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이었다. 아주 희한한.
주말 아침, 나는 평소보다 일찍 일어나서 강아지들 밥을 먹이고, 산책을 시켜두고서 수서역으로 향했다. 아빠를 만나러 가기 위해서였다. 얼마나 오랜만에 대구에 내려온 것인지, 동대구역 주변은 불과 몇 년 사이에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변해있었다. 택시를 타고 아빠가 입원한 화상치료전문 병원으로 향했다. 1층 로비에 도착해 나의 인적사항을 기재하고 카페에서 아빠를 기다렸다. 아빠가 좋아하는 달달한 커피 한잔과 내가 마실 아메리카노 한 잔을 주문했다. 잠시 후, 링거 폴대를 끌고 아빠가 나타났다. 한 달여만에 보는 아빠는 생각보다 얼굴이 좋아 보였다. 가무잡잡하던 얼굴이 뽀얗게 이뻐진 모습이 낯설었다. 무엇보다 아빠가 입고 있는 민소매 환자복이 더욱 낯설었다. 아빠는 일주일 전쯤, 경운기 사고로 화상을 입었더랬다. 아빠에게 커피를 내밀며 나는 농담을 걸었다.
“아빠. 젊을 때도 안 입던 민소매를, 나이 칠십 다 되어서 입었네요! 오~ 멋쟁이네!”
나의 농담에 아빠가 따라 웃다가 정색했다.
“야야. 웃기지 마라이. 웃으면 팔이 땡게서 아파.”
이번 여름은 참 희한한 여름이었다. 아빠는 불과 한 달 사이에 세 번의 사고를 겪었다. 사다리에서 떨어진 것을 시작으로, 동네에서만 살살 타고 다니던 스쿠터가 넘어져서 팔에 찰과상을 입었고, 그리고 스쿠터 사고 다음날, 경운기 폭발 사고로 팔에 심한 화상을 입었던 것이었다. 이쯤 되자 아빠도 겁이 났던 모양이었다.
“참, 희한하다니까. 조심해야지 하는데도 참 사고가 계속 이래 나니까 이상해. 이런 적이 없었는데, 조심한다고 해도 자꾸 사고가 나”
아빠 앞에서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나도 겁이 났다.
“그래도 아빠 그만하길 다행이에요. 진짜로 아빠가 경운기가 이상하다고 얼굴을 내밀었었더라면 더 큰 사고였을텐데 이만하길 다행이에요. 그렇게 마음 편하게 가지고 의사가 시키는 대로 하세요. 제발. 농사일 때문에 집에 간다고 하지 마시고 의사가 시키는 대로만 하셔야 해요.”
아빠가 화상을 입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사고 후 며칠이 지나서였다. 사고가 나자마자 아빠는 영주에 있는 한 병원 응급실에서 치료를 받았는데, 아빠가 만난 의사는 화상 상처를 가벼이 여겼던지, 아빠처럼 심한 화상환자를 만나 본 적이 없던 모양인지 이삼일만 지나면 딱지가 앉을 것이라고 그 사이에 매일 드레싱만 해주면 된다고 했던 것이었다. 그러니 두 사람 모두 시간이 지나면 곧 괜찮아질 것이라고 생각했고 그렇게 치료 시기를 놓치고 시간을 흘려보냈던 것이었다. 며칠이 지나면 딱지가 앉을 것이라고 했었지만 며칠이 지나자 상처부위에서 진물이 흘러나오기 시작했고, 화상을 입지 않았던 손가락까지도 팅팅 붓기 시작했다. 마침 집을 찾은 셋째에 의해, 작은 아빠의 의문에 의해, 우리는 바로 아빠를 화상전문병원으로 옮겼더랬다. 결국 아빠는 그날 바로 입원을 했고, 수술을 받게 되었다.
화상치료를 위한 수술이 무척 고통스럽고, 그 후에 있는 일련의 치료들 또한 엄청난 고통을 수반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출근길에, 점심시간에, 퇴근하고 나서 아빠에게 전화를 했다. 간 밤에 잠은 잘 잤는지, 진통제는 요청했는지, 또 오늘 하루 어떻게 보냈는지, 어떤 치료를 받았는지, 좀 나아졌는지, 나는 오늘 무슨 일을 어떻게 했는지 아빠와 매일 통화를 했다. 그리고 그 주말 나는 아주 오랜만에 대구를 방문한 것이었다.
“오늘 퇴원한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이 글쎄 내가 머리가 근지럽다니까 머리를 감겨주더라니까.”
“에? 같은 병실에 있는 분이 아빠 머리를 감겨줬다고? 그분은 손을 다친 건 아닌가 보네요.”
“다리를 좀 다쳤는데, 그래도 걷고 그러는 데는 문제가 없으이까네 삼시세끼 밥차가 오면 매번 내 자리까지 밥도 갖다 주고 참, 사람이 좋드라.”
“아빠. 완전 베스트 프렌드가 따로 없네! 우와! 아빠한테도 드디어 베스트 프렌드가 생겼네!”
“고만 웃겨라이. 팔 땡긴다니까네. 자꾸 웃긴 소리하노”
다친 팔에는 붕대가 칭칭 감겨있었고, 다치지 않은 팔은 수액과 진통제를 맞고 있었다. 아빠의 링거 폴대에는 화상 치료를 받으러 갈 때 필요한 물품이 담겨 있는 종이가방이 하나가 달랑거리며 걸려있었다. 매일 아침에 아빠는 아침식사를 마치고 링거 폴대를 질질 끌고, 화상치료를 받으러 가서 대기실에 긴장된 표정으로 앉아 본인의 차례를 기다리고, 치료실에서 고통스러운 화상치료를 받고 다시 종이가방에 각종 물품을 챙겨 넣고 링거 폴대를 질질 끌고 병실로 돌아와 엄마에게 전화를 했다. 그래도 남는 시간에는 병실 사람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을 것이고, 문자 메시지 작성을 하지 못하는 아빠에게 누군가가 친절히 문자 메시지 작성하는 법을 알려주었을 것이다. 아빠는 마침내 엄마에게 문자 메시지로 ‘알아써’ 라고 답을 했고, ‘팔이덭아파’라며 추가 메시지를 보냈다. 그리고 세찬 비가 내리는 날에는 엄마에게 ‘거기는비가안오나’라며 띄어쓰기를 생략한 메시지를 보냈다.
엄마는 아빠에게 전화해서 ‘왜요. 보고싶니껴?’라고 물었고 아빠는 ‘응’이라고 대답했다. 이에 장난기가 발동한 엄마가 ‘말로 해봐. 말로 해야 알아듣지.’라고 아빠에게 평소에 하지 않던 요구를 하자 아빠가 머뭇하다 끝내 ‘보고 싶다’라고 대답했다며 잔뜩 흥분해서 내게 전화를 해서 자랑을 했었다. 이 상황에서도 두 사람은 홀로 사는 딸의 심정을 헤아리지 않았다. “쳇, 뭐야. 나한테 자랑하는 거야? 지금? 하아, 남편 없는 사람 들으라고 일부러 그러는 거지?” 라며 괜히 질투가 난 척을 했더니 “부러우면 니도 결혼을 하든가”라며 나를 잔뜩 놀리고는 전화를 끊었다.
정말로 이번 여름은 참 이상했다. 아빠는 한 달 사이에 세 번의 사고를 당했고, 갑작스레 입원을 하고 수술을 받았으며 엄마는 아빠가 안 계신 동안 혼자서 농사일을 해야만 했다. 아빠가 퇴원을 하고 통원 치료를 하는 동안에도 수술부위에 땀이 닿으면 안 되었고, 햇볕을 쬐면 안 되었기에 엄마는 꽤 오랜 시간 작은 아버지의 도움으로 농사일을 했어야 했지만, 누구보다 짜증이 많은 두 사람은 눈에 띄게 짜증이 줄었다. 엄마는 아빠가 과수원을 둘러보러 나갔는데 전화를 받지 않으면 바로 아빠를 찾으러 다녔고, 아빠도 엄마가 아프면 옆을 지켰다.
올해 여름은 유난히 힘들었다. 계속된 야근에 불면증까지 겹쳐 하루에 두 시간을 겨우 자고 출근했고, 많이 잔 날도 네 시간을 넘긴 밤이 없을 정도였다. 잠자리에 누우면 내일 출근해서 해야 할 일의 순서를 고민했고, 그렇게 밤을 새우다 보면 부모님의 걱정도 스멀스멀 피어나기 시작했다. 만약 아빠가 경운기가 이상하다고 얼굴을 들이밀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렇게 일어나지 않았지만 일어날 뻔했던 일들에 대해 걱정하는 밤이 계속되었다.
화상사고가 일어난 날인가, 셋째 동생이 그 유명하다는, 박막례 할머니가 사주를 본 곳에서 사주를 보았고 그 이야기를 해주었다. 역술가가 최근에 아빠가 좀 아프지 않았냐고 묻더라며, 이제 그런 우환은 다 끝났고 우리 부모님은 건강히 장수하실 것이니 걱정할 것 없다는 이야기를. 우연인 지 모르겠지만 그 이후 아빠는 정말 별 일 없이, 건강히 잘 지내고 계신다. 동생이 역술가에게 들은 이야기를 전해 들은 부모님은 안도하셨다. 평소 사주니, 점이니 하는 것들을 믿지 않는 나조차도 조금 안심이 되었던 것은 부인할 수가 없다. (여담이지만 제대로 사주를 본 일이 없었던 나는 그 이야기를 듣고 바로 예약을 했다. 3개월을 기다려야 하지만 말이다.)
아빠한테 많이 맞고 자라서 그런지 아빠와 가깝다고 느껴본 적이 별로 없던 나는 아빠의 민소매 환자복을 본 순간부터 왜인지 아빠와 아주 조금 더 가까워진 느낌이었다. 매일 출근길에 아빠에게 전화를 걸면 아빠는 “운전 조심해라이. 항시 조심하고 댕겨야한다이.” 라며 나에게 안전을 당부하며 전화를 끊었는데, 괜히 하루가 든든해지곤 했다.
처음엔 좀 민망했지만, 나쁘진 않았다. 민소매 환자복을 입은 아빠는.
무더운 여름이 또 온다면, 그땐 모른 척 민소매 티셔츠 하나를 아빠에게 선물해볼까. 그럼 아빠는 그때는 마음껏 배가 당기도록 웃을까.
부디 건강히 무더운 여름도, 이상한 여름도, 희한한 여름도, 힘든 여름도 배가 당기도록 웃으며 넘겨나갔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