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모단걸 Aug 08. 2021

안동에 간다면 꼭 맘모스 제과에!

그때,그 시절의 그 빵집.


얼마 전, 안동에 사는 동생 부부의 집을 잠깐 방문했는데 제부가 맘모스 제과에서 크림치즈빵과 휘낭시에 등을 사 왔다. 맘모스 제과의 빵은 오랜만이었는데 역시 크림치즈 빵은 맛있었고, 처음 먹어보는 휘낭시에도 무척 맛있었다. 안동에서 학창 시절을 보낸 사람들 중에 맘모스 제과에 대한 추억이 없는 사람은 드물지 않을까. 나는 고등학교 시절, 겨우 3년을 안동에서 보냈지만 꽤 오랜 시간 안동에 살았던 것만 같다. 그 보다 오래 살았던 다른 도시에 대해서 느끼는 감정과 다르다. 기숙사에서 생활했던 탓에 안동에서 유명하다는 하회마을이나 도산서원, 안동댐 등에 가본 기억은 손에 꼽을 정도지만 맘모스 제과는 참 자주 갔더랬다. 토요일 오전 수업을 마치고 기숙사에서 짐을 챙겨 친구들과 안동시내로 나가 각자의 집으로 데려다 줄 버스가 올 때까지 함께 시내를 배회하곤 했다. 지금은 많이 달라졌지만 20년 전, 안동 시내는 너무 작아서 친구들과 수다를 떨며 시내를 배회하면 다른 친구들을 몇 번씩이나 마주치곤 했다. 걷다가 지치면 우리는 버스비를 제외한 돈을 모아서 찜닭골목에 가서 찜닭을 사 먹거나 찜닭을 사 먹을 돈이 없으면 맘모스 제과에 들러 시원한 팥빙수 한 그릇을 먹고 각자의 집으로 가곤 했다. 롯데리아에서 파는 팥빙수보다 배는 비쌌지만, 비록 돈이 없는 고등학생들이었지만, 우리에게 맘모스 제과의 팥빙수는 사치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맘모스 제과의 기본에 충실한 팥빙수는 기숙사 생활의 고단함을, 입시에 지친 우리의 처지를 잠시나마 잊게 해 주었다. 


고등학교 시절 내 용돈은 이주일에 만원에 불과했다. 봉화에서 안동까지 시외버스비는 3천 원이 조금 넘었다. 왕복 차비는 대략 7천 원, 그러므로 내가 쓸 수 있는 순수한 용돈은 3천 원이었다. 이 돈으로 매점에서 계란 튀김을 몇 개 사 먹고 나면 주말에 친구들이 맘모스 제과에 가자고 할 때 난감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우리 집은 안동시 경계에 위치해있었고, 안동 시내버스를 타고 마지막 정류장에서 내려서 산길을 걸어 산을 하나 넘으면 바로 우리 집이 보였다. 당시 시내버스 요금이 천원이 되지 않았으니까 조금 걷더라도 이 방법을 택하면 나는 여윳돈이 생겨나는 것이었다. 친구들과 맘모스 제과에서 함께 팥빙수를 사 먹고도 돈이 남았다. 그런 날에는 맘모스 제과에서 빵 몇 개를 사들고 안동 시내버스를 타고, 산 하나를 넘어 집에 갔다. 할아버지께 내가 사 온 빵을 드리고 돌아서 냉장고를 뒤져 그동안 먹고 싶었던 엄마의 반찬들을 꺼내 먹었다. 일요일 저녁, 내가 다시 안동에 나갈 때 할아버지는 나를 불러 내 손에 만원을 쥐어주며 다음번에 올 때도 빵을 사 오라고 일러주셨다. 나는 아빠한테 받은 만원에 할아버지께 받은 만원까지 이만 원을 들고 학교로 향했다. 비록 할아버지께 받은 만원은 빵을 사 오라는 심부름 비였지만 나는 2주 뒤 집에 가기 전에 친구들을 꼬셔 찜닭을 먹고, 남은 돈으로 빵을 사가는 꼼수를 부리기도 했다. 할아버지께서 가장 좋아하셨던 것은 노란색 빵가루가 듬뿍 묻은 꽈배기였다. 지금도 나는 꽈배기를 볼 때마다 할아버지를 생각하곤 한다. 


안동을 떠나고 맘모스 제과를 기억할 일은 없었다. 서울은 아니었지만 지방 소도시를 벗어나 대도시에서 시작한 대학생활은, 안동에서 보냈던 학창 시절의 일이 이미 오래전 일인 것처럼 까마득하게 느껴졌다. 비록 대학생이 되었지만 나는 생활비를 벌기 위해 알바를 하느라 친구들과 수업을 마치고 술 한잔 하는 일이 쉽지 않았다. 새벽 한시쯤 알바를 끝내고 친구들이 놀고 있는 곳으로 달려가면 이미 거나하게 술에 취해 서로 헛소리로 대화하는 동기들만 남아있었다. 대학교 3학년 때였나. 고등학교 친구 중 한 명이 동성로에서 아는 오빠들이랑 놀고 있다며 나를 불렀다. 나는 알바 중이었기 때문에 우리 학교 앞으로 친구를 불렀고, 차를 가지고 있다는 내 친구의 아는 오빠 덕에 그 무리가 내가 아르바이트하던 호프집으로 왔다. 그들은 내 일이 끝날 때까지 우리 가게에서 술을 마셨고, 내 일이 끝나자 함께 노래방으로 달려가 신난 밤을 보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내 친구의 아는 오빠는 내 남자 친구가 되었다. 그 둘은 맘모스 제과에서 알바를 하며 만난 사이었다. 맘모스 제과가 이어준 인연이었다. 그 인연이 나에게도 닿은 것이었다. 거기에 더해 내 친구는 내 남자 친구의 친구와 연인이 되었다. 그러니 맘모스 제과가 이어준 덕에 두 커플이 탄생했더랬다. 우리는 종종 함께 데이트를 하곤 했다. 당시 그의 차는 그의 고모가 물려줬다는 아주 오래된 ‘엑셀’이었는데 에어컨을 켜면 차가 힘겨워했기 때문에 무더운 대구의 한여름 날씨 속에도 우리는 에어컨을 끄고 창문을 열고 대구시내를 누비고 다녔다. 


우리의 연애는 오래가지 못했다. 우리보다 내 친구와 내 남자 친구의 친구 커플이 먼저 헤어졌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도 헤어지게 되었다. 그리 오랜 기간을 만난 건 아니었지만 지금까지의 연애사를 돌이켜보면 그 친구와의 연애기간이 가장 재미있었다. 더위로 유명한 대구의 여름 낮, 창문 네 개를 모두 열고 당시 대중화되기 시작했던 아이리버 MP3에 겨우 24곡 정도의 노래를 넣고, 그 당시 우리가 좋아했던 더넛츠의 ‘사랑의 바보’를 틀고 목청이 터져라 노래를 따라 불렀다. 신호 대기 중에 남자 친구는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보다 갑자기 소리를 지르기도 했다. “사랑한다!” 그러면 나는 잽싸게 조수석 아래로 고개를 숙이고 하지 말라고 애원했다. 우리는 우방타워의 케이블카 안에서 뽀뽀를 했다. 스물두셋에 할 수 있는 연애를 했다. 오랜 시간이 흘러 내 친구의 결혼식에서 나는 부케를 받았고, 그녀와 여전히 친한 친구로 지내던 그는 신부대기실에 내가 있다며 한사코 들어오지 않았고 멀리서 친구의 결혼식을 지켜보고 떠났더랬다. 


이 모든 게 맘모스 제과 때문이다. 맘모스 제과의 크림치즈 빵 한 입에 잊고 지내던 그때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그렇지만 완전히 잊지는 않았다. 새로운 도시로 이사를 갈 때마다, 그곳에서 가장 유명하다는 빵집을 찾아 빵을 먹을 때마다 나는 항상 맘모스 제과의 빵과 비교하곤 했다. “비싸기만 하고, 맘모스 제과 빵보다 별로인데?” 혹은 “이 정도면 맘모스 제과 빵이랑 견주어도 괜찮은 수준인 것 같아” 라며 나도 모르게 빵맛의 기준이 맘모스 제과가 된 것이다. 그렇다고 내가 맘모스 제과의 모든 빵을 다 먹어본 것도 아니다. 그렇지만 이런 자신감은 있다. 맘모스 제과에서는 어떤 종류의 빵을 선택하더라도 기본 이상은 한다는 것. 내가 안동에서 고등학교를 다녔다는 이야기에 선배들은 나에게 “거기는 아직도 갓 쓰고 다니는 사람들이 있다는데, 진짜냐?”라고 물었더랬다. “갓은 모르겠고 안동 장날에 나가면 한복 입고 장보는 할아버지들은 좀 있어.” 우리 할아버지도 돌아가실 때까지 한복을 입으셨으니까. 안동은 그런 곳이다. 여전히 과거가 살아있는 곳. 그럼에도 답답하지 않은 곳. 맘모스 제과의 빵도 그랬으면 좋겠다. 전국의 몇 대 빵집이라며 사람들이 많이 찾더라도 기본에 충실한 팥빙수를 고수하는 곳으로 말이다. 다음에 또 안동에 간다면 다양한 종류의 빵을 사 와야지. 노란 빵가루가 잔뜩 묻은 꽈배기는 잊지 말아야지. 크림치즈빵과 유자 파운드도! 

매거진의 이전글 내 앞에 몇 번의여름이 남았다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