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길 사람 속보다 어려운 반 길 강아지 속마음
<봄이 이야기>
우리는 7년 전에 만났다. 유난히 차갑고, 시리기만 했던 겨울을 떠나보낸 후, 새로운 계절의 햇살과 온기가 가득했던 이른 봄날이었다. 나만 사랑하겠다고 약속했던 나의 가족들이 나를 버린 지 어느덧 두 달이 다 되어가던, 내 가족들이 다시 나를 찾아오기만을 하염없이 기다리던 어느 봄날이었다. 내 귀여움의 상징이던 새하얀 털은 누더기가 되었고, 눈곱을 떼지 못해 눈 주위는 빨갛게 부어올랐으며, 나에게선 지독한 냄새가 풍겼다. 그래도 나는 살아야겠기에, 가족들이 나를 다시 찾으러 올 때까지 버텨야 했기에, 가족들이 나를 내려놓고 떠나버린 주차장을 떠돌며 사람들에게 불쌍한 처지를 어필해 주전부리를 얻어먹으며 지냈다. 그날 여자 두 명이 자전거에서 내려 나에게로 다가왔을 때 나는 직감했다. 오늘은 어제와 다를 것이라고, 내일도 오늘과는 틀림없이 다를 것이라고. 나를 버렸고 나를 찾으러 오지 않는 가족들을 계속 기다리는 일은 이제 끝났다고. 대신 나는 이 호구들과 함께 살아갈 것이라고. 그리고 이 호구는 나를 절대 버리지 않을 것을 나는 한눈에 알 수 있었다. 그렇게 우리는 7년 전에 만났다.
<나의 이야기>
“왕! 왕! 왕!”
내가 퇴근해서 현관문을 열면 봄이는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현관까지 뛰어나와 격렬히 짖는다. 봄이는 꼬리를 흔들며 짖음으로써 나에 대한 반가움과 왜 이제서야 오냐는 질책을 동시에 표현한다. 하루 종일 혼자 두었다는 미안함에 나의 첫마디는 항상 “봄이 오늘은 뭐했어?”이다. 내가 그렇게 말을 걸면 봄이는 시동을 걸고 더 격렬하게 짖는다. 마치 내가 없는 낮시간 동안 뭐했는지 종알 종알 이야기하는 것 같다. 그리고 두 번째는 봄이가 어디에서 나를 기다렸을까 찾아본다. 그녀의 온기가 남아있는 이불, 담요, 방석 등을 손으로 쓸어보면서 기다림의 온도를 재어보고 서둘러 그녀와 함께 산책에 나설 준비를 한다. 산책을 위해 편한 옷으로 갈아입을라치면 흥분한 봄이는 내 바짓단을 물고 놓지 않는다. 대체 왜 그러는 것일까? 봄이가 방해만 안 해준다면 나는 더 빨리 옷을 갈아입고, 더 빨리 산책에 나갈 수 있을 텐데. 왜 봄이는 하루도 빠짐없이 내 바짓단을 물고 늘어지는 것일까.
<봄의 이야기>
7년을 함께한 내 동거인은 산책을 갈 때도, 출근을 할 때도 준비하는데 시간을 너무 쓴다. 참 답답하다. 하루 종일 산책시간만을 기다려온 나를 생각한다면 퇴근하자마자 옷도 갈아입지 말고 바로 산책을 나가야 하는 거 아닌가? 동거인은 희한하게도 잘 때는 꼭 잠옷을 입고, 출근할 때는 정장을 차려입고, 또 산책할 때는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헬스장에 갈 때는 또 다른 운동복으로 갈아입는다. 대체 하루에 옷을 몇 번이나 갈아입는 것인지 모르겠다. 그래서 산책 준비를 할 때면 나도 모르게 긴장하게 된다. 쟤 또 지난번처럼 운동복만 두세 번 갈아입을까 봐. 오늘도 나는 목청껏 짖는다. “야! 빨리 좀 준비해! 나 급하단 말이야! 왕! 왕!”
<나의 이야기>
봄과 함께하는 산책은 줄다리기와 눈치게임의 연속이다. 겨우 2.5킬로인 봄이는 그녀의 몸무게보다 20배가 넘는 나와하는 줄다리기를 좋아한다. 나는 앞을 향해 걸어가고 있는데 줄이 풀리는 느낌만 있어서 뒤돌아보면 마치 뒷짐 지고 서있는 노인처럼 한자리에 서서 꼼짝도 하지 않고 나를 쳐다보고 있을 때가 있다. 어디가 불편한가 하고 다가가 보면 이내 쏜살같이 아까 내가 가던 방향으로 튀어나간다. 줄이 팽팽해지도록 앞장서서 뛰어간다. 그러면 나도 덩달아 뛰게 된다. 하루 종일 일하고 피곤한 몸을 이끌고 퇴근해서 오자마자 산책길에 나서는 나를 꼭 이렇게 뜀박질을 하게 만들어야만 하는지, 대체 봄이는 왜 이러는 걸까?
<봄이 이야기>
나의 동거인은 체력을 길러야 한다. 조금만 스트레스를 받거나 야근이 이어지면 꼭 몸살이 나서 드러눕는다. 그럴 때는 동거인이 체력을 회복할 때까지 산책을 할 수 없다. 그것이 내가 산책을 나가면 어떻게든 동거인을 뛰게 만드는 이유이다. 체력은 평소에 꾸준하게 기르는 것이니까. 그런 나의 깊은 뜻은 모르고 내가 뛰면 동거인은 나를 따라 뛰면서 욕을 하곤 한다. 본인도 체력이 없다고 투덜대면서 그동안 수영이다, 필라테스다, 요가다, 헬스다 하면서 갖다 버린 돈이 얼마인지 모르겠다. 차라리 나랑 산책하는 시간을 늘리고, 나와 같이 뛰면서 체력을 기르면 언젠가는 동거인이 되고 싶다는 공효진 몸매가 될 수 있을 텐데. 내가 말만 할 수 있다면 동거인에게 말해주고 싶다. 헬스장 그만 다니고 나랑 더 산책하자고, 내가 너 반드시 공효진 몸매로 만들어 준다고, 나만 믿으라고! 왕! 왕!
<나의 이야기>
내가 샤워를 하는 동안 봄이는 욕실 앞에 자리를 잡고 앉아있다. 나에게서 등을 돌리고 혹시 누구라도 내 벗은 몸을 볼까 망을 보는 것처럼, 마치 최전방의 초소에서 경계근무를 서는 군인 같다. 내가 하루 중 가장 약해지는 시점에 나를 지켜준다. 그래서 나는 샤워하는 동안 곁눈질로 봄이를 자꾸만 훔쳐본다. 저 조그마한 몸으로 나를 지켜주려 하는 그 마음이 기특하고 고마워서 나는 샤워가 끝나면 벌거벗은 채로 거실을 가로질러 봄이 간식을 챙겨준다. 그러면 봄이는 야무지게 앞발로 간식을 잡고 잘근잘근 씹는다. 간식 냄새가 봄이 주변으로 퍼져나가면 나는 아주 조금 더 행복해진다.
<봄이 이야기>
동거인은 짠돌이다. 기온이 영하로 내려가지 않는 한 보일러를 틀지 않는다. 내 동거인이 샤워를 할 때마다 욕실 앞에 앉아있는 이유는 단순하다. 온수 설정을 하면 욕실 앞이 따뜻해진다. 그래서 나는 동거인이 샤워를 하려고 샤워가운을 챙기면 그녀보다 먼저 욕실 앞 바닥에 자리를 잡고 앉는다. 단 십 분 정도의 시간이지만 그래도 그 십 분이 오늘 하루 중 가장 따뜻한 시간이니까 나는 이 시간을 어떻게 즐겨야 하는지 알고 있다. 동거인은 샤워를 끝내고 나오면서 나에게 “언니 샤워하는 동안 지켜준 거야? 고마워!”하면서 갑자기 거실로 뛰어가서 나에게 간식을 준다. 이렇게 따듯한 곳에서 몸도 녹이고 간식도 먹다니! 동거인이 하루에 두 번씩 샤워를 했으면 좋겠다.
<나의 이야기>
내가 침실로 가기 위해 티브이를 끄고, 거실 조명을 끄면 소파 위에서 자던 봄이도 침실로 이동할 준비를 한다. 기지개를 켜고 소파 위에서 사뿐히 내려와 경쾌하게 탁탁탁 발소리를 내며 침대로 이동한다. 내가 먼저 누워 내 왼쪽 편 이불을 살짝 들어 올리면 봄이는 내 겨드랑이 아래에 자리를 잡고 눕는다. 항상 봄이의 엉덩이는 내 얼굴 방향을 향해있다. 왼손으로 봄이의 턱을 살살 긁어준다. 봄이가 잠들기 전에 손을 떼면 봄이는 앞발로 내 손을 탁탁 친다. 아직 잠들지 않았으니 더 만지라고. 그러면 나는 봄이가 잠들 때까지 왼손으로 봄이의 작은 몸을 만져준다. 그러다 보면 나도 이내 잠이 든다.
<봄이 이야기>
동거인이 잠들 때까지 기다렸다가 그녀가 잠들면 사뿐히 침대를 내려와 집안 곳곳을 다니며 한결 편안한 마음으로 순찰을 한다. 동거인이 없던 낮시간 동안 오롯이 나 혼자서 집을 지켰다면 그녀가 코를 골며 잠든 지금은 든든하다. 동거인이 사다준 장난감도 가지고 놀고, 오도독오도독 밥도 먹고, 촵촵 소리를 내며 물도 마신다. 동거인의 잠귀가 어두워서 다행이다. 내가 아무리 뛰어놀아도 그녀는 세상모르고 잠들어 있으니까. 편안한 마음으로 한 껏 놀다가 다시 동거인의 옆에 자리를 잡고 눕는다. 그녀의 코 고는 소리를 자장가 삼아 잠을 자려한다. 오늘 밤 꿈에는 복길이 언니가 나왔으면 좋겠다. 복길이 언니를 만나면 동거인이 그녀를 많이 그리워한다고, 자꾸 그녀의 옷을 꺼내 냄새를 맡고, 그런 날이면 나를 안고 운다고. 그래도 우리 둘은 씩씩하게 잘 지내고 있다고. 복길이 언니를 만나는 그 날까지 내가 언니와 나의 유일한 가족인 그녀를 끝까지 지켜줄 거라고. 7년 전 그녀가 나에게 “너 나 따라갈래?”라고 물었을 때 따라오길 잘했노라고. 그리고 내일 아침 동거인이 출근할 때 간식 상자를 제발 내 키가 닿는 곳에 두고 가게 해달라고 빌며 잠을 청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