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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단걸 Jun 23. 2021

내 앞에 몇 번의여름이 남았다고.

수박 한 덩이를사며 대는핑계.



여름이다. 여름과일은 뭐니 뭐니 해도 단연코 수박이다. 적어도 나에겐. 나는 과수원집 딸답게 사과도 좋아하고, 과수원 한편에 있는 배나무에서 딴 배도 좋아하고, 잘 익은 망고도, 동남아 여행을 하면 매일 한봉다리의 망고스틴을 먹어치울 정도로 대부분의 과일을 좋아한다. 숨 막히게 더운 여름 날씨는 싫지만, 그런 여름을 조금이라도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도 수박이다. 수박의 계절이 오면 나는 집 앞 슈퍼에 진열되어있는 수박을 보며 고민한다. '살까. 말까. 혼자 사는데 수박 한 통은 너무 과하지 않을까. 수박 껍질 내다 버리는 것도 귀찮은데. 아, 가격도 너무 비싼데.' 혼자 수박 진열대 앞에 서서 한참을 고민하다 한통을 안아 들고 경쾌한 걸음으로 집으로 돌아온다. ‘내 앞에 몇 번의 여름이 남았다고, 수박 한 덩이 가지고 고민을 한담?’


내가 어렸을 때 부모님은 수박농사를 지으셨다. 아무래도 과수원의 수입은 늦가을, 사과를 수확하고 내다 파는 그때 한 번뿐이기에 수익의 다변화를 위해 수박농사, 오이농사, 고추농사, 호박 농사, 감자 농사, 담배농사 등을 지으셨는데 주말이면 부모님의 농사일을 돕던 우리에게 가장 힘든 일은 단연코 수박이었다. 특히 수박을 따는 날에는 새벽 4시 반이면 잠에서 깨서 수박밭으로 가야 했다. 대게 7월 말이나 8월 초에 수박을 수확을 했는데, 해가 뜨기 시작하면 너무 더워서 일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잠도 덜 깨어 수박밭에 도착하면 우리는 거대한 밭에서 수박을 나르기 시작했는데, 무거운 수박을 품에 안고 수박밭 입구에 있는 트럭까지 나르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다. 수박은 꼭지를 다치면 안 되기 때문에 수박을 따는 일은 우리에게 허락되지 않았고, 수레에 수박을 여러 덩이 싣고 나르는 일도 허락되지 않았는데 이는 수박밭 곳곳에 지뢰처럼 난 풀에 수레바퀴가 걸려 넘어지면 싣고있던 수박 여러 덩이가 아작이 나기 때문이었다. 이른 새벽부터 수박을 날라 트럭 입구에 두면 아빠와 수박 장수 아저씨가 그야말로 묘기에 가깝게 수박을 트럭에 실었다. 아빠가 밑에서 수박을 던지면 수박 장수 아저씨는 한 손으로 그 큰 수박을 받아 트럭에 차곡차곡 쌓았다. 어찌나 잘 쌓았던지 차가 흔들려도 수박은 무너지지 않았다. 이때에도 우리는 길게 줄을 서서 수박을 안아 아빠에게 인계하는 일을 맡았다.


수박을 실은 트럭이 떠나고 나면 밭에 널린 수박  괜찮은 것들을 수거해서 집으로 돌아왔다. 할아버지는 우리가 가지고  수박을 시원한 물이 가득 담긴 욕조에 넣어두셨다. 새벽부터 일을 해서 피곤한 우리는 다시 이불속으로 기어들어가 한잠 자고 일어나서 할아버지와 함께 시원해진 수박을  덩이 꺼내와 잘라먹었다. 뜨거운 태양이 작열하는  여름 낮에 마루에 앉아 할아버지와 시원한 수박을 먹던 , 그것이  여름의  장이었다. 수박을 좋아하시던 할아버지는 우리가 먹다가 남긴 수박  덩이와 숟가락 하나를 들고 할아버지 방으로 들어가셨다. 그렇게  한구석에 수박을 두고서 미지근해진 수박을 조금씩 드시는 이 할아버지의 여름이었다. 나의 여름에는 수박과, 할아버지와, 수박 트럭이 있었다. 수박은 나의 여름이었고, 나의 여름에는 수박이 있었다. 그래서 내가 수박을 좋아하는 일인지도 모른다. 물론 나와는 다르게 셋째 동생은, 수박을 따고 나르던 그때의  기억이 너무 싫다며 아직도 수박을 입에도 대지 않는다.


커다란 수박 한 덩이를 개수대에 담아 깨끗이 씻은 후에, 본격적으로 자리를 잡고 앉아 수박을 가른다. 네모나게 깍둑썰기를 하고 사용하지 않아 김치 냄새가 배어있지 않은 김치통에 차곡차곡 담는다. 김치통에 들어가지 않는 수박은 나의 저녁 식사가 될 터였고, 강아지들의 달콤한 간식이 될 것이다. 수박껍질을 바로 내 다 버리고, 나와 강아지들은 테이블에 둘러앉아 좋아하는 미드를 틀어놓고 본격적으로 수박을 먹는다. 시원하고, 달콤한 수박을 먹으며 나는 생각한다. ‘그래, 오늘 하루 힘들었으니 이 정도의 달달함이 필요했던 거야. 내 앞에 몇 번의 여름이 남았다고.’ 물론 앞으로도 내 앞엔 수십 번의 여름이 오고 갈 테지만 이번 여름은 이번 한 번 뿐이니까. 이렇게 무더운 여름날의 저녁에 나와 강아지들이 달달한 수박을 함께 먹는 일은 계속 반복되지 않을 것이니까.


이제 부모님은 더 이상 수박 농사를 짓지 않으신다. 그에 더해 오이든 호박이든 담배든 고추와 사과를 제외하고는 다른 작물은 심지 않으신다. 이제 더 이상 젊지 않은 몸이라, 이제는 그렇게까지 힘들게 농사를 짓지 않아도 되기 때문인지 가족들이 먹을 것을 제외하고 고추와 사과농사에 집중하신다. 그래서 두 사람은 과수원의 바쁜 일이 끝나면 사과가 익어가기를 기다리며 이곳저곳 여행을 다니고, 맛있는 것을 먹으러 다니기도 한다. 그랬던 두 사람이 올해는 밭 한구석에 수박을 심어두었다. 나는 엄마에게 수박이 익거들랑 꼭 나에게 알려달라고 했다. 그리하여 마침내 수박이 알맞게 익은 날, 부모님과 내 강아지들과 함께 시원한 그늘에 앉아 수박을 잘라먹고, 그때의 할아버지가 그리하셨던 것처럼 숟가락 하나를 들고 수박 속살을 파먹으며 내 여름의 또 다른 한 장을 써 내려가야지.


여름엔 역시 수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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