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엄마, 이모, 외할머니
나는 엄마를 심하게 닮았다. ‘닮다’는 표현에 ‘심하게’라는 수식어를 붙여도 될지 모르겠지만 나와 엄마는 꼭 닮았다. 막내가 어린 시절, 부모님의 약혼사진을 보고 ‘왜 큰누나만 아빠랑 사진을 찍었냐’고 물어볼 정도로 나는 엄마를 닮았다. 내 여동생들도 나와 비슷한 얼굴을 가졌는데 이국적인 외모의 친가 쪽과 달리 우리는 전형적인 동양인의 얼굴이다. 그랬기에 친가 쪽 친척들은 어린 시절 우리를 볼 때마다 혀를 차며 이야기했다. “베랬다. 인물 다 베랬어. 너그도 아빠 닮았으면 이뻤을 텐데…” 흐린 말끝에 어떤 말이 올 것인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우리는 알 수 있었다. 그들과 별로 닮지 않은 우리를 못생겼다며 어쩌다 외탁을 해서 어쩌면 좋았을 인물을 다 버렸다는 그 배려 없고 악의적인 표현들을 내 앞에서 서슴없이 하는 그들 사이에서 그들처럼 큰 눈과 진한 쌍꺼풀, 오뚝한 콧대가 없는 나는 소외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어린 시절 콧대가 높아지길 바라며 빨래집게로 코를 집어놓고 잠자리에 들기도 했는데 코가 높아지기는커녕 빨래집게의 물결무늬만이 내 코에 선명하게 남겨졌다.
나는 엄마를 꼭 닮았고, 엄마는 이모와 외할머니를 빼다 박았다. 그러므로 나랑 닮은 여자들이 없는 친가보다 엄마와 같은 얼굴을 한 외할머니, 이모와 함께 있을 때 조금 더 마음이 편안했다. 내가 닮은 사람들이, 나와 같은 얼굴을 한 여자들이 있다는 것이, 그녀들은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았던 그녀들의 인생을 당당하게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 나에게 위로가 되었다.
내가 꼭 닮은 나의 엄마는 영특하다. 그녀는 특히 셈에 뛰어났는데, 가을에 사과를 수확하고 저장고에 쌓아놓은 사과상자 수를 셀 때면 아빠는 엄마를 불러 그녀에게 몇 박스냐고 물어보는데 엄마는 금세 넓은 저장고에 쌓인 사과상자 수를 이야기한다. 아빠는 엄마에게 다시 묻지 않는다. 그녀의 셈이 틀리는 경우는 없기 때문이다. 또한 엄마는 새로운 것을 배우는 일에도 거침이 없다. 이십여 년 전 운전면허 시험에 도전할 때는 필기시험을 다섯 번이나 떨어지고도 포기하지 않았고 결국 여섯 번째 도전에 필기시험을 붙고, 기능시험은 한 번에 성공했다. 지금은 아빠가 위험하다며 말려서 하지 않지만 50킬로그램도 채 되지 않은 가녀린 몸으로 한때는 경운기를 몰았더랬다. 스마트폰을 구입하고 나서는 카카오톡 사용법을 배웠고, 지금은 나보다 더 이모티콘을 적재적소에 쓰며 우리와 소통을 한다. 그녀는 스마트폰으로 인터넷뱅킹을 하는 법을 배웠는데, 여전히 은행에 가서 업무를 보는 아빠와는 달리 그녀는 새로운 문물이든, 기술이든 배우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모르면 물어보면 되고, 배우지 못해 모르는 것은 부끄러운 게 아니라는 그녀와 내가 같은 얼굴이라는 것이 나는 아주 가끔 좋다. 아빠는 과수 관련 교육이 있을 때면 엄마에게 배울 것을 추천하는데 그것은 그녀의 영특함을, 그녀의 도전을, 그녀의 의지를 아빠도 인정하기 때문이다.
엄마의 엄마는, 즉 나의 외할머니는 평생을 청소노동자로 사셨다. 외할아버지는 결혼을 두 번 하셨는데 나의 외할머니는 후처였다.(이런 저급한 표현은 다름 아닌 친할머니가 나에게 비밀을 털어놓듯이 작은 목소리로 이야기했던 그 표현 그대로이다.) 엄마가 할머니의 뱃속에 있을 때 외할아버지께서 돌아가셨고 그렇게 홀로 된 외할머니는 근처 대학교에서 청소노동자로 일하셨다. 엄마가 아직 어렸을 때 한약을 잘못 먹여 귀가 멀어지게 된 때문인지 외할머니는 엄마에게 부채의식이 있었는데 그래서인지 막내딸의 첫째 딸인 나를 유독 이뻐하셨다. 세 살 때 이미 한글을 깨친 나는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부터 혼자서 버스를 타고 봉화에서 원주까지 외할머니를 만나러 가곤 했는데, 엄마가 나를 봉화 시외버스터미널에서 버스에 태우고 외할머니께 전화해서 몇 시 차를 탔다고 이야기하면 그녀는 원주시외버스터미널에서 나를 기다렸다. 지금과 달리 고속도로가 아닌 국도를 달린 버스는 도착 예정시간을 지나서 도착할 때도 있었고, 예정시간보다 일찍 도착할 때도 있었는데 그녀는 어김없이 버스 승객들이 내리는 그곳에서 나를 기다렸다. 나를 만나면 꼭 안아주시고는 곧장 목욕탕을 데리고 가서 묵은 때를 밀어주시고 새 옷도 사 입히셨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청소하면서 주워 모은 색색의 볼펜을 내가 가져온 가방 한 곳에 넣어주며 동생들과 나누어 쓰라며 웃었는데 잉크가 얼마 남지 않은 볼펜들 마저도 좋았던 나는 소중히 집까지 가져왔다. 엄마는 항상 그녀의 엄마가 혼자 외로이 사는 게 마음이 아팠을 테지만 시부모님을 모시고 사는 그녀의 형편에 그녀의 엄마까지 돌볼 여력은 없었다.
둘째 동생이 결혼할 때, 외할머니는 엄마에게 결혼 준비에 큰돈이 들어갈 일이 많을 거라며 백만 원을 건네주었다. 엄마는 외할머니에게 화를 냈다.
“엄마 병원비에나 쓰지, 뭐하러 이런 걸 줘”
외할머니는 엄마에게 웃으며 말했다.
“나 병원비에 쓸 돈은 따로 모아놨다. 그리고 나 죽으면 장례 지낼 돈도 다른 통장에 있으니 그것 쓰면 된다. 손주들 결혼하면 주려고 한 사람에 백만 원씩 해서 다 모아뒀으니 이건 받아다가 둘째 결혼에 보태써”
그날 엄마는 얼마나 울었을까. 외할머니는 아들 하나에 딸 둘을 두셨고, 그 외삼촌은 이미 돌아가셨다. 외할머니와 같은 도시에 살았던 이모의 자녀들과 달리 우리는 자주 찾아뵙지도 못했는데 그 이야기를 건네들은 나의 가슴도 먹먹해졌음은 물론이다. 아빠의 환갑 때에도 막내사위의 환갑이라며 백만 원을 아빠에게 건네주었다. 아빠는 특히나 외갓집을 가지 않았는데 그게 많이 미안했던지 그 돈을 건네받고는 ‘노인네가 참 대단하다’며 엄마가 외갓집에 갈 때면 이것저것 많이 싸서 보내주며 아직까지도 그 이야기를 하신다. 노인네가 평생 청소일을 하면서 번 돈을 이렇게 쓰시면 어쩌냐며 말이다. 참으로 고맙더라는 말까지 덧붙이며.
여전히 외할머니는 이모가 함께 살자고 하는 요구를 무시하시고 혼자 월세방에서 살고 계시는데 연금에 가입해놓았을 리 만무한데 그녀는 그녀의 노후자금을 청소노동을 하시면서 다 모아두셨다고 했다. 누구에게도 짐이 되고 싶지 않다며 이모의 요구를 거부하시는데 나는 외할머니를 대할 때마다 그 모습조차도 멋있게 느껴진다. 어쩌면 나도 혼자서 노후를 맞이할 때에 그녀처럼 혼자서도 씩씩한 할머니가 되어 동네 친구들을 모아놓고 내기 화투도 치고, 함께 꽃놀이도 다니며 재밌게 지내야지 하는 결심을 하게 된다.
나의 하나뿐인 이모는 정말 멋있다. 어린 나이에 결혼을 해서 사 남매를 낳았고 남편의 폭력이 아이들에게까지 확장되자 뒤돌아보지 않고 이혼을 했다. 이모부의 폭력은 무지막지해서 망치 같은 무시무시한 무기로 위협하기도 했었는데 그런 무서운 남자에 맞서 용감하게 이혼을 했고 혼자서 사 남매를 키워냈다. 감당하기 힘들었을 과거를 훌훌 털어낸 그녀는 내 눈에는 항상 당당하고 잘 웃는 멋지고 아름다운 여성이다. 이모는 또한 욕도 굉장히 잘하는데 나는 그녀가 하는 욕을 들을 때면 더욱 그녀가 귀엽게 느껴진다. 이모와 만나면 무슨 말을 해도 감정을 상하는 일이 없고 유쾌하게 웃고 마는 것이다. 지난번에 이모와 함께 차를 타고 이동하는데 결혼을 종용하기에 나는 계속해서 일을 하고 싶은데 결혼해서 아이가 태어나면 지금의 커리어를 유지하는 게 힘들 것 같다는 내 이야기에 이모가 말했다.
“야 인마, 여자가 결혼해서 아이 낳고 키우는 게 얼마나 보람인데. 얼른 남자 만나서 결혼해”
너무 어이가 없던 나는 이모에게 말했다.
“악! 이모! 난 이모 같은 시어머니 정~~ 말 싫어! 이모 같은 시어머니 만날까 봐 난 결혼 안 해! 악!”
소리를 지르는 나를 보며 그녀는
“어쭈! 이년이! 이모한테!”
라며 소리를 되질렀다. 우리는 잠깐의 정적 후 함께 배가 당길 때까지 웃어댔다. 그래서 나는 그녀가 편하다. 엄마에게는 반찬을 싸 달라는 이야길 잘하지 않는 나이지만 이모집에 갈 때면 만두며 김치며 이모의 반찬을 싸 달라고 이야길 한다.
“이모, 엄마는 음식을 잘 못해요. 미역국을 끓이면 아주 동네 사람 백 명이 일주일은 먹고 남을 양을 끓여요. 먹을 만큼 조금씩 해야 하는데 엄마는 너무 손이 커. 그리고 기본적으로 간을 못 맞춘다니까요. 이모가 하는 만두는 이렇게 맛있는데 말이에요.”
내가 돌아가고 나면 이모는 엄마한테 전화를 한다.
“야, 니 딸년이 나한테 와서 니 욕을 하고 가더라. 너는 왜 딸년한테까지 욕을 먹냐. 앞으로 국 끓일 때 먹을 만큼만 끓여먹어!”
그러면 다음은 엄마가 곧장 나에게 전화를 한다.
“야. 너는 엄마 욕하려고 이모 집 갔냐? 나쁜 년!”
이모는 한때는 폭력을 일삼았던, 그래서 이혼을 한 이모부와 친한 친구로 지내고 있다. 우리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셨을 때, 아빠가 농기계 사고로 입원을 했을 때 , 둘째의 결혼식에도 이모부와 함께 와주었고, 이모부의 땅 한 귀퉁이를 얻어 텃밭으로 이용하며, 이모부가 그의 여자 친구와 갈등이 있을 때도 이모는 조언을 해주며 십 대에 친구로 만나 연인으로, 부부로, 이제 다시 친구로 지내고 있다. 그런 이모와 이모부를 우리는 아메리칸 스타일이라며 놀리듯이 이야기하곤 하는데, 아픈 과거를 가슴에 깊이 담아두지 않고 언제나 현재를 즐기는 이모는 여전히 아름답다. 그런 이모에게
“이모는 여전히 너무 이뻐요. 이제 연애 좀 하세요”
라고 이야길 하면 이모는
“지랄하고 자빠졌네. 니나 해라”
라며 당차게 대꾸하는 이모의 말에 나는 깔깔 웃게 된다. 내 웃음에 나와 같은 얼굴을 한 그녀도 함께 웃을 때 나는 더욱 희망에 차게 된다. 내가 닮은 여자들이, 나와 같은 얼굴의 여자들이, 그녀들의 인생에 찾아온 온갖 시련들을 혼자서도 용감하게 이겨내고 혼자라도 즐겁게 웃으며 지내는 여자들이라는 점이 비록 내가 큰 눈과 진한 쌍꺼풀, 오뚝한 콧대는 없지만 나 또한 그녀들처럼 용감하고, 당당한 여자로 살아가도 좋다는 표식처럼 느껴진다. 그녀들의 얼굴 생김뿐만 아니라 인생을 대하는 그녀들의 자세도 조금씩 닮아가야지. 그래서 나도 엄마처럼 새로운 것을 배우는 일에 거침없이 도전하며, 외할머니처럼 누군가에게 의지하기보단 나 자신을 의지하고 이모처럼 두려움에 잠식당하지 않고 그럴 때마다 용기를 내어 천천히 걸어가는 사람이 되어야지. 혹시 나중에 나에게 조카가 생겨 그 조카가 나에게 “이모는 여전히 아름다워요. 연애 좀 하세요”라고 하면 나도 “웃기고 있네, 너나 많이 해”라고 말하며 호탕하게 웃어넘기는 이모가 되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