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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탐구토끼 Jan 19. 2018

원더휠, 현실 속에서 판타지를 연기하는 이야기

이렇게 말하면 낭만적이고 아름다워 보이지만 아닙니다


"우디 앨런 감독 작품 중 가장 아름다운 영화" 
"숨을 쉴 수 없을 만큼 아름다운 순간들로 가득한 영화"
"달콤하고 환상적이다"

등등이 원더휠을 검색했을 때, 제가 마주친 화려한 수사어였습니다. 

"으어어어어 호에에에에" 

가 영화관을 나오면서 같이 영화를 본 친구가 내뱉은 한마디 감상평이었습니다.

결론만 말하자면, 전 이 영화가 꽤 마음에 들었습니다.  




매력 넘치는 주인공들의 사랑과 슬픔, 가슴 시리지만 아름다운 로맨스를 우디 앨런 특유의 달콤한 영상미로 담아낸 영화라고 무턱대고 기대하시고 가면, 제 친구와 같은 모양새로 영화관을 나오시게 됩니다. 



영화 관람 후 제 친구의 얼굴.jpg


놀이공원이라는 낭만적인 배경 속, 빛을 극적으로 활용하여 때론 퇴폐적으로, 때론 부드럽게, 때론 강렬하게 이야기를 감싸 안는 영상 자체는 틀림없이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과연 이 로맨스가 '아름답고' '낭만적' 이라고 표현될 수 있을지, 영화는 애초에 그런 로맨스를 그려내고 싶었던 건지, 더 나아가 애초에 영화가 표현하고자 했던 중심적인 내용은 로맨스였던 것인지에 대해 저는 모두 회의적입니다. 


제가 본 원더휠은 "아름다운 로맨스" 가 아닌, 현실과 판타지의 애매하고도 강렬한 관계를 놀이공원이라는 비현실적인 공간에서 펼쳐 낸 영화였습니다. 



로망과 현실이 혼잡하게 뒤섞인 곳, 코니 아일랜드  


이야기가 펼쳐지는 곳은 한 때는 영광을 자랑했지만, 지금은 점점 쇠퇴해가는 놀이공원 겸 휴양지인, "코니 아일랜드." 한 여성이 불안해 보이는 표정으로 코니 아일랜드에 입장하면서 이야기는 시작됩니다. 여성의 이름은 캐롤라이나. 아름답고 총명했으나,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갱단 멤버와 사랑에 빠져 도망치고, 경찰에 갱단의 치부를 얘기하면서 갱단에게 쫓기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녀가 코니 아일랜드를 찾아온 이유는 5년 전 절연한 아버지, 험티에게 도망쳐 몸을 숨기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그녀는 험티와 그의 현재 아내이자 이야기의 주인공인 지니와 그녀가 전 남편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 리치와 살게 됩니다. 


한 때 배우를 꿈꿨으나, 웨이트리스로 서빙을 하며 삶을 이어가는 지니


험티는 실로 낭만이라고는 없는 남자입니다. 술에 취하면 폭력을 휘두르는 나쁜 버릇이 과거에 있었고, 놀이공원에서 회전목마를 관리하는 일을 하다, 쉬는 날에는 친구들과 낚시와 야구에 열광하는, 흔히 볼 수 있는 캐릭터입니다. 그의 아내, 지니는 역시 코니 아일랜드에서 서빙을 하고 있지만 젊은 날에는 여배우로 활동하며, 대(大) 여배우의 꿈을 꿨던, 그리고 아직도 그 꿈에 미련이 있는 인물입니다. 그러나 생계를 위해서는 서빙 일을 하며 돈을 벌 수 밖에 없고, 생계를 위해서 사랑하지 않는 험티와 결혼해 자꾸만 사고를 치는 아들 리치를 키우고 있습니다. 그러던 중, 언젠가 엄청난 희극을 쓴 극작가가 되겠다는 꿈을 가지고 학비를 벌기 위해 구조요원 일을 하던 믹키와 불륜관계를 맺게 되지요. 하지만 믹키와 캐롤라이나가 서로에게 끌리기 시작하고, 이를 눈치챈 지니가 서로 팽팽하게 이야기의 바퀴를 굴리면서 관객들의 신경도 점점 날카로워지게 됩니다. 


믹키와 지니, 캐롤라이나


놀이공원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비현실, 판타지, 로망과 연결되어 연상되는 공간입니다. 우리는 반복되는 일상에서 벗어나 새롭고 즐거운 일탈을 즐기기 위해 놀이공원을 찾지요. 하지만 원더 휠의 주인공들에게 놀이공원은 지긋지긋하고 지루한 일상입니다. 누군가에게는 현실, 누군가에게는 판타지인 모순적인 공간, 코니 아일랜드에서 이야기의 주인공들 또한 악에 받쳐 현실을 살아가면서도, 자신들만의 달콤한 판타지를 꿈꾸지요. 그리고 흥미롭게도, 코니 아일랜드는 점차 주인공들에게도 지루한 일상이 반복되는 공간에서, 낭만과 판타지를 실현할 수 있는 공간으로 변모해갑니다. 



**주의** 

아래부터는 심각한 스포가 될 수 있으니, 스포를 원치 않으신 분들은 절대 스크롤을 내리지 말아주세요! 



일상 속에서 판타지를 연기하며, 이야기는 돌아간다. 


원더휠의 인물들은 언뜻 보기엔 불만스러운 현실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꿈을 좇고 싶어하는 인물들로 보입니다. 지니는 연극배우와 화려한 삶이라는 꿈을, 캐롤라이나는 아름다운 사랑이라는 꿈을, 믹키는 거장 작가가 된다는 꿈을, 험티는 딸을 다시 빛나게 하고 싶은 꿈을 좇고 있는 듯 합니다. 하지만 저는 원더휠의 주인공들을 단순히 "꿈을 좇는 인물" 로 정의하는 건 뭔가 어색한 느낌이 듭니다. 제 나름대로 정의해 보자면, "판타지를 연기하는 인물" 이라고 표현하는 게 보다 정확하다고 생각됩니다. 


영화를 보신 분들은 모두 눈치채셨겠지만, 원더휠에서는 연극과 관련된 장치가 반복적으로 등장합니다. 영화를 시작할 때, 마치 연극의 나레이션 처럼 영화 속 주인공인 믹키는 카메라를 정면으로 쳐다보며, 이야기의 배경을 설명하고, "캐롤라이나 등장" 이라고 유쾌하게 소리치며 이야기를 시작하지요. 중간중간에 영화 밖 관객을 향해 독백하는 장면도 자주 등장합니다. 


관객을 향해 독백을 하는 일이 잦은 믹키. 저스틴 팀버레이크가 열연했죠.


영화 속 믹키와 지니 또한 모두 연극에 큰 열정이 있는 인물들입니다. 믹키는 유명한 극작가를 꿈꾸고, 지니는 한 때 연극배우로 활동했으며 여전히 그 세계를 그리워합니다. 


배우들의 대사와 톤도 과장되어 있습니다. 

일상에선 좀처럼 듣기 힘든 정열적인 사랑의 대사, 그리고 드라마틱한 상황들. 


왜 원더휠에는 이토록 연극적인 소재와 장치가 넘쳐나는 걸까요?


제가 생각하는 답은, 이들이 현실을 극복하는 수단으로 "연기" 를 택했기 때문입니다. 

이는 현실에 발을 딛고 꿈을 좇는 것과는 조금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꿈을 좇는 이들이, 현실을 그대로 인식하고 이를 본인이 원하는 방향으로 변화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면, 원더휠 속의 인물들은 본인이 원하는 어떤 역할을 "연기" 함으로써 본인이 현재 처해 있는 현실을 새로 해석하려고 합니다. 

이를 가장 강렬하고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인물이 바로 주인공 지니입니다. 

제가 가장 인상깊게 봤던 장면이기도 한데, 바닷가에서 믹키와 설레는 첫 만남을 가졌던 이후, 지니는 집에 와서 거울을 보며, 믹키와 두 번째 만남을 가질때 던질 대사를 연습합니다. 


거울을 보며 대사를 연습하는 지니

톤을 다르게 하며 대사를 연습하는 그녀는, 당장 닥친 새로운 만남 그 자체에 압도되었다기 보다는, 새로운 상황에서 본인이 연기하게 될 새로운 역할을 어떻게 더 드라마틱하고 완벽하게 소화할지 골몰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를 더욱 선명하게 보여주는 장면은 믹키와 정원을 거니던 중, 지니가 발작적으로 외치는 장면입니다. 

"난 고작 웨이트리스가 아니에요! 이건 모두 다 연기라고요!" 

믹키는 당황하며 지니를 안아주지만, 영화를 보던 제게는 이 대사가 크게 박혔었습니다. 

지니에게 있어, 불만족스러운 현실을 극복하는 방법은 연기었습니다. 

여배우의 꿈을 좇아 지긋지긋한 현실에서 연하의 잘생긴 극작가와 훌쩍 떠나버리는 비극적인 인물을 연기하는 것도, 아무도 대단하게 생각하지 않는 웨이트리스로 하루 벌어 하루 먹는 삶을 연기한다고 소리치는 것도, 지니가 불만족스러운 현실을 살아가는 방법이었던 거죠. 


믹키와 지니는 이국적인 중국정원을 자주 방문하죠.


지니 외의 인물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믹키가 지니를 사귀는 큰 이유 중 하나는, 물론 지니가 헌신적이고 아름답기도 하지만, 그 편이 "위대한 극작가" 라는 자신의 역할에 맞는 것 같아서입니다. 연상의 불행한 여인과의 사랑이라니, 극작가스럽다고 독백하는 장면에서 명확해지죠. 


캐롤라이나는 안정된 미래가 있었음에도 모든 것을 버리고 갱과 달아나는 위험한 사랑을 택합니다. 코니 아일랜드에 돌아와서 사실 자신이 원했던 것은 행복한 가족이었다고 믹키에게 말했으면서도, 막상 믹키에 대한 험담을 다 들은 후에도, 믹키와 지니가 불륜 관계였다는 것을 안 후에도, 그녀는 믹키에게 매우 큰 호감을 보입니다. 캐롤라이나 또한 "위험하고 짜릿한 사랑을 하는 자신" 이라는 역할을 연기하는데 취해 있었던 거죠. 


관계 자체와 현 상황에 집중하기 보다는, 본인이 원하는 자신의 모습을 연기하는 데 너무 치우친 원더휠의 인물들은, 그렇기에 현실성 있게 장단점을 따지거나 자신이 원하는 일이 객관적으로 얼마나 이득이 되고 개연성이 있는지 따지는 모습은 눈곱만큼도 보여주지 않습니다. 적어도 각자가 연기에 가장 몰입했던 지니와 믹키, 캐롤라이나 이 셋의 관계에서는요. 따졌다면 이야기는 이토록 드라마틱하게 흘러가지 않았을 테고, 지니의 광기라고 표현할 정도의 과열된 집착과 열기도 볼 수 없었겠지요. 


결국 판타지가 무너졌을 때, 그들은 현실로 돌아온다 


그러나 연극의 막이 내리듯이, 그들이 연기하던 판타지 속의 역할도 필연적으로 막을 내리게 됩니다. 

그들이 살고 있는 곳은 결국 현실이었기 때문입니다. 

영화에서 연극의 폐막은, 늘 그렇듯이 서서히 찾아온 것이 아니라, 마지막까지 드라마틱하게 뻥 터지며 찾아옵니다. 


캐롤라이나의 일에 대해 지니를 추궁하러 온 믹키가 본 지니는 말 그대로 연극에 설 차림새와 화장으로 그가 등장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지니와 마주칩니다. 

누가 봐도 과장스럽고 억지스럽게 말을 이어가는 지니는 마치 열정적으로 독백 무대를 펼치는 배우같지요.

현실과 너무나도 맞지 않는 지니의 모습에 관객들은 필연적으로 불편한 긴장감을 느낍니다. 


과장된 옷차림과 과장된 말투, 과장된 몸짓의 지니는 불편한 긴장감을 줍니다.


그리고 이러한 긴장이 가장 절정에 다다르는 때가 아연해서 지니를 추궁하는 믹키에게 지니가 칼을 들며 "정 그렇다면 날 찔러!" 라고 외치는 장면입니다. 

이 때 케이스 윈슬렛이라는 배우의 진가를 몸서리치게 느낄 수 있었는데, 그 말을 하는 지니의 표정은 '정말 찌르면 어떡하지' 라는 표정이 아닌, 정말 자신을 믹키가 찔러주길 바라는, 그래서 자신이 연기한 극이 드라마틱하게 끝나며 영원히 본인이 연기한 판타지에서 살고 싶어 하는 지니의 광기에 가까운 욕망을 보여주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믹키는 지니의 이러한 욕망을 이뤄주지 않고 터벅터벅 떠납니다. 

화려하게 막을 내린 지니와 믹키와 캐롤라이나의 연극. 

연극이 끝난 지금, 지니는 어디로 갈까요? 


영화의 결말은 충격적이게도, 다시 현실입니다. 

믹키가 떠난 저녁, 지니는 일생일대의 연기를 마치고 에너지가 다한 배우처럼, 멍한 표정으로 내일 입을 유니폼과 조금 있으면 돌아올 리치의 밥 이야기를 합니다. 

흔히 우리는 현실에서 충족되지 않는 욕망을 꿈과 로망이라는 비현실의 경계로 옮긴다고 생각합니다. 

그 반대의 경우는 전혀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원더휠에서의 지니는 그렇게 넘어간 비현실의 영역에서도 충족되지 않은 욕망은 다시 방향을 틀어 현실로 돌아올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는 선명한 선으로 가른 것처럼 대척점에 있던 것이 아니라, 마치 위아래가 딱히 정해져 있지 않은 원더휠 (관람차) 처럼, 현실이 비현실이, 비현실이 현실이 될 수 있는 애매모호함을 영화는 말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p.s. 참고로, 마지막 장면에서야 그간 두드러지지 않던 험티가 어떤 인물이었는지 이해가 되는 기분이었습니다. 마지막 장면 전까지는, 험티야말로 그저 현실에만 붙박혀 있는 인물을 대표한다고 생각했었는데, 마지막 장면에서 캐롤라이나의 실종에 화를 내다가도, 애처롭게 울며 지니에게 5년 전 아내가 병으로 죽었을 때처럼 자신을 도와달라고 애원하다, 지니의 감정없는 말에 "이번 주말 낚시나 갈래?" 라고 묻는 괴상했던 일련의 대화를 통해, 험티 역시도 그 나름대로의 판타지를 연기했던 인물이 아닐까 생각이 들었습니다. 


회전목마를 관리하는 험티


험티가 바랐던 로망은, 아내가 살아있었고 딸도 도망치지 않았던 밝고 안정된 가정이 아닐까 합니다. 돌아온 딸 캐롤라이나야말로 그의 로망을 실현해 줄 수 있던 존재였던 거지요. 그렇기에 험티는 캐롤라이나에게 리치나 지니에게 해준 것과 다른 대우를 해주며 애지중지 하는데, 이것은 그 나름대로의 역할에 빠져 연기를 하던 중이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캐롤라이나가 사라지면서 그의 연극도 막을 내리게 되고, 지니처럼 험티 역시 다시 비현실의 경계를 넘어가는 과정에서 겪은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현실로 돌아온 게 아닐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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