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와의 첫 산책
나는 무남독녀, 금지옥엽 자란 외동딸로 28년째 부모님과 함께 살고 있다.
머리가 무럭무럭 자라 엄마아빠의 품이 작게 느껴지기 시작한 이래로, 나는 호시탐탐 "독립"을 할 타이밍을 찾았다. 하지만 대학생 때는 학교가 지하철로 20분 거리였고 지금은 자전거로 15분 컷을 할 수 있는 가까운 곳에 직장이 있다보니 여지껏 서울에서 독립할 그럴듯한 이유를 찾지 못했다.
해가 갈수록 '독립하고 싶다'는 마음이 간절한 순간이 잦아지는데, (예를 들면 주말 아침을 고요히 맞지 못하고 엄마의 잔소리와 함께 시작할 때, 기분좋게 회식하고 돌아왔는데 화난 아빠의 얼굴을 봐야할 때 등) 올 해를 맞아 독립 욕구가 가장 강렬히 들었던 날은 D를 처음 만난 날이었다.
D와 나는 틴더에서 만났다.
D의 프로필 사진들은 꽤 여러장이었는데, 댄디한 회사원 스타일, 레게머리(드레드록스), 뒤로 넘긴 긴머리까지 매 사진마다 스타일이 달랐다. '이 사람 특이한 사람이네' 라는 생각이 처음으로 들었고 '이 사람 나같이 고리타분한 사람은 따분해하겠는데' 라는 생각이 이어 들었다. 그래서인지 매칭이 될 거란 기대도 없었고 매칭이 되더라도 대화가 잘 되지 않을 거라 예상했다. 하지만 나의 예상과 달리, 우리는 매칭된 그 날 우리는 카톡으로 밤늦게까지 연락을 주고받았다.
대화를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아 나는 그도 한때는 우리동네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게되었다. 그가 졸업한 학교는 현재 내가 살고있는 곳에서 멀지 않았고 내가 아침 저녁으로 걷는 그 길과 지나치는 가게들을 그도 모두 알고 있었다. 우리는 성북구의 어디서에선가 스쳤어도 이상하지 않았을만큼 그는 한때 나와 매우 가까운 곳에 살고있었다. 그런 그와 동네에서 아끼는 공간들을 이야기하던 중, 그는 "만약 연락이 끊기더라도 오늘 언급된 장소들을 다 가보기 전까지는 연락을 끊지 않기!"라는 귀여운 제안을 던졌다. 이어 폴라로이드 카메라를 가져올테니 서로 사진을 한장씩 나누어 갖자고도 했다. 그렇게 우리는 그가 한때 살았고 내가 지금 살고있는 우리의 동네에서 토요일에 만나자는 약속을 잡았다.
D와 처음 만난 곳은 한성대입구역 앞. 우리는 토요일 아침 11시에 만나 한성대입구역 근처의 밥집에서 이른 점심을 하는 것으로 첫 만남을 시작했다. 정갈하게 차려진 보쌈정식을 앞에 놓고 시작된 대화는 성북동 언덕을 지나 혜화 로터리를 건너 낙산공원을 오르고 성북천을 따라 돈암동까지 이어졌다. 그 길에는 꿈, 사랑, 과거, 신념, 친구, 인간군상, 철학, 종교 등에 대한 이야기들이 따라왔다.
"마치 원래 알던 사람같았다." 라고 하기에는 그 와의 시간이 매우 새롭고 설렜지만 "마치 원래 알던 사람"을 만난 것 처럼 그가 편안했다. 그에게는 무슨 이야기를 해도 괜찮겠다는 마음이 들었는지 성북동의 어느 카페에서 나는 친한친구에게도 이야기한 적이 없는 나의 최악의 소개팅썰도 술술 풀었다. 소개팅 전날 동이 트도록 술을 마신 탓에 소개팅남과의 식사 중 속을 게워내느라 화장실을 수시로 들락거려야 했다는 내 얘기를 들으며 D는 크게 웃으며 "정말 최악이네요." 했다.
긴 산책과 대화 끝에 우리집 앞에 다다랐을 때, 우리는 마치 이미 한 계절을 같이 보낸 것 만큼이나 가까워졌다. 그래서인지 매일 아침저녁으로 지나치는 집 앞 놀이터 앞 벤치에 앉아 그의 얼굴을 보았을 때, 일주일 전까지는 알지도 못했던 그 얼굴이 마치 원래 옆에 있던 얼굴처럼 자연스레 느껴졌다.
어둠 속에서 반짝 반짝 빛나는 D의 눈을 보다 우리는 첫 키스를 했다.
D의 얼굴을 한 손으로 매무작거릴 때, 문득 나는 아직 독립을 하지 못한 것이 후회스러웠다.
그래서 그에게, 어플에서 만난 D에게, 옛날엔 가까운 곳에 살았지만 알지 못했던 그에게, 학창시절에는 꽤나 쎈척을 했던 그에게, 길상사에서 어느 나이든 커플에게 우리의 모습을 폴라로이드 사진기로 찍어달라고 부탁했던 그에게, 처음 만난 내게 오늘 통영에 가자며 손을 낚아채던 그에게, 거절하던 내게 "저도 생각해보니 통영 못가요."라며 삐쭉거리던 그에게, 따로 또 같이 멋진 연인의 모습을 동경하던 그에게,
나는 "독립하고 싶어요."라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