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리틀 포레스트> 를 보고 나서.
대학 막학기, 휩쓸리듯 취준을 하며 매일매일 자소서를 던져 넣고 있던 저는, 어렴풋이 이제부터 세상은 많이 달라질 것이라고 느끼고 있었습니다.
좋은 학벌, 좋은 성적, 열정적인 대외활동이라는 명확한 목표와 가이드라인을 따라 왔던 지난 수 년간과는 달리, 이젠 저에게 맞는 삶을 스스로 생각하고, 찾고, 결정하고, 설계해가는 때가 왔다는 걸 알았죠.
사실 그건 훨씬 전부터 해야 했던 일이지만, 전 대학졸업이라는 관문 앞에 떠밀려서야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제가 찾은 제가 원하는 인생의 모습은 간단했습니다.
음미하는 삶
이제 시작을 울리는 탕 소리에, 그저 뒤쳐질까 무서워 내가 왜 달리는가에 대한 의문 없이, 미친 듯이 달려나가는 경주마처럼 사는 것은 충분했습니다.
저는 제가 왜 여기에 있으며, 왜 달리는지, 스스로 이해하고 납득하고 싶었고, 주변에 꽃과 산도 보고, 옆에 있는 다른 말도 관찰하다가, 뛰고 싶을 땐 뛰고 그렇지 않을 때는 제 페이스로 걷고 싶었고, 그렇게 살 때에야 진정한 제 삶을 사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하여, 오늘 나의 하루를 채운 수많은 순간들을, 목적지에 도달하기까지의 사소한 눈금들로 격하시켜 버리지 않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이를 위해서 필요한 자세는 바로 "음미" 였습니다.
어떤 사소한 순간이든, 우리가 정신을 집중하고 그 순간의 우연성과 아름다움을 감상하고 즐기고 가슴에 새긴다면, 그 순간이 있던 오늘 하루, 나아가 제 삶은 제가 충분히 소화한 제 삶인 거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다만, 잘난듯이 음미음미거렸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식으로 오늘 하루를 음미할 것인가, 까지는 사실 깊게 생각이 미치지 않아 어려웠습니다.
영화 <리틀 포레스트>를 보고, 그 답을 찾았답니다.
먼저 영화 줄거리에 대해 간략히 말하려고 하는데요, 오늘은 따로 "밑에 스포일러 주의" 라고 미리 경고드릴 필요가 없을 듯 합니다.
왜냐면 스포일러라고 할만큼 흥을 spoil 할 사건이 일어나지 않거든요.
주인공 혜원 (김태리 님 역)은, 도시에서 편의점 아르바이트 생활을 하며 임용고시를 준비하다, 거듭되는 탈락에 지쳐 고향 시골마을로 돌아옵니다. 그녀가 어린시절을 보낸 시골집에는 어린 시절부터의 죽마고우들과 함께 흙냄새가 가득합니다.
왜 돌아왔느냐는 친구의 말에, 혜원은 짧게 한 마디 합니다. "배고파서."
그 말에 부응하기 위해, 혜원은 영화 내내 열심히 먹방을 찍습니다.
사계절 내내 밭을 갈고, 양파를 뽑고, 곶감을 말리며 열심히 먹방을 찍습니다.
이 외에 가출한 어머니라는 미스테리어스한 설정과, 죽마고우들 간의 나름의 귀여운 에피소드들이 있지만, 그래도 그 외엔 시종일관 먹방을 찍습니다.
어찌나 맛있게 잘 해먹는지, 엄마미소를 짓다가 저도 배고파졌습니다.
그런데 사실 이 영화의 핵심이 먹방입니다.
누군가 혜원이에게 하루 종일 뭐하냐고 묻는다면, 그녀는 단언코 "먹는다" 고 대답할 것입니다.
이 말엔 삼시 세끼를 차려 먹어본 사람이라면 크게 공감할 수 있는 게, '아침 차렸더니 벌써 점심이고, 점심 차렸더니 벌써 저녁이고, 저녁 차렸더니 잘 시간이더라' 라는 말처럼, 매 끼니마다 무엇을 먹을지 고민하고 요리를 하고 그 뒷정리를 하는 일은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걸리거든요.
더군다나 이미 모든 재료가 조달되고 가공되어 제공되는 도시의 판매용 음식들과 달리, 시골에서 혜원은 모든 재료들을 직접 기르고, 가꿔서 다듬고 조리해서 먹어야 하기 때문에 한 끼를 때운다는 건 큰 정성이 들어가는 일입니다.
하지만 이 일을 통해서 혜원은 점차 생기를 찾게 됩니다.
누군가에겐 '할 일도 많아 힘든데, 한 끼 한 끼 챙기려니 귀찮고 죽을판' 일수도 있는데, 왜 혜원은 이를 통해 치유받고, 새로운 삶을 다짐할 수 있을까요?
그 이유는 비로소 그녀가 삶을 음미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도시에서 매일매일 학원과 집을 오가길 반복하며, 혜원은 삶을 음미할 수 없었습니다.
당장 내가 있는 지금 이 순간을 충분히 음미하다가는, 그녀와 같은 합격이라는 목표를 향해 미친듯이 달려나가는 다른 수많은 경쟁자들에게 뒤쳐져 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그녀의 하루는 목적과 크게 상관이 없는 일과는 최대한 축소하고, 목표를 위한 과정은 최대한 효율적으로 마쳐야만 하는, 효율성에 의해 달려가는 하루였지요.
한국에서 고등학교를 나온 제겐 아득하지만 익숙한 하루네요.
비극적인 것은, 이 모든 과정에 그녀 자신의 의지가 들어가는 순간은 매우 적다는 점입니다.
분명 시험을 보고 합격을 목표로 하는 건 혜원 자신의 결정이지만, 이를 위한 하루하루의 일정에서 혜원 본인의 판단과 취향이 반영되기란 극히 어렵습니다.
이미 정해져 있는 수험과목을 정해진 시간 내에 보기 위해 학원에서 잡아 주는 매뉴얼로 공부해야 하며, 오늘 무엇을 먹을지도 당장 공부할 시간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편의점 도시락으로 허겁지겁 때웁니다. 돈이 필요하기에 진상 손님들도 참아 가며 꾸역꾸역 알바를 해나가던 혜원은 점점 자존감이 떨어지는 것을 느끼고, 합격한 남자친구의 전화도 피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녀가 쉬기 위해 잠시 들르는 거라고 생각하고 내려온 농촌 고향집에서, 그녀는 하루하루 본인이 직접 뿌리고 기르고 다듬은 식재료들을 정성스럽게 조리해 한 끼 한 끼, 한 순간 한 순간을 제대로 음미하고 소화시키며, 본인의 하루에 100% 관여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그리고 혜원이 심고 기르고 정성을 쏟은 먹거리처럼, 혜원 자신도 점점 다시 차오르고 힘을 얻습니다.
사계절의 변화가 낭만적으로 펼쳐지는 시골 풍경 속, 혜원의 소박하지만, 삶을 꽉꽉 음미하는 하루는 영화를 보던 시청자들의 마음도 꽉 채운듯 합니다.
영화가 끝나고 나가는 사람들의 얼굴에 하나같이 미소가 어려 있었는데, 굉장히 신기한 경험이었어요.
그리고 저는 아까 말한대로, 저만의 삶을 음미하는 법에 대한 작은 실마리를 하나 얻었답니다.
혜원처럼 귀농을 갑자기 결심하고 시골집에 내려가 먹거리를 재배하고 키우는 일은 제게는 지금 불가능할 뿐더러, 아직은 제가 크게 흥미가 없는 일입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혜원이 그랬듯, 사실 삶을 음미할 수 있는 방법은 무언가 거창한 도전해서 오기보다는, 일상에서 스쳐지나가는 사소한 순간들에 있었다는 점을 깨달았답니다.
이제까지는 빨래를 해도, 더 자극적이거나 더 생산적인 일을 하기 위해 필요해서 어쩔 수 없이 하는, 빨리 끝내버리고 싶은 귀찮은 일이라고 인식했었는데,
이제는 그 하나하나의 과정에 가능한 한 집중해 보려고 해요.
빨래 더미를 쌓아 올려, 향긋한 세제 냄새도 음미하고, 한껏 깨끗해진 천의 부들부들함도 음미하며 선선한 바람에 빨래를 너는 일련의 과정을, 있는 그대로 느끼고 집중해보려고 합니다.
(물론 그래도 당분간 빨래 하는 건 귀찮을 거에요....)
가뜩이나 맨날 체하기 일쑤인 저는, 제가 먹고 사는 순간순간들부터 꼭꼭 씹어 삼키며, 저만의 작은 숲을 음미하며 살아보고 싶다고, 영화를 보고 다짐했습니다.
#브런치무비패스 #리틀포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