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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근 Jun 18. 2022

삶의 육하원칙

‘시골에 살고 농사를 짓는다’라는 문장이 설명하지 못하는 것에 대하여



시골에 산다는 사실, 더 나아가 농사를 짓는다는 사실이 그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 얼마나 말해줄 수 있을까? 어쩌면 아무것도 설명하지 못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조금은 절망스러운 마음이 든 참이다. 시골 사람들이라고 모두가 넉넉한 마음으로 소박한 삶을 산다거나, 농사를 짓는다고 모두 생태적 감수성을 토대로 삶을 살아가는 건 아닐 것이다. 알고 있다. 그럼에도 일말의 기대는 버리지 못하고 있었던 것인지 어떤 이를 볼 때마다 굳이, 여기서, 고작 이렇게밖에 못 사는 걸까?라는 의문이 쉬이 사라지지 않는다.​


자꾸 마주치게 되는 반면교사 두 분 이야기다. 두 분은 만날 때마다 내가 품은 일말의 기대는 무너뜨리시고, 기대하지도 않았던 모습을 보여주신다. 산골짝에서도 어떻게 하면 돈이 생길까에 골몰해 있는 나머지 자신이 다른 사람들에게 어떻게 보이는지도 모르는, 부끄러움을 잃어버린 사람들. 땅이 땅이 아니라 그저 돈으로 보이는 사람들. 우리가 정면교사로 삼고 있는 선생님은 그런 사람들이 땅을 쳐다만 봐도 오염이 되는 것 같다고 하셨더랬지.​​


가까이에 자연을 두고도, 농사를 지으면서도 언제나 눈은 저기 저 아파트 가격과 주식 그래프에 머물러 있다. 그네들에게 창밖의 자연은 집값을 조금이라도 높일 수 있는 ‘뷰’일 뿐이고, 농사는 그저 생활비를 줄이기 위한 고육지책일 뿐인 것이다. 최소한의 시간과 힘을 들여야 하기에 거리낌 없이 약과 비닐을 친다.

뜬금없이 육하원칙이 떠오른다.​


‘누가, 언제, 어디서, 어떻게, 왜’​


가만 보니 빈칸이 여섯 개나 되는데, 고작 두 가지만 가지고 삶을 설명하거나 짐작하려 들었구나 싶다. 그렇다면 어디에서 무엇을 하며 사는가는 정말 무엇도 설명하지 못할 수도 있겠다. 가장 처음에 오는 ‘누가’ 어떤 사람인가에 따라 ‘어떻게’와 ‘왜’에 수도 없이 다른 답이 채워질 수 있을 테니 말이다.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보이는 ‘언제’도 사실 ‘누가’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 현재를 기후위기 시대로 인식하고 살아가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삶과 선택은 무척이나 다를 것이므로.​


‘시골에 산다’, ‘농사를 짓는다’는 사실만으로 누군가에게 어떤 삶의 모습을 쉽게 기대했던 만큼, 내 삶 역시 이 두 가지만으로 충분히 설명될 수 있으며, 할 일을 다했다고 생각했던 것을 고백하며 반성한다. 덕분에 아직도 풍성하게 채워 넣어야 할 빈칸이 남아있다는 걸 발견하게 되었다. 사실은 ‘어디서’, ‘무엇을’ 하는가를 채워 넣고는 만족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엄청난 변화였다고 자족하면서 말이다.

나의 이야기는 끝나기는커녕 어쩌면 이제야 제자리를 찾아 시작되는 걸지도 모르겠다. 나의 ‘언제’를 크고 두렵게 채우고 있는 기후위기라는 시간 속에서, 어떤 사람이 되어, 어떤 농사를 짓고, 어떤 관계를 맺고 살아갈지, 도대체 왜 그렇게 살아야만 하는지- 길게 남은 삶 속에서 무수히 썼다 지웠다를 반복하며 이어질 것이다.

갈피를 잡지 못할 때면 잘못된 길이 어디인지 알려줄 반면교사가 이렇게나 가까이에 있다니, 이것 참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를 일. 반면교사는 두 명으로 충분하니 앞으로는 정면교사를 더더욱 많이 만나고 싶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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