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이니까!
바야흐로 수박의 계절이다. 수박은 내가 제일 좋아하는 여름 과일이다. 날씨는 점점 더 여름으로 걸어 들어가고 있지만 아직 한여름의 숨이 턱턱 막힐듯한 날씨는 아니다. 본격적으로 여름이 시작되지 않았지만 집 앞 슈퍼에서는 여름을 기다렸다는 듯이 수박을 내놨다. 퇴근길, 주차장에 차를 세워두고 집 앞 작은 슈퍼로 들어가 수박을 고른다. 한쪽 어깨에 가방을 메고, 한 손에는 노트북 가방을 들고 다른 한 손으로 수박을 들고 집으로 간다. 개수대에 수박을 넣고 흐르는 물에 수박을 씻어둔다. 강아지들 밥을 먹이고, 산책을 다녀와 거실 탁자에 도마와 칼을 가져다 두고 개수대에 넣어둔 수박을 꺼내 몸통 한가운데를 자른다. 경쾌하게 ‘쩍’ 소리를 내며 수박이 반으로 갈라진다.
작년 여름, 수박 한 통이 3만 9천 원을 하던 그때에도 나는 수박을 자주 사 먹었다. 너무 비싸서 수박 가판대 앞에 서서 고민을 하기도 했지만 ‘아, 뭐 어때. 여름 한 철인데 뭐’ 하며 힘든 한 여름의 무더위를 수박의 시원함으로 달랬더랬다. 그래서 집 앞 슈퍼에 수박이 진열되어있는 것을 보자 나는 반가웠다. 올해 더위가 역대급이 될 것이라는 기사에 한숨을 푹 내쉬다가도 그래도 수박이 있으니까 견딜만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누가 뭐래도 단연코 무더운 여름에 먹는 수박 한 조각은 천상의 맛이 아니던가.
지난주, 조카의 백일을 축하하기 위해 안동에 다녀왔다. 마지막으로 조카를 본 게 불과 2주 전이었지만 그 2주 사이에 조카는 훌쩍 커 있었다. 식사를 마치고 후식으로 과일을 먹는데 내가 좋아하는 수박이 준비되어있었다. 나는 내가 집에서 먹는 대로 수박을 잘랐다. 우선 몸통을 반으로 자른다. 세 개의 선이 보이면 그중 한 선을 따라 다시 반으로 자른다. 그리고 수박을 가로로 자르면 수박씨가 그대로 드러난다. 자르면서 수박씨를 어느 정도 제거할 수 있기 때문에 나는 이렇게 깍둑썰기를 해서 먹는다. 내가 수박을 자르면서 일주일에 수박 한 통씩을 먹는다고 하자 그 자리에 있던 친척들이 모두 놀라는 게 아닌가.
"혼자서 어떻게 일주일에 수박 한 통을 먹느냐"라고.
"아니 왜 일주일에 수박 한 통을 못 먹는 거야? 일주일에 수박 한 통씩 먹는 게 이상한 거야?"
몇 주전에 집 앞 슈퍼에서 수박 한 통을 샀다. 신난 마음으로 집에 와서 자리를 잡고 수박을 반으로 갈랐는데 이상하게도 '쩍'소리가 나지 않았다. 반으로 가른 수박을 보니 수분이 거의 없었고 수박의 흰 부분은 노란색에 가까웠다. 혹시나 해서 조금 잘라 맛을 보았더니 확실히 신선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3만 원을 주고 산 수박에, 이 집에서 산 수박이 이런 상태인 것은 처음이었다. 고민하다가 슈퍼에 전화를 했다.
“사장님, 조금 전에 수박을 사 갔는데요, 수박이 상한 것 같아요.”
“아이고, 번거로우시겠지만 다시 오시겠어요? 제가 다른 걸로 드릴게요. 죄송합니다.”
“그럼 지금 이 수박을 가져다 드릴까요? 아니면 버릴까요?”
“그냥 버리세요. 제가 바로 준비해 놓을게요.”
나는 낑낑대며 가지고 온 수박을 다시 낑낑대며 음식물 쓰레기통에 버리고 다시 슈퍼로 갔다. 혹시나 해서 상한 수박 사진을 찍어두었는데 사장님은 사진은 안 봐도 된다며 번거롭게 해서 죄송하다고 연신 사과를 하셨다. 나는 사장님이 주신 수박을 들고 낑낑대며 집으로 돌아왔다.
그 일이 있은 후에도 나는 여전히 그 슈퍼에서 일주일에 한 번씩 수박을 산다. 슈퍼 사장님은 내가 수박을 계산할 때마다 말씀하신다.
“만약에 맛이 없으면 바로 전화 주세요. 바꿔드릴게요. 우리 집 단골이신데요!”
이 집에서 산 수박은 대부분 너무너무 달고 맛있다. 간혹 달지 않은 수박도 있지만 쓰지 않으면, 나는 언제나 좋다. 더운 기운이 아직 공기 중에 떠돌아다니는 저녁 시간에 강아지들과 산책을 하고 집에 들어와 냉장고에 넣어둔 수박을 꺼내 접시 한가득 담고 거실에 앉아 내가 좋아하는 드라마를 틀어놓고 젓가락에 수박을 꽂아 꼬치를 먹듯 수박을 베어 물면 틀어놓았던 실링팬을 꺼도 좋을 만큼 기분 좋은 서늘함이 몸속에서부터 퍼져나간다. 내 옆자리에 앉아 수박 한 조각을 달라고 졸라대는 강아지들에게도 수박을 작게 잘라 건네주면 와그작와그작 수박 씹는 소리가 작게 들려온다. 셋이 함께 와그작와그작 수박을 씹는 초여름의 저녁은, 상쾌한 수박 냄새가 집안 곳곳에 퍼져나가는 이 시간을 좋아하지 않을 수 없다.
습하고 무더운 일요일 오후, 우리는 한 시간의 산책 후 냉장고에서 수박을 꺼내 셋이서 사이좋게 나누어 먹었다. 덥다고 연신 짜증을 내며 걷던 꽃님이도 달콤한 수박에 기분이 풀린 듯 이내 시원한 자리에 누워 코를 골며 잠을 자고, 시원함 보다 푹신함을 더 좋아하는 봄이는 방석 위에 올라가 쌔근쌔근 잠을 잔다. 수박이 없었다면 우리의 여름은 얼마나 무료했을까. 매주 새로운 수박을 사러 가는 길도, 무거운 수박을 들고 낑낑대며 집까지 들고 오는 길도, 나에겐 모두 눈이 부시도록 쾌청한 여름이다.
수박은 푸른 들판 위에 하얀 뭉게구름이 몽글몽글 솟아있는 그런 풍경을 가진 여름의 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