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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탐구토끼 Mar 28. 2018

"레이디 버드"에 공감할 3가지 이유

현대판 "빨간머리 앤", 영화 "레이디 버드"를 보고

호리호리하게 마른 몸매에 어깨에서 잘린 빨간 머리. 크게 뜬 두 눈과 풍부한 감수성.

언뜻 빨간머리 앤이 생각날 법도 하지만, 영화 "레이디버드" 의 주인공 레이디버드의 눈빛에는, 앤에게선 볼 수 없던 쿨한 냉소와 반항스러움이 가득 차 있습니다. 

나고 자란 도시를 벗어나겠다며 툴툴거리고, 스스로에게 붙인 이름, '레이디 버드'로 불러달라며 소리치고, 엄마의 잔소리를 듣다 못해 차 밖으로 몸을 던져 팔을 부러트리고, 취미로 당선되지 못할 학생회장 선거에 나가고, 사랑을 찾고 ... 여러모로 자신만의 이야기를 만들기 위해 열심인 17살 소녀 레이디버드는 확실히 앤과 닮은 듯 하면서도 다릅니다. 

하지만 반항적인 눈빛으로 거칠게 방랑하는 이 소녀에게 오히려 현대인들은 아래와 같은 세 가지 이유로 조금 더 공감할지도 모릅니다. 


달리는 차에서 뛰어내린 결과.




01. 세상은 절대로 있는 그대로의 날 인정하지 않는다. 

레이디버드가 영화 전반에 걸쳐 가장 강렬하게 외치는 메시지입니다. 

"모두 이래라 저래라 할뿐.... 있는 그대로의 날 인정하지 않아!" 

가 사춘기 레이디버드가 겪은 세상에 대한 요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우리에게도 굉장히 익숙한, 아마도 영원히 겪을 내면의 외침이지요. 

다만 나이가 들고 나름의 인생관이 생기면서 이러한 외침이 아주 낯설지 만은 않게 되는 '어른' 들에 비해, 17세의 감수성이 풍부한 우리의 주인공은 이를 좀 더 격렬하게 겪고 있습니다. 

특히 그녀를 제대로 인정해주지 않는 가장 큰 주체는 바로 그녀의 어머니입니다. 

영화 내내, 기 센 '레이디 버드'와 그보다 더 센 레이디 버드의 어머니는 거의 사사건건 부딪히며 작은 전쟁을 이어나갑니다. 

이 모녀....세다.

나고 자란 새크라멘토 따위 벗어나 일류 대학에 들어가 화려한 문화생활을 즐기겠다는 레이디버드의 포부에 '흥 니까짓게' 라고 어머니가 바로 받아치며, 영화의 시작부터 딸과 엄마의 전쟁이 시작하죠. 

어떤 고등학교를 갈지, 무슨 색의 드레스를 입을지, 추수감사절을 어디서 보낼지에 대해서도 딸과 엄마는 사사건건 대립합니다. 

어머니는 딸을 끔찍히 사랑하면서도, 그녀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지는 못하죠. 

제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 속 한 구절이 이를 정말 잘 나타냅니다. 

프롬 (미국 고등학교의 연말 파티) 에 입고 갈 드레스를 고르며, 이 드레스가 어떠냐고 묻는 레이디버드에게 어머니는 팩폭을 날리십니다. "너무 핑크핑크해." 그러자 울컥한 레이디버드. 화를 내던 도중, 아래와 같은 대화가 이어집니다. 

"난 엄마가 날 좋아했으면 좋겠어. (I want you to like me.) "
"얘야, 널 사랑하는 걸 알잖니. (You know I love you.)" 
"그건 알아. 하지만 엄마, 날 좋아하냐고? (I know. But do you like me?) " 
"... 난 그저 니가 최고의 모습이길 바랄 뿐이야. (I just want you to be the best version of yourself.)" 
"이게 내 최고의 모습이라면? (What if this is the best version of me?)
"...." 

결국 어머니는 대답하지 못하지요. 딸을 너무도 사랑하지만, 그녀의 모든 점이 최고이자 최선이라고 인정하지는 못합니다. 

사실 그럴 수 있는 관계야말로 흔치 않은 관계겠지요. 

하지만 그렇다고 사춘기 소녀 레이디버드가 상처 받지 않는 것도 아닙니다. 마치 우리들처럼요. 

집에서만 그럴까요. 당연하게도 바깥 세상은 더욱 냉정하게 그녀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02. 그렇다면 나도 부정해주겠어! 반항해주겠어! 


이런 상황은 누구에게나 익숙한 상황입니다. 그리고 사람마다 이에 대응하는 방법은 천차만별이겠죠. 

질풍노도의 사춘기를 겪고 있는 우리의 주인공, 레이디버드는 어떻게 대처할까요?

사춘기의 소녀라는 점에서 예상 가능하듯이, 그녀는 외칩니다. 

'그렇다면 나도 반항해주겠어!' 


흥핏쳇

레이디 버드는 자신 나름대로 반항합니다.

다만 레이디 버드의 반항하는 방식은, 흔히 떠오르는 탈선 행위나 '못된 짓' 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본명 "크리스틴" 을 거부하고, 자신을 "레이디 버드" 라고 불러 달라거나, 

네 성적으론 어림도 없다는 주변 어른들의 말 따위 개의치 않고, 자신은 대도시에 있는 명문대에 갈 거라며 엄마에게 숨기고 원서를 몰래 내고, ( 그 과정에서 수학 성적을 훔쳐 버려 버리기도 합니다 )

강렬하고 특별한 사랑을 추구하며, 퇴폐적인 (중2병에 걸린) 새 남친을 얻기 위해 반에 있는 전형적인 "예쁘고 부자지만 재수 없는 X년" 과 친해지기 위해 노력하고, 

낙태의 비도덕성에 대해 강의하는 강사에게 한 마디 쏘아 붙여 정학을 당하기도 합니다. 

퇴폐적인, 그리고 중2 병 걸린 새 남친

모두가 너는 인생의 주인공이 없다고 말하지만, 아랑곳 하지 않고 나만의 이야기를 만들고야 말겠다는, 감수성이 깊고 풍부하며, 행동에 있어선 거침 없는 그녀다운 반항방식이라고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보다 깊숙히 들여다보면, 레이디버드의 반항의 근본에는 "자기 부정" 이 깔려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누가 뭐래도 자신을 긍정하는 굳센 캐릭터로 보였지만, 그녀의 행동을 찬찬히 살펴보면 그녀는 반항의 방식으로, 자신에 대한 모든 것을 부정해나가기 시작하죠. 

부여 받은 자신의 이름을 부정하고, 

자신이 나고 자란 도시를 싫어하며 부정하고, 

돈이 많지 않은 자신의 집안환경을 부정하며 친구에게 거짓말하고, 

자신이 현재 받은 성적을 부정하고, 

가장 자신을 이해해주는 친구를 부정하고, 

가족구성원들을 부정하고, 

자신의 처녀성도 부정하고, 

학교에서 받은 가르침도 부정하고 싶어합니다. 

세상이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인정하지 않기에, 자신도 현재 자신을 구성하는 것들을 부정하는, 

굉장히 아이러니하지만, 슬프게도 익숙한 방식의 반항입니다. 

이렇게 지금의 자신을 부정해 나가다 보면 새롭고 인정 받는, 멋진 자신이 탄생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기대감도 언뜻 있습니다. 

하지만 자기 부정은 일시적인 쾌감을 줄 뿐, 근본적인 해결책은 되지 못합니다. 

비유하자면, 아래의 질답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래 질답은 예를 든 것일뿐, 영화 속에서 나온 대사는 아닙니다.)

"모두가 내가 이러저러하다고 하지만, 그건 내가 아냐!"
"그렇구나. 그럼 너는 뭔데?" 
"... 어쨌튼 이건 아냐!" 

어쩌면 자기를 부정하는 것이야말로 고민을 해결하는 가장 손쉬운 방식일지도 모릅니다. 

제가 무의식적으로 자주 그러는 것처럼요. 

하지만 "그럼 너는 뭔데?" 란 대답에 결국 본인도 대답하지 못하는 것처럼, 자기 부정은 다시 끝없는 방황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03. ...세상엔 사랑이 복잡하게 얽혀 있구나. 



영화의 초입부분에서, 한 신부님은 미사 중 말합니다. 

"우리는 불안합니다. 사랑 받지 못할까봐 불안하고, 성공하지 못할까봐 불안합니다."

그 말대로입니다. 

그리고 이 불안은 아마 평생 없어지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영화 레이디버드에서 "레이디버드"는, 현실의 수많은 이들이 그러하듯이, 사랑과 인정을 받기 위해 불안해 하며 방황합니다. 

불안이 커지면, 자기를 부정하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그녀가 정말 그녀다워 지는 때는 자기 부정을 그만둘 때죠. 

맞지 않는 옷을 입은 것처럼, '잘 나가는 자신'을 연기하는 것을 그만두고, '나는 프롬에 가고 싶다'며 쥴리의 집에 내려달라고 당당하게 레이디버드가 요구할 때, 저는 엄마미소를 지으며 "you go girl!" 을 마음속으로 외쳤습니다. 

그녀가 방금 자기 부정을 그만두고,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긍정했고, 본능적으로 이것이 가장 그녀다운 선택이란 것을 관객들은 느낍니다. 


그렇다면 자기 긍정을 시작한 레이디버드는 원하던 뉴욕에 가는 데 성공해서 해피해피하고 설레이는 인생의 제 2막을 시작하느냐. 하면 

답은 '아니올시다' 입니다. 

영화는 여타 틴에이지성장로맨스코미디 영화들처럼, 주인공이 값진 교훈을 얻고 새로 태어나 두근두근 설레이는 해피 라이프를 향해 힘차게 걸어가는 장면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레이디 버드는 그토록 바라던 뉴욕에 가서 확실히 변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뉴욕에 가서 그녀는 스스로를 드디어 주어진 이름, "크리스틴" 으로 소개하기 시작합니다. 

끔찍하게 여겼던 기독교 여고 출신이었는데도, 스스로 교회를 찾아 가기도 하며, 

자신이 늘 욕하며 투덜댔던 출신지 '새크라멘토'를, 마치 자신의 어머니가 자신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지는 못했지만 사랑했듯이, 그렇게 사랑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어머니와 가족에게 감사하다는 사실도 깨닫습니다. 


'오구오구 다 컸네' 할 법도 하지만, 동시에, 여전히 그녀의 방황은 끝나지 않습니다. 

술 먹고 토해서 병원에 실려가고, 

아버지는 여전히 실직 상태이겠고, 

어머니와는 조금은 어색한 상태로 한동안 지내겠고, 

대학에 입학해서도 온갖 방황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겠죠. 


앞에서 말했듯이, 사랑과 인정을 받지 못할까 두려워하며 자신이 누군지 알기 위해 헤매이며 불안해하는 나날은 결코 영원히 끝나지 않습니다. 

우리가 그렇듯이, 레이디버드도 영원히 불안 속에서 방황하겠죠. 

다만 이제 레이디버드는 세상이 생각보다는 복잡하게, 불안과 사랑으로 얽혀 있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방황과 성장을 통해 조금씩 얻어 가는 이 교훈은, 현실 속의 문제를 깔끔하게 해결하지는 못합니다. 

그럼 어디 쓸데가 있냐고 한다면, 자신을 미세하게나마 잘 알게 되고, 세상 도처에 복잡하게 얽히고 섥혀 꼬여 있는 사랑의 존재를 발견하게 될 확률이 높아지겠죠. 

그게 각자에게 어떤 의미일지는, 앞으로 레이디버드가 어떤 삶을 살게 될지 모르는 것처럼, 모르는 일입니다. 

그렇기에 내일은 불안할 수도, 희망찰 수도, 아무 것도 아닐 수도 있겠죠. 

애매한 결론이지만, 그게 있는 그대로 우리가 알고 있는 "내일" 이란 개념을 표현한 게 아닐까 싶습니다. 

마치 레이디버드의 조금은 애매한 결론처럼, 이번 리뷰도 조금은 애매하게 끝내볼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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