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아래꽃]다시 마주한 태양

12화. 지켜야 할 이유가 되어버린 너

by 주미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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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항상 마주하는 시장은 늘 활기가 넘쳤다.


오늘의 푸른 하늘은 몇 점의 구름이 떠 있고, 해는 높게 떠 있어 햇빛이 밝게 쏟아졌다.


길 양옆으로는 낮은 기와지붕과 초가가 어우러진 상점들이 다닥다닥 이어져 있으며, 그 속 상인들은 바삐 물건을 진열하거나 천막을 고쳐 세우며 분주히 움직였다.


언제나처럼 장사치들의 외침 소리가 곳곳에서 터져 나와 그곳만에 시끌벅적한 활기를 더했다.

짚으로 엮은 차양이 드리운 가게 아래서는 천과 도자기, 먹거리들이 진열되어 있고, 길을 오가는 이들 역시 그 사이를 누비며 흥정하는 소리로 공간을 채웠다.


하화는 여러 가지 물건들을 구경하며 사람들 사이를 지나갔다.


그 순간, 멀리서 익숙한 그림자가 하화의 시야에 들어왔다.

낡고 지저분한 옷차림에 칼과 도끼를 허리춤에 대충 걸친 그놈들...

하화는 순간 멈칫하며 발걸음을 멈추었다.


마치 짐승이 먹잇감을 노리는 듯한 그들의 날카로운 눈빛이 하화를 포착했고, 이내 비열한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그녀 쪽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멀리서 다가오는 무뢰배들은 서로 키득거리며 저속하게 농을 주고받았다.


"야, 봐라. 저거 그때 그 계집 아니냐?"


"어이구, 오늘은 서방놈도 없이 혼자 돌아다니네? 하ㅋㅋ 딱 걸렸다. 근데 계집이 이쁘장하게 생기긴 했구만ㅋㅋㅋ"


그들은 거칠고 느긋한 걸음으로 하화를 향해 다가왔다.

하화는 당황했지만 침착하게 대답했다.


"지나가는 길입니다. 길을 비켜주세요."


그녀는 조심히 옆으로 빠져나가려 했지만, 무뢰배들은 비웃듯 길을 막고 하화의 어깨를 손가락으로 툭툭 치기 시작했다.


주위 상인들과 행인들은 분위기를 감지하고 하나둘씩 슬금슬금 물러났다.

시장에 퍼져 있던 흥겨운 소리도 점차 가라앉으며, 공기는 빠르게 험악한 긴장으로 얼어붙었다.


"우리~ 간만이지? 그때 아주 화끈했는데~ 오늘은 혼자 돌아다니네? 까불거리던 서방놈은 어디 갔어?"


능글맞게 어깨를 으쓱이며 하화 쪽으로 다가오는 한 놈, 그리고 그 뒤를 따라 키득거리며 포위하듯 다가오는 무리들의 모습에 주변 공기가 점점 음산해졌다.


"우리가 왜 비켜줘야하지? 서방놈도 없는데~ 오늘은 딱 좋은 날 아냐? 우리랑 끈저~~억하게 놀아보는 건 어때?"


"그.. 그게 무슨..."


그때,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

짙은 그림자처럼 뻗어오는 기운 속에서 한 사내가 조용히 하화의 앞에 섰다.


강렬한 태양빛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선 사내는, 빛에 가려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넓은 어깨와 묵직한 기운은 그녀 앞에 그림자처럼 드리워졌고, 모든 것을 조용히 감싸듯 주변 공기를 단숨에 바꿔놓았다.


마치 세상이 잠시 숨을 죽인 듯, 하화도 순간적으로 몸을 굳혔다.

사내는 아무 말 없이 그녀 앞으로 나서더니, 낮고 단단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만두어라."


무뢰배들은 갑작스런 사내의 등장에 흠칫 놀라며 고개를 올렸다.

거센 햇살을 마주하며 선 사내의 실루엣 속, 그림자에 서게된 그녀는 자연스레 눈 앞이 가려졌다.

천천히 그가 한 걸음 더 내딛자, 무뢰배들의 기세는 눈에 띄게 꺾여들어갔다.


"아씨.. 난 또 저번 그놈인줄 알았네!! 네놈은 또 뭐야?!"


능글맞고 재수 없는 웃음을 흘리던 무뢰배 하나가 사내를 노려보며 비아냥거렸다.


"허, 잘못 끼어든 거면 얼른 꺼져! 꼴에 사내라고 꼴값 떨다 개망신 당한다!!! 그리고 너~ 생각보다 사내가 많은 계집이었구만?"


그 말이 우스웠는지 다른 놈하나가 키득거리며 하화를 능욕하듯 내뱉었다.


"양반 나으리도~ 좋은 구경하고 싶어서 그러하오? 원하시면 같이 껴줄수도 있는데..."


사내는 살짝 코웃음을 치며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이내 표정이 굳어지며, 하화의 어깨를 손가락으로 툭툭 치던 놈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너"


그의 시선은 짙고 서늘했고, 주위의 공기마저 단숨에 얼어붙게 만들었다.


"함부로 놀려대던 그 손가락부터 없애는 것이 좋겠구나."


짧지만 묵직한 그 한마디가 허공을 가르며, 주변에 냉랭한 긴장감을 퍼뜨렸다.

하화는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심장이 서늘하게 떨렸다.


'설마...'


하화는 본능으로 알았다.


'이 목소리...'


가슴이 격렬히 요동쳤다.

조심스레 고개를 든 그녀의 눈동자 속에, 서서히 그의 형상이 또렷해졌다.


이성이 머뭇거렸으나, 본능은 이미 그 태양을 알아보았다.


하지만 여전히 아무것도 모르는 저 놈들은 상황 파악도 못한 채 사내의 목 주변을 도끼로 휙휙 휘두르며 깔깔거렸다.


"뭐야, 이 새끼는? 어디서 주제도 모르고 끼어들어?!"


능글맞게 웃던 놈 하나가 침을 튀기며 하화를 손짓해 불렀다.


"야, 이년아! 얼쩡거리지 말고 기어오라고! 네년 땜에 애먼 놈까지 골로 가게 생겼잖아? 얼른 이리오지못해!! 썅년아!"


그 상스러운 고함에 시장 한구석의 소란이 멎고, 주변은 서서히 숨을 죽였다.


하화는 본능적으로 몸을 움츠렸다.


그 순간, 사내가 천천히 팔을 들어 넓은 소매로 하화를 감싸듯 가렸다.

그녀를 보는 무뢰배들의 시선을 단호히 차단하려는 듯, 조용하지만 명확한 움직임이었다.

그 짧은 찰나, 사내의 얼굴에는 굳은 기운이 스쳤다.


평소의 침착함을 간직한 그의 눈빛이 순간 싸늘하게 식으며, 속에 숨겨둔 분노가 미세하게 번져 나왔다.

사내의 소매로 하화는 더 이상 무뢰배들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하화의 시야가 가려진 사이, 무뢰배 놈들은 지들끼리 낄낄거리며 속닥였다.


"이 새끼 봐라?"


"우리는 양반나으리라도 봐주는 거 없어, 알겠어? 우린 법도 없고 체면도 없거든."


그들의 비열한 웃음이 오히려 더 험악한 긴장을 부추겼다.


"그럼 얼마나 법도 없고 체면도 없는지 볼까."


사내의 말에 결국 한 놈이 허리춤에서 작은 칼을 하나 꺼내 이를 악물고,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사내를 향해 돌진했다.


그 순간, 사내의 눈빛이 달라졌다.

마치 모든 것을 삼켜버린 듯 깊고 냉혹하게 가라앉은 눈이었다.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것만 같은 짧은 정적이 느껴지던 찰나, 어디선가 또 다른 사내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순식간에 다가온 그는, 망설임 없이 칼을 든 무뢰배의 목덜미 가까이에 날카롭고 긴 칼끝을 겨누었다.


"멈추어라. 그리고 조용히 그 것을 거두는 것이 좋을 것이다."


또다른 차갑고 낮은 목소리가 바람을 타고 울렸다.

무뢰배는 목덜미에 닿은 날카로운 칼끝에 순간 온몸이 얼어붙은 듯 굳었다.

숨을 삼키는 소리가 거칠게 터졌고, 그의 손은 눈에 띄게 떨렸다.


"네... 네놈...은 뭐야...!"


필사적으로 소리쳐보려 했지만, 목구멍에서는 갈라진 소리만이 터져 나왔다.


또 다른 사내의 칼끝이 살짝 목으로 더 파고들었고, 그 순간 놈이 가까스로 쥐고 있던 칼이 ‘툭’ 소리를 내며 그의 손에서 바닥으로 떨어졌다.


"감히 폐하께 칼을 드는 것은 역모다. 그러니 당장 머리를 조아리거라."


무뢰배는 두 눈을 크게 뜬 채, 갈피를 잡지 못한 채 뒷걸음을 쳤다.

칼끝이 다시 따라붙어 목덜미를 겨누자, 놈은 움찔거리며 비틀거렸다.


"폐하라니? 거... 거짓말...! 황제가 왜... 여기...!"


식은땀이 이마를 타고 흘러내렸다.

그때, 하화 앞에 서있던 사내가 천천히 몸을 낮추며 놈들을 내려다보았다.


"네놈들은 내가 황제인지 아닌지가 알고 싶은 게로구나."


그리곤 살짝 고개를 들며 읇조리듯 말했다.


"운주."


낮고 단단한 목소리가 허공을 가르자, 곁에 있던 남자가 즉각 고개를 끄덕이며 칼의 날을 세웠다.


"예, 폐하."


칼끝이 다시 번뜩였다.

겁에 질린 무뢰배들은 참지 못하고, 하나둘 땅바닥에 머리를 처박았다.


"폐, 폐하! 제발... 제발 한 번만 살려주십시오! 저희가, 저희가 폐하를 몰라뵈었습니다! 죽을죄를 지었사옵니다! 부디... 한 번만, 한 번만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공포에 찬 비명과 울음이 시장 바닥을 울렸다.


하화는 여전히 몸을 움츠린 채, 미세하게 떨고 있었다.

하지만 옅은 떨림도 잠시.. 점점 심장이 조여오는 듯 숨을 쉬는 것조차 어려지기 시작했다.


머릿속엔 아까 놈들이 내뱉은 거칠고 조롱 섞인 말들이 생생히 맴돌았다.


처음 이 세계에 떨어져 무력하게 끌려갔던 기억이 가슴속 깊은 곳을 할퀴며 되살아났다.

황제가 앞에 있다는 사실조차 잊은 채, 하화는 자신도 모르게 몸이 더 세차게 떨기 시작했다.


그녀의 떨림이 곁에 서 있던 사내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졌다.

그녀를 가리던 소매 너머로 스치는 그의 눈빛은 깊게 가라앉은 분노로 변해갔다.


그리곤 숨소리조차 묵직하고 느리게 가라앉았다.

결국 억눌러왔던 감정이 서서히 균열을 내기 시작했다.


그 순간, 바닥에 나뒹구는 칼과 도끼가 그의 시야에 스쳤다.


령황제의 눈빛에 짙은 살기가 서렸다.

그는 천천히 몸을 숙여 칼을 집어 들었다.


칼자루를 쥔 손가락에 힘이 들어가고, 검붉은 감정이 그의 몸을 타고 번져나갔다.


이윽고, 아까 하화를 모욕했던 그놈의 멱살을 거칠게 움켜쥐었다.

끌어당기는 손끝에는 억눌린 분노가, 마치 짙은 서릿발처럼 서려 있었다.

숨소리는 점점 더 무거워졌고, 주위의 공기마저 숨 막힐 듯 얼어붙었다.


“감히... 이따위 것으로...”


령황제의 목소리는 낮고도 깊게 울렸다.

억누르려 해도 억누를 수 없는 분노가 그의 전신을 타고 퍼져나갔고, 그 분노는 놈들을 바라보는 시선 하나하나에 스며들었다.


그는 이윽고 멱살을 움켜쥔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운주!”


단 한 마디, 그러나 마치 천둥이 울리는 듯한 무게를 지닌 목소리가 퍼져나갔다.


“예, 폐하.”


운주가 차분히 대답했다.

령황제는 숨을 깊게 들이쉰 뒤, 날카롭게 내뱉었다.


“이들을 끌고 가라. 그리고 저놈은 손가락부터 없애버리거라. 또한 오늘 일은 역모로 조사해야 할 것이다.”


그 순간, 주변의 공기마저 진동했고, 무뢰배들은 벌벌 떨며 머리에서 피가 흐르는 것도 잊을 정도로 바닥에 머리를 박아댔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는 냉혹했고, 주저함이라곤 눈곱만큼도 없어 보였다.


그 순간, 하화가 떨리는 손끝으로 조심스럽게 령황제의 옷깃을 잡았다.

금세 눈가에 맺힌 눈물이 반짝였고, 떨리는 숨결 사이로 간절히 속삭였다.


“폐하... 부디 그만 멈춰주세요... 저는 정말 괜찮습니다.”


하화의 모습을 본 령황제는 손에 힘이 더 들어가며 분노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


"지금 그리도 떨고 있으면서 멈추라는 소리를 합니까! 제가 여길 지나가지 않았더라면!!"


그러나 하화는 다시 고개를 숙이며 조용히 말했다.


"이들도 폐하를 뵈었으니 더 이상 제게 다가오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 제발..."


령황제는 하화를 바라보며 잠시 숨을 고르듯 멈췄다.


그의 눈에는 여전히 분노가 가득했지만, 그녀의 눈에 맺힌 눈물이 그의 손을 천천히 풀게했다.


그리고 깊은 숨을 삼킨 뒤, 조심스럽게 하화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리곤 떨고 있는 하화의 손목을 잡아 조심스럽게 자신의 등 뒤로 당기며 그녀를 자신의 품 안으로 끌어안았다.


넓고 따뜻한 가슴에 하화를 깊숙이 품어 안으며, 마치 세상의 모든 위협으로부터 그녀를 감싸려는 듯 더욱 부드럽고도 단단하게 그녀를 안았다.

그의 강한 팔이 하화를 조심스럽게 감싸며, 그녀의 떨림을 고스란히 품 안에 안았다.


예상치 못한 그의 품에 안긴 하화는 순간 놀라 두 눈을 크게 떴지만, 이내 그 따뜻하고 단단한 온기에 안도하며 천천히 몸의 긴장이 풀려갔다.


"오늘 이 여인이 너희를 살린 것이다. 다시 이런 일이 생긴다면 용서는 없다."


"예!! 알겠습니다!!"


"운주는 이곳을 정리하고 따라오라."


"예. 폐하."


령황제는 하화의 어깨를 살포시 감싸 안은 채, 그녀를 조심스럽게 이끌어 사람들이 없는 후미진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의 손길에는 하화가 더 이상 놈들의 얼굴을 마주하지 않기를 바라는, 조심스러운 마음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점차 두 사람의 발걸음이 그들에게서 멀어질수록, 소란스러웠던 시장의 소음 또한 점점 멀어졌다.

푸른 색이었던 하늘은 어느새 붉게 물들어 있었고, 여러색으로 빛을 내는 노을 빛 아래 두 사람의 그림자가 길어졌다.

수, 금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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