시절 속의 동화적 인물처럼 박제되어 있었다. 틈틈이 그녀를 생각하고 추억했지만 모두가 그렇듯이 사는 것이 바쁘고 현실이 여의치 않았다.


 회사에서 바빴던 일을 어느 정도 마무리하고 한 템포 쉬어 가려하던 어느 날 할머니가 위독하시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전철 안에서 울음을 삼키며 숨을 몰아쉬었다. 그날 밤 잠을 이루지 못했다. 할머니는 다음 날 돌아가셨다. 나는 상상과는 다른 차분한 마음으로 회사와 친구들에게 부고를 알리고 며칠씩 비울 회사 업무를 정리했다. 기분이 이상했고 나는 평소처럼 농담을 나누고 사람들과 이야기를 했다. 나는 그다지 슬프지 않은 사람처럼 퇴근을 하고 집으로 돌아와 멍하니 시간을 보내고 내일 아침 내려갈 기차를 예약했다. 조금 잠을 설치고 평소와 비슷한 시간에 일어나 혼자 기차역을 향해 걸었다. 홀로 내딛는 그 발걸음이 사무치게 무서웠다.


 영등포역에서 전주역까지 무궁화호로 달리면 3시간 남짓의 시간이 걸린다. 5월 초의 어느 날 날씨는 심히 좋았고 따사로운 햇빛이 가득했다. 나는 속수무책으로 잠에 빠져들었고 간간히 시골 풍경을 감상하다 전주역에 도착했다. 예전에 생각하던 전주역은 무척이나 큰 장소였던 것 같은데 생각보다 그리 크지 않은 역을 둘러보다 택시를 잡고 장례식장으로 향했다. 역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 그러면서 한적한 저수지 옆 자락에 자리 잡은 장례식장을 향하는 거리에는 눈송이 같은 이팝나무들이 줄지어 자라 있었다. 조용한 그곳에 문을 열고 들어서자 하얀 근조화환이 줄지어 이어져있었다. 할머니의 자리였다.


 모두에게 그렇지만 내게 할머니는 특별했다. 부모님은 때때로 아니 실은 자주 할머니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나의 출생의 비밀을 이야기해주듯 할머니가 키워주신다고 하지 않았더라면 너는 세상의 빛을 보지 못했을 거라며 할머니께 감사하라고 웃음 섞인 목소리로 말하곤 했다. 어릴 적에는 나름대로 긍정적이고 따뜻하게 느껴졌던 그 일화는 나이가 들고 세상이 힘들 때마다 때때로 할머니를 원망하게 했다.

 할머니는 자기 자식의 손자 손녀를 모두 키우셨다. 할머니는 자기 자식과 형제의 자식 그리고 자기 자식의 자녀들과 누군가의 자녀들까지 많은 아이들을 손수 키우셨다. 오랜 시간 그녀에게 있었던 아이들도 있었고 1년 혹은 몇 번의 날들을 그녀와 함께한 수많은 아이들이 있었다. 우리들, 손자 손녀가 그녀에게 길러진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 외에도 수많은 아이들이 그녀의 손을 거쳐갔다는 것을 이번에 처음 알게 되었다. 그곳에는 그녀가 해준 밥을 먹은 아이들이 왔다 갔다. 나는, 그녀가 나를 키운다고 한 말이 얼마나 희생적이고 고매한 마음이었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마음이 쓰라려 왔다.


 도착 후 수척해진 엄마를 안고 아주 조금 더 젊은 할머니의 영정사진을 보며 절을 두 번 했다. 한술 두 술 겨우 밥을 먹다 말다 하고 상복으로 갈아입었다. 자주 보지 못했던 외가 식구들이 가득했고 정신이 없었다. 며칠 동안 병원에서 임종을 지킨 엄마에 입술은 부르터 있었지만 장례식장 분위기는 사뭇 평화로웠다.

 초등학교 3학년, 이사를 간 이후 내가 고향으로 다시 내려온 날은 대학교 1학년 때였다. 그때도 나는 친구들과의 여행 때문이었지 다른 이유는 없었다. 머리가 커진 후에 할머니를 뵐 수 있었던 날은 두세 번 정도. 마지막 만남에 할머니는 나를 기억하지 못하셨다. 내게 그녀는 너무 특별했고 그토록 소중한 사람이었지만 나는 그렇게 말할 자격이 없었다. 눈물이 비집고 나올 때마다 그것마저도 죄스러웠다.


 손님이 없는 시각 할머니의 입관을 위해 모두가 아래층으로 향했다. 할머니는 단정하게 누워계셨다. 마치 살아계신 듯 평안해 보이셨다. 그녀의 얼굴은 예쁘게 화장되어있었고 아기처럼 쌓여있었다. 나는 엉엉 소리 내어 울고 싶었지만 그마저도 나만의 공간이 아니었기에 울음을 삼켰다. 모두가 저마다의 한마디를 입으로 속으로 하고 의례적인 절차들이 행해졌다. 할머니는 화장될 것이기 때문에 그녀를 묶은 끈은 풀어둔다는 말이 가슴 아프면서 다행스럽게 다가왔다. 할머니는 행복했을까. 할머니의 부고를 전해 들은 후로 나는 끊임없이 돌아오지 않을 대답을 질문했다. 그녀의 삶은 어땠을까.


  내가 처음 기억할 때에도 할머니는 할머니였다. 영정사진의 할머니조차 그리 젊은 시절은 아니었다. 할머니는 그 시절 사람들이 그러하듯 담배를 피우셨다. 그 사실은 안 것은 내가 훌쩍 커버린 후였다. 할머니의 향이라고 여겼던 것이 담배냄새라는 것을 내가 담배를 한번 쥐어본 이후에야 알게 되었다. 가끔 베란다에서 몰래 피시던 할머니를 발견했던 기억이 머릿속을 스쳤다. 할머니는 서둘러 모습을 감추고 나를 향해 방긋 웃으시곤 했다.

 할머니의 성이 이 씨 이름이 양순이라는 것도 나는 그녀의 장례식장에서 처음 알았다. 할머니는 내게 늘 할머니였다. 할머니는 호남지방의 살았던 옛 이들처럼 원불교를 믿었다. 장례를 하는 내내 원불교 내에 절차가 진행되었다. 가볍게 서양과 동양철학을 책으로 접하면서 원으로 이어지고 세상을 하나의 돌고 도는 근원으로 보는 동양의 시선에 감복하곤 했는데 어쩌면 그마저도 그녀의 믿음이 나에게로 이어진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입관을 마치고 우리는 모두 올라와 각자의 자리를 지켰다. 분위기는 따듯했다. 나는 친척들과 시시덕거리기도 하고 손님들을 차분히 응대하기도 하고 여러 가지 소식들을 조용히 들었다. 우리는 할머니와의 추억을 나눴다. 할머니는 귀엽고 따뜻하고 정겨운 사람이었다. 그저 하는 말이 아니라 할머니의 모습, 심성, 손끝, 머리카락 모든 것이 그러했다. 어린 시절 할머니는 아이들을 깨울 때 심심하게 깨우지 않았다. 따사로운 낮에 인절미를 코 끝에 흔들거나 거친 남자아이들은 물수건을 덮어 씌워 깨우셨다. 내가 먹기 어려운 음식이 있을 때마다 할머니는 아이구 맛있어 노래를 흥얼거렸다. 김치를 하나하나 조각내어 나의 밥그릇 끝에 하나씩 매달아 두셨다. 나는 내가 몰랐던 할머니의 추억을 나누면서 오롯이 나만의 것이 아니었던 추억 나눔에 질투하기도 또 내가 몰랐던 할머니의 역사를 나눔에 감사했다.

 할머니는 음식 솜씨가 좋으신 분이었다. 때때로 아빠는 그 시절에 할머니의 식당을 차려주지 못한 것을 못내 아쉬워하곤 했었다. 고구마 줄기, 파김치, 무나물, 고등어 무조림 할머니의 손을 거치면 모든 것이 맛있었다. 어른이 되고 난 이후 거친 나의 입맛은 그 시절의 정립됨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할머니는 평생토록 아이들이 먹을 음식과 잘 곳을 위해 일 하셨다.


 이틀째, 날이 저물고 장례식장의 구석진 곳에서 쪽잠을 자고 일어나 아침 일찍 화장터로 향했다. 5월의 어느 날 날씨는 살인적으로 좋았다. 버스를 타고 내려가는 내내 나는 포근히 잠들었다. 엊저녁에 도착한 오빠는 피곤하고 긴장되어 보였다. 2시간 정도의 화장시간을 거치고 우리는 임실에 있는 현충원으로 향했다. 외할아버지는 국가유공자셨다. 덕분에 우리는 그녀의 죽음에 곁들인 몇 가지 현실적인 문제를 편안히 지켜낼 수 있었다. 할머니는 할아버지가 잠들어 있는 비석 땅에 하얀 재가 되어 함께 묻히셨다. 우리는 함께 흙을 묻었고 나는 그 모든 과정 내내 심심하면 눈물을 붉혔다. 할머니가 내게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비현실적이게 느껴졌다.


 나는 틈틈이 할머니를 기억해 내려고 애썼다. 너무 어린 시절이었고 내가 기억할만한 나이가 되었을 때 그녀를 만날 수 없었다. 이 곳에 계속 살면서 그녀와 함께 추억을 나눈 다른 사촌동생들이 너무나도 부러웠다. 나는 집으로 돌아와 할머니와 함께 찍었던 사진을 찾아 헤맸다. 아기이지만 통통하게 살이 올라 포동 하고 큰 나를 마른 할머니가 웃으며 안고 있는 사진이었다. 그 사진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사진이었다. 너무 좋아했기 때문에 따로 보관해둔 것을 찾지 못해 버린 줄 알았다가 눈물을 쏟을 뻔했다. 사진은 나의 짐꾸러미 속에 잘 보관되어 있었다. 마지막 만남 때 할머니가 나를 잘 기억 못 하시는 것을 깨닫고 올해 구순 잔치 때에 사진을 들고 가 보여드리려고 했었다. 그것을 보면 할머니가 금방 다시 나를 기억해 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런 일은 없었다. 할머니는 그 사진을 다시 보지 못하고 돌아가셨다.


 나는 사후세계를 믿지 않는다. 종교도 없고 염세적이며 지극히 현실적이고 조금은 어둡게 세상을 바라보게 성장해 버렸다. 하지만, 그 어느 때보다도 할머니의 죽음 이후를 생각지 않을 수 없었다. 할머니는 흙으로 돌아가셨지만 남아있는 나는 애타게 그녀를 찾아 헤매었다. 사진도 추억도 모두 남아있는 자를 위한 것이었다. 그녀가 없는 세상을 내가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아직도 믿을 수가 없었다. 어떤 형태로든 그녀가 다시 내 곁으로 왔으면 했다. 남아 있는 자의 이기심이었다.

 어린 시절 부모님은 매우 바쁘셨다. 크고 나서도 그랬다. 성인이 되어서 부모님의 성향을 깨닫고 나서는 그러려니 했다. 할머니는 내게 아빠이자 엄마였고 내 인생의 모든 사랑은 할머니로부터 비롯되었다. 할머니를 논하지 않고 나를 설명할 수 없었다. 어떻게 더 표현하고 말할 수 있을까.


 회사가 끝나고 이틀은 요가를 하는 날이다. 요가 동작을 마치고 마지막 자세에 돌입해 숨을 몰아쉬며 천장을 보았을 때, 할머니가 떠올랐다. 그녀가 가고 난 후 나는 시시때때로 그녀를 생각했다. 마치 자연의 진공을 허락하지 않듯이 나는 모든 숨 쉬는 순간순간마다 그녀를 생각했다. 물론 부질없는 일이었다. 나는 소멸되어 가는 기억을 간신이 붙잡고 싶었다. 한 번도 과거로 돌아가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는데, 이번만큼은 다시 그녀를 볼 수 있는 시절로 사무치게 돌아가고 싶었다.

 

 마지막 날들만큼은 오래도록 그날의 감각을 기억하기 위해 집으로 돌아온 이후 할머니에 관해 글을 적었다. 그녀를 묻는 과정 내내 오랜만에 사진도 많이 찍으려고 노력했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 이미 지나간 일에 무의미하다는 생각과 죄책감, 스스로에 대한 핀잔과 질타가 들끊었지만 앞으로를 살아가야 하는 나에게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적어도 그렇게 믿고 싶었다. 다시 오지 않을 지나간 소중한 추억들을 가슴에 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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