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NA 메틸화와의 연관성
위암 연구에서 가장 뜨거운 주제 중 하나인 '헬리코박터 파일로리(H. pylori)와 후성유전학(Epigenetics)'의 관계를 깊이 있게 다뤄보려 합니다.
우리는 흔히 헬리코박터균이 위염이나 위궤양을 일으킨다고 알고 있지만, 이 균이 실제로 어떻게 암을 유발하는지에 대한 분자생물학적 기전은 훨씬 더 복잡하고 정교합니다. 최근 연구들은 그 핵심 열쇠로 'DNA 메틸화(DNA Methylation)'를 지목하고 있습니다.
오늘 포스팅에서는 최신 리뷰 논문 "Performance of DNA Methylation on the Molecular Pathogenesis of Helicobacter pylori in Gastric Cancer"를 바탕으로, 헬리코박터균이 우리 유전자의 스위치를 어떻게 조작하여 암을 만드는지 전문적인 내용을 알기 쉽게 정리해 드립니다.
세계보건기구(WHO)가 지정한 1군 발암 물질인 헬리코박터 파일로리는 위암 발생의 가장 강력한 원인 중 하나입니다. 이 균에 감염되면 만성 위염이 발생하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위축성 위염 → 장상피화생 → 이형성증을 거쳐 결국 위선암(Adenocarcinoma)으로 진행되는 일련의 과정을 겪게 됩니다.
하지만 모든 감염자가 암에 걸리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어떤 기전이 암 발생을 결정짓는 것일까요?
헬리코박터균은 위 점막에서 살아남기 위해 강력한 무기(병원성 인자)들을 사용합니다.
CagA (Cytotoxin-associated gene A): 일명 '발암 단백질'로 불립니다. 균은 제4형 분비 시스템이라는 주사기 같은 구조를 통해 숙주 세포 안으로 CagA를 직접 주입합니다. 세포 내로 들어온 CagA는 세포 증식을 과도하게 촉진하고 세포 간 결합을 파괴하여 암 발생 위험을 50~70%까지 높입니다.
VacA (Vacuolating cytotoxin A): 세포막에 구멍을 뚫어 세포 내에 공포(vacuole, 물주머니)를 만들고, 결국 세포 사멸(apoptosis)을 유도합니다.
OipA & LPS: 강력한 염증 반응을 유도하여 인터루킨-8(IL-8)과 같은 염증성 사이토카인을 쏟아내게 만듭니다.
이 글의 핵심이자 헬리코박터균의 가장 치명적인 공격 방식은 바로 '후성유전학적 변형'입니다. 헬리코박터균은 유전자의 염기서열 자체를 바꾸기보다는, 유전자의 스위치를 꺼버리는 방식으로 암을 유발합니다.
유전자의 시작 부위인 프로모터(Promoter)에 존재하는 CpG 섬(CpG island)에 메틸기(-CH3)가 달라붙는 현상입니다. 이렇게 과메틸화(Hypermethylation)가 일어나면 전사 인자가 결합하지 못해 해당 유전자의 발현이 억제(Silencing)됩니다.
문제는 헬리코박터균이 우리 몸의 '종양 억제 유전자(Tumor Suppressor Genes)'들을 타겟으로 삼는다는 점입니다.
RUNX3, CDH1, LOX 등 암세포의 발생을 막아주는 유전자들이 메틸화되어 기능을 상실합니다.
즉, 암이라는 자동차가 달리지 못하게 막아주던 '브레이크'를 고장 내는 것과 같습니다.
헬리코박터균이 직접 메틸기를 붙이는 것은 아닙니다. '염증(Inflammation)'이 매개체입니다.
헬리코박터 감염은 위 점막에 만성적인 염증을 일으킵니다.
이때 대식세포 등에서 산화질소(Nitric Oxide, NO)가 생성되는데, 이 NO가 상피세포 내의 DNA 메틸화 효소(DNMT)를 활성화하거나 직접 작용하여 RUNX3와 같은 유전자의 과메틸화를 유도합니다.
위의 그림은 헬리코박터 파일로리 감염 여부와 DNA 메틸화(유전자 스위치 꺼짐), 그리고 위암 발생 사이의 관계를 한눈에 보여줍니다.
이 그림을 이해하는 핵심 포인트는 위장 옆에 있는 '막대그래프(DNA 메틸화 수치)'를 보는 것입니다.
1. 왼쪽 경로: 건강한 상태 (Noninfected / Past infection)
상태: 헬리코박터균에 감염되지 않았거나, 감염되었더라도 과거에 치료된 상태입니다.
특징: 위장 옆의 막대그래프가 비어있거나 낮습니다. 이는 암을 억제하는 유전자들이 정상적으로 작동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위암 발생 위험이 낮습니다.
2. 가운데 및 오른쪽 경로: 위험한 상태 (Currently infected)
만성 염증과 메틸화 축적: 헬리코박터균에 현재 감염되어 있으면 만성 염증이 지속됩니다. 이때 막대그래프가 검게 꽉 차오르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염증으로 인해 DNA 과메틸화(Hypermethylation)가 진행되어, 암 억제 유전자의 기능이 마비되는 것입니다.
위암 발생: 이렇게 축적된 메틸화는 결국 위암(Gastric cancer)을 유발합니다.
3. 왜 수술 후에도 암이 또 생길까? (Metachronous Gastric Cancer)
이시성 위암의 위험: 그림의 아랫부분을 주목해 주세요. 내시경 시술(Endoscopic therapy)로 눈에 보이는 암덩어리를 제거했습니다. 하지만 막대그래프(메틸화 수치)는 여전히 높게 유지되고 있습니다.
후성유전학적 필드 결함 (Epigenetic Field Defect): 암은 제거했지만, 위 점막 전체(밭)는 이미 메틸화로 인해 병들어 있는 상태입니다. 따라서 치료 후에도 '이시성 위암(Metachronous gastric cancer, 시간차를 두고 다른 부위에 또 생기는 암)'이 발생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 그림은 단순히 눈에 보이는 암만 제거하는 것이 끝이 아님을 시사합니다. 위암의 재발을 막기 위해서는 근본 원인인 헬리코박터균을 제균하고, 높은 상태로 유지되는 DNA 메틸화 수치를 관리하는 것이 필수적입니다.
이러한 후성유전학적 기전을 이해하는 것은 임상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조기 진단 바이오마커 (Biomarker): 내시경으로 종양이 보이기 전, 위세척액이나 혈액에서 특정 유전자(BARHL2, ZNF610 등)의 메틸화 여부를 검사하면 위암 발생 위험을 조기에 예측할 수 있습니다.
가역성 (Reversibility): 유전자 돌연변이(Mutation)는 되돌릴 수 없지만, DNA 메틸화는 약물 등을 통해 이론적으로 되돌릴 수 있습니다(Reversible). 이는 헬리코박터 제균 치료 후에도 남아있는 암 위험을 관리하거나, 새로운 표적 치료제를 개발하는 데 중요한 단서가 됩니다.
헬리코박터 파일로리는 단순히 위 점막을 상하게 하는 균이 아닙니다. 이들은 우리 세포의 유전자 조절 시스템을 교란하여 암이 발생하기 쉬운 환경을 만드는 치밀한 전략가입니다.
특히 종양 억제 유전자의 DNA 메틸화는 위암 발생의 핵심 연결고리입니다. 정기적인 위내시경과 헬리코박터균 감염 여부 확인, 그리고 적절한 제균 치료는 이러한 후성유전학적 변형이 축적되는 것을 막는 가장 확실한 예방법입니다.
앞으로 DNA 메틸화 연구가 더욱 발전하여, 위암을 더 빨리 찾아내고 근본적으로 치료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기대합니다.
References:
Vahidi S, et al. Performance of DNA Methylation on the Molecular Pathogenesis of Helicobacter pylori in Gastric Cancer; targeted therapy approach. Journal of Pharmacopuncture. 2022;25(2):88-1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