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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지 Jun 21. 2020

종로 5가, 소바를 앞에 두고 울었다

숙취와 수치의 날

소바를 앞에 두고 서럽게 우는 나의 머리를 토닥이며 "오늘 이야기를 브런치에 꼭 써줘요."라던 D에게 이 글을 바칩니다.




내가 소바 앞에서 운 것은 수요일이지만 사건은 화요일부터 시작됐다. 그니깐 내가 소바를 앞에 두고 울기까지는 꼬박 하루의 시간이 걸린 셈이었다.



화요일은 재택을 하는 날이었다. 나는 노트북과 전날 사둔 빵을 들고 그의 작업실로 출근했다. 빵과 커피 그리고 D까지 함께 하는 아침이라니... 이보다 좋을 수는 없다 생각했다. 하지만 그뿐이 아니었다. D와 나는 비정기적으로 북챌린지(책을 교환하고 정해진 기간 안에 읽으면 선물을 주는 우리만의 챌린지)를 하는데 마침 그날 아침 D는 지난 북챌린지를 성공적으로 마친 내게 줄 선물까지 준비해놨던 것이다. 선물은 무려 칼라스크린의 다마고치! 일전에 다마고치를 자전거 자물쇠 열쇠고리로 하면 간지 나겠다는 나의 말을 흘려듣지 않은 그가 야심 차게 준비한 것이었다. 다마고치를 켜고 알 속에서 나온 모쿠모쿠치를 보자 나의 기분은 이미 화요일 아침 댓바람부터 하이퍼를 찍었다.



때문에 일이 무척이나 잘되었다. 함께 각자의 일을 하고 또 틈이 날 때면 올여름에 함께 하기로 한 사이드 프로젝트의 계획도 세웠다. 아파트 비상구에 나가 바람을 쐬며 프로젝트의 첫 결과물이 나오면 경복궁 근처에 공동작업실을 얻자고 이야기할 때에는 저 멀리 보이는 인왕산 아래에 우리의 작업실과 작업실을 나서는 우리의 모습이 선명히 그려질 정도였다. 길에 버려진 쓸만한 가구들을 작업실에 놓아도 진짜 근사할 것 같지 않냐고 조잘거릴 때의 나의 기분은 최상 그 이상이었다.



일을 끝내고 D와 경복궁 근처에 가서 삼겹살을 먹었다. 쪽파무침이 맛있어 세 접시나 리필을 하는 우리를 나무라는 주인아주머니의 소리에도 나는 내내 즐거웠다. 소주 한 병과 삼겹살로 심지어 기분이 더 좋아진 나는 "맥주도 한 잔 마시고 가자."라며 그를 꼬드겼다. 매번 그렇듯이 한 잔은 두 잔이 되다 세 병이 되었고, 그리고 그 이후의 나의 기억은 끊겼으므로 그의 말을 빌리면 맥주 10병을 비우고 나서야 우리의 화요일이 끝났다고 한다.



다음날 알람 시간을 한참이나 넘기고 겨우 일어난 나는 D에게 간밤에 온 카톡을 확인하고 무언가 잘못됐구나 싶었다.



"J씨와 술 먹는 건 즐겁지만 이렇게 늦게까지 먹는 건 잘 모르겠어요."

"J씨 엄청 취해서 언브레이커블이었어요."



선명하게 기억나는 것은 10시 무렵 그의 앞에서 나의 친구와 통화하던 것. 이후 3차 자리로 옮기던 그 순간과 3차 자리에 찾아온 그의 친구를 맞은 것마저 기억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은 나는 무언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 무언가 잘못"했"음을 직감적으로 알았다.




수요일 하루를 온전히 숙취로 보내고 종로5가역에서 D를 만났다. 마침 한 달 전에 예매해둔 연극을 보기로 한 날이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이 와중에 연극이 눈에 들어올까 하는 착잡한 마음으로 D를 기다렸고 그런 나를 발견한 그는 나를 꼭 안아줬다. 그리고 속도 없이 "다마고치가 벌써 많이 자랐다", "저녁은 뭐 먹을까"하고 있는 내게 그는 손을 꼭 잡으며 "우리 어제 있었던 일에 대해서 오늘 꼭 이야기해요."라 했다.



우리는 극장 주변의 한 식당에 들어갔다. 자리에 앉아 D는 평상시의 어조보다 더 낮고 차분하게 그리고 천천히 지난밤의 일, 지난밤 나의 실수에 대해, 그리고 만취한 나로 인해 화가 났던 그의 감정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지난밤에 나는 1) 누나가 오늘 맥주도 사고 택시비도 내줄게!라고 큰소리치며 그를 늦게까지 붙들어 놓았으나, 2) 결국 술값도 택시비도 내놓지 않고 혼자 홀연히 사라졌으며, 3) 사라지기 전에는 처음 만난 그의 친구 앞에서 헛소리를 늘어놓고, 4) 3차로 간 LP바에서는 이문세의 노래를 신청하겠다며 냅킨에 이문ㅅ.. 까지만 적어놓고 떼를 썼다 한다.



D는 그토록 인사불성이 되어서도 집에 가지 말라며 생떼를 부리던 나를 겨우 택시에 밀어 넣고, 한참이 지나도 출발하지 않는 택시 문을 열어 우리 집 주소를 불러주고 나서야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했다. 아, 그의 집은 고양이기 때문에 술에 전 내가 집에 기어 들어와 옷을 집어던지듯 벗어놓고 침대에 몸을 누일 때 까지도 그는 도로 한복판을 달리고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한참 뒤에야 집에 도착한 D는 기분이 좋지 않았다 했다. 그는 "지난번에 다른 커플들이랑 술 하는 자리에서도 K 씨는 남자친구 집에 보내야한다고 먼저 일어나는데, J 씨는 아무 생각이 없는 것 같았어요. 술 먹으면 J 씨는 제 생각을 못하는 거 같아요. 혹시 비교하는 것처럼 들릴까 봐 그때 말 못 했는데 어제 일 있고 나서는 말해야 할 것 같다고 생각했어요. J씨는 말해주지 않으면 아무것도 모를 거 같더라구요."라 덧붙여 말했다.



그가 완전히 옳았다. D가 이야기하던 모든 것은 내가 생각해본 적도 없는 것들이었다. 서울에서 사는 나는 그가 밤늦게 어떻게, 어떤 길을 얼마나 달려서 집에 돌아가는지, 그 시간들이 얼마나 수고스러운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하지 않았다기보다는 전혀 알지 못했다.



난 미안하고 부끄러운 마음에 그의 얼굴을 보지 못하고 먹겠다고 주문한 내 앞에 놓인 소바만 들여다보았다. 미안해요. 몰랐어요. 라 말하는 나를 보고 그는 어서 밥을 먹자 했다. 어렵게 소바를 한 젓가락 집어 들었는데, 그가 "화가 난 와중에 J씨가 놓고 간 편지 읽었는데 글은 또 엄청 잘 썼더라구요." 했다. 맞다. 내 기분이 매우 좋았던 화요일. 나는 D의 집을 떠나며 D 몰래 그의 침대 위에 러브레터를 남겨두고 왔다. 그리고 그 러브레터에 나는 그를 만나고 처음으로 그에게 "사랑한다."고 적었었다. 그를 만난 지 3개월 만에 처음으로 조심스럽게 내가 그를 사랑하고 있음을 고백하는 글이었다.



숙취가 물러간 자리에 수치가 밀려들어왔다. 그에게 사랑한다 말하는 것조차 조심스러워 수십 번이나 고쳐 쓴 편지를 수줍게 두고 온 그 날. 그가 나의 사랑을 알아주기를 바랐던 그 날. 그 같은 날 밤에 나는 만취하여 그의 마음에 생채기를 내었던 것이다. 이내 그것을 깨달은 나는 엉엉 울기 시작했다. 한 손에는 수저를 들고 다른 한 손에는 집어 올리다 만 소바가 감긴 젓가락을 쥐고.



반나절만에 겨우내 나의 바보 같음을 깨닫고 서럽게 통곡하고 있는 나를 보며 D는 웃었다.

"브리짓 존스의 일기에 나오는 주인공 같아요. 그 영화에 나올 법한 장면이에요." 그리고 그는 오늘의 일을 브런치에 꼭 써달라고 했다.



D와의 약속을 지키고자 그 날의 일에 대해 쓰다 D에게 물었다. 그 날 우는 나의 모습이 그렇게나 서럽게 보였냐고. 그는 내가 마치 하루 종일 열심히 감자를 캤는데 그 감자를 다 잃어버린 산골소녀 같았다 했다. 나는 내가 로맨틱 코미디 영화의 발랄한 여주인공처럼 귀엽게 보이는 줄로만 알았지.




그래서 이건 내가 그에게 처음으로 사랑한다 고백한 날, 소바를 앞에 두고 숙취와 수치를 느끼며, 모아둔 감자를 다 잃어버린 산골소녀처럼 엉엉 울었던 날의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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