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니가 멱살 잡힐 차례야
고백하자면, 저는 한 번도 영어에게 배신당한 적이 없는 인생을 살아왔습니다.
내 자식은 내가 누리지 못했던 것을 누리게 해주겠다는 여느 부모님처럼, 저희 부모님도 자녀의 교육에 투자를 아끼지 않으셨습니다.
다행히 저는 어렸을 때부터 언어와 관련된 활동을 굉장히 좋아했고, 타고난 적성과 더불어, 한국 사교육의 눈부신 발전, 부모님의 전폭적인 지지, 선생님들의 칭찬, 또래와의 경쟁에서 이기고자 하는 승부심, 모범생 기질, 그리고 수학만 보면 현기증이 나는 문송한 머리가 숫자보다 알파벳을 택하도록 몸에 지시한 덕분에 저는 초중고, 대학교를 거쳐 현재까지, 늘 ‘영어를 잘하는 사람’으로 기억되어 왔습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첫 토플 시험을 치렀었고,
중학교 때는 영어 선생님들에게 ‘쟤는 영어 수업 때 딴짓해도 된다’ 고 들어서 한껏 중2병이 도졌었고, (다행히 수학은 저를 다시 겸손하게 해주었습니다.)
고등학교 때는 수능 준비하랴 내신 준비하랴 수시 준비하랴 바쁠 때, 영어에 쓰는 시간을 벌 수 있어서 정말 다행이었지요.
아직도 제가 고등학교 때 내뱉은 오글거리는 대사를 잊을 수가 없네요.
쟤는 영어 시간에 수학 문제만 풀고, 영어 과목 시험을 준비하는 꼬라지를 본 적이 없는데 왜 모든 영어 시험에서 만점을 맞는지 (그리고 그러고도 수학은 왜 그 모양인지) 놀라웠던 제 친구가 어느 날 하교 길에 ‘넌 왜 맨날 영어가 만점이얌?’ 하고 물었습니다.
저는 머리를 넘기며 말했지요.
“얘. 너는 지금 초등학교 국어 시험을 보면 당연히 100점이 나오겠지? 나한텐 영어가 그런거야.”
아아아악 입 다물어어어어
그 친구는 다행히 제 곁에 지금까지 10년지기로 남아 주었습니다. 참된 친구이지요.
영어는 그 이후로도 저를 배신하지 않아서, 대학도 초시 때는 글로벌 전형으로, 재수 때는 국제학부로 진학했습니다.
국제학부에는 영어가 한국어보다 편한 해외파들이 득시글했습니다. 수업의 모든 전공 서적이 영어였고, 리포트, 중간기말고사, 토론 모든 과정이 영어였고, 해외파들이 날아다니는 와중, 저는 처음으로 영어 쭈구리가 되었습니다.
그래도 하나하나 해 나가다 보니, 어느새 영어실력이 많이 좋아졌더군요.
영어는 제게 동아리 경험과 소정의 생활비도 대주었습니다.
영자신문사에서 편집국장도 해봤고, 생활비를 대기 위한 알바도 모두 영어와 관련된 것이었습니다.
영어 번역, 영어 과외, 영어 TA, 대기업 유급 대외활동 등, 대학생에겐 높은 시급을 받으며 용돈을 충당했지요.
이렇게 쌓인 영어 스펙과 실력은 인턴 기회도 가져왔습니다.
두 차례의 인턴 경험 모두 영어 실력이 기본적으로 갖춰져야 면접 기회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졸업하고 얻은 첫번째 직장도 외국계였습니다.
회사의 모든 문서는 영어로 작성되었고, 한국 지사임에도 직장 동료의 30% 이상이 외국인이었기에, 공식언어는 영어였지요.
퇴사하고 10개월간 뒹굴거릴때도, 프리랜서 번역가로 일하며 생활비는 충당했습니다.
두번째 직장에서도, 경력직을 주로 뽑는 자리에 신입이나 마찬가지인 제가 뽑힐 수 있었던 건 일견 화려해보이는 외국어 스펙이 나름의 역할을 했습니다.
‘이래서 영어영어 하는거지’, 가 딱 맞는 인생 루트였습니다.
‘왜 영어를 배워야 해요?’ 는 할 필요 없는 어리석은 질문이자, 영어라는 절대신에 대한 신성모독이었습니다.
저는 그렇게 영어에게 멱살을 잡혀 가장 신나게 끌려가는 유순한 양으로 살며, 영어님이 주시는 풀을 뜯으며 살을 찌워왔습니다.
헤헤헤 좋은 게 좋은 거지.
그런데 바로 이 두번째 직장에서 저는 절대신의 권위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게 됩니다.
이때까지 제가 본 세상은 무조건 영어를 잘하면 잘할수록, 어떤 식으로든 보상이 돌아오는 시스템이었습니다.
“영어를 잘할수록 돌아오는 게 커진다” 라는 공식이 성립되었지요.
그렇기에 원하는 게 있는 이상, 영어를 잘하기 위한 평생의 몸부림은 당연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두번째 직장에 들어가니, 이런 생각이 들게 됩니다.
“어…? 영어를 쓸 일이 거의 없잖아?”
한국을 무대로 하며, 다른 한국인들과의 커뮤니케이션이 업무의 대부분을 차지했고, 영어를 쓸 일이 생긴 날이 오히려 동료들 사이에서 뉴스거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생각해보니, 대부분의 한국 회사의 대부분의 직무는 당연히 그렇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외국 기관과의 메일 주고받기, 해외 출장, 영어 미팅은 가끔, 정말 가끔 발생했습니다.
게다가 또다른 놀라운 사실은, 사실 위와 같은 업무를 처리하는 데 있어서, 영어 실력이 그렇게 화려하지 않아도 괜찮았던 점입니다.
12년간 필수 과목으로 영어를 배워온 고통의 나날과, 한국인들의 빠릿빠릿한 일처리가 만나면 놀랍게도 토익이 몇 점이건간에, 스스로 발음이 얼마나 후지다고 생각하건 간에,
사람들은 어떻게든 알아듣고, 어떻게든 해석했으며, 어떻게든 의사를 전달할 수 있었습니다.
대다난 한국인
화려한 미국 발음이 아니더라도, 문법의 한 요소가 파괴된 broken English 라도, 어딘가 어색한 비즈니스 영어라도, 뜻은 충분히 통했고, 그거면 됐습니다.
빠른 일머리와 실무 능력이 오히려 훨씬 중요했습니다.
제 동기는 영어 실력이 아주 뛰어나지 않았지만, 함께 해외 출장에 갔을 때도, 적당한 감으로도 충분히 상대방의 뜻을 파악하고, 필요한 업무 처리를 수행했습니다.
저는 그거면 충분히 됐다고 생각했습니다.
동기와 제가 한 일은 회사에게 있어 큰 차이가 없었습니다. 가장 영어를 유창하게 하는 사람이 업무를 가장 효율적으로 수행하는 게 전혀 아니었지요.
영어는 업무를 원활히 하는 수단이었으며, 이미 동기가 가지고 있는 영어 실력으로도 충분히 좋은 수단이었습니다.
이제 딱히 영어를 가장 잘 하는 사람이 가장 큰 보답을 받지 않는 패러다임이 온 걸 직접 느꼈습니다.
그때야 저는 처음으로 이런 질문을 품게 됩니다.
“그런데 왜 여전히 직장인들이나 주부, 은퇴한 사람들은 영어에 멱살이 잡혀 있지?”
이전까지는 온 나라의 온 연령대의 사람들이 신앙처럼 영어 공부를 강조하는 이유가 궁금하지 않았습니다.
10대 때는 필수 과목이니까, 좋은 대학에 갈 때 중요하니까.
20대 때는 좋은 직장에 취직할 때 중요하니까.
여기까지는 저도 동의합니다. 충분히 실용적인 이유입니다.
그런데 가장 궁금했던건, 이미 직장에 취직했거나, 혹은 취직할 일이 없는 경우에도 유독 영어에 대한 열망과 열등감은 늘 발견되었다는 겁니다.
직무의 특수한 성격 때문이거나, 승진을 위해 영어 시험을 보는 회사인 경우에는 이해가 됩니다.
하지만 영어로 일할 일이 전혀, 혹은 거의 없고, 회사에서 전혀 강요하지 않더라도, 자발적으로 영어 실력을 높이기 위해 공부하는 근면성실한 분들도 정말 많습니다. 정말 많아요. (큰 예로 전 회사 팀장님)
수많은 직장인 영어회화 학원들이 그 증거입니다.
직장인 뿐만이 아니라, 이미 은퇴하신 분, 주부 분도 마찬가지로 영어를 배우는 것을 새해 목표로 삼습니다.
분명 영어를 잘하게 되면 좋은 건 사실입니다. 그건 제가 잘 안다고 생각해요. 지적인 즐거움도 분명 있을거고, 어떻게든 도움이 되겠지요.
그런데 다시 드는 질문은, 이 시점에서 그게 왜 굳이 “영어” 여야 할까? 입니다.
잘하게 되면 어떻게든 도움이 되는 건 영어 외에도 수없이 많이 있지 않나요?
예를 들어 그림이라면, 그림을 잘 그리게 되면서 SNS도 멋지게 꾸밀 수 있을 거고, 더 잘하게 되면 자신만의 개성 있는 특기로 인정 받을 수 있을 테고, 더 잘하게 되면 친구들이나 아이들에게 그림을 선물로 줄 수도 있을 테고, 외국 여행을 나가서 내가 본 멋진 광경을 그림으로 멋지게 기록할 수도 있을 테고, 실력과 경험이 계속 쌓이면 프리랜서 일러스트레이터로 활동할 수도 있는 거고, 개인 SNS 에 웹툰을 그려서 올릴 수도 있는 거고, 새로운 인연이 생길 수도 있는 거고 ….
대부분의 경우, 뭐든 잘하게 되면 어떻게든 도움이 됩니다.
“글로벌 시대에 맞는 인재가 되려면 다른 게 아닌 영어를 공부해야 한다고!” 반박할 수도 있겠지만,
애초에 그 ‘글로벌 인재’ 가 정확히 어떤 인재를 의미하는지, 굉장히 모호하다는 점에서 전 이 단어에 좀 회의적입니다. 번역기도 발전하고 있고 말이죠.
글로벌 시대의 콘텐츠 크리에이터를 목표로 한다면, 오히려 언어가 달라도 뜻이 바로 통하는 그림이 더 중요할 수도 있잖아요?
왜 우리들은 하고 많은 배울 것 중 유독 “영어 마스터하기” 는 꼭 해야 하는 일이라고 믿고, 영어한테 멱살을 잡혀서 평생 질질 끌려다니는 걸까요?
저는 생전 처음으로 그전까지는 절대신으로 섬겼던 영어의 권위를 다시 평가해 보았습니다.
뭐야, 너… 그냥 아무 이유 없이 무조건 잘해줘야 하는 게 아니잖아?
근데 왜 앞으로도 내 소듕한 시간을 써서 굳이 너를 픽해야 할까?
이렇게 질문하며, 답을 찾자, 이번에는 제가 영어의 멱살을 잡게 되었습니다.
아하, 너 이런 점에서 좀 쓸모 있구나.
그럼 이걸 위해 널 데리고 가야겠다. 따라와. (박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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