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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브리엘의오보에 May 14. 2018

악(惡)의 단물을 쏙 빼먹다

악 혹은 악인의 이점을 발견할 수 있을까?

현대의 악 혹은 악인이란 


 

악(惡) 혹은 악인(惡人)은 사회가 무엇을 윤리적 기준으로 삼고 있던지 항상 존재했고 항상 침범에 대비해야 할 존재이다. 악 혹은 악인의 가장 객관적인 정의는 ‘우리의 반대편에 선 행위 혹은 존재’일 것이다. 이런 판단은 ‘우리는 선(善)’이라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우리 편이든 반대편이든 ‘우리’는 선을 추구한다. 다시 말하면, 우리 그룹, 사회가 수립하여 지키고 있는 기준을 따르며 언제나 최선을 다한다. 따라서 ‘우리 그룹’, '우리 사회’의 다양한 활동은 ‘우리 기준’에 비추면 당연히 선이다. 반대편에 선 그룹, 사회의 행동과 판단은 악이다. 우리는 그들의 기준을 인정할 수 없다. 그들의 행위도, 판단도 인정할 수 없다. 그것을 인정하면 우리의 선이 손상될지도 모른다. 혹은 이미 손상되고 있다. 우리는 오랜 세월 비교와 수정, 개선과 개선을 더해 지금의 기준을 가치관으로 다져왔다. 그러니 이 기준은 틀릴 리 없다. 그런데 상대 집단의 행위는 우리의 기준에 반하는 것은 둘째 치고, 그들의 행위로 인해 우리의 오래된 기준, 우리가 지키려는 선이 손상받을 위험에 있거나 이미 손상받고 있다. 우리의 반대편에 선 저 집단은 악이다. 


 

자유 민주주의는 추종하는 국가가 많은 이즘(-ism)이다. 자유 민주주의는 집단보다 개인에 초점이 맞춰진 사상이다. 개인은 자신의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 개인은 자신의 미래를 스스로 결정할 자유를 가진다. 이러한 자유 민주주의가 갖는 단점, 즉 개인의 추구와 판단으로 인해 타인의 행복과 자유가 침해될 수 있다는 속성을 예방하고 모든 구성원의 추구와 판단을 보호하기 위해 자유 민주주의 사회는 법가의 정신을 잇는다. 규칙을 통해 개인의 추구와 판단에 울타리를 만들어 타인의 추구와 판단을 침해해 구성원 각자의 행복과 자유가 침범 당하지 않도록 예방한다. 그렇지만 규칙은 모든 사람의 자유와 행복을 보호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규칙대로 하면 내가 움직일 수 있는 범위는 너무 좁다. 법은 사회적 필요가 일정 수준까지 채워질 때 개정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정 전후로 제한받는 구성원이 바뀌거나 유지된다. 개정될 때마다 활동 범위가 좁아진다 판단한 개인은 사회적 불만을 갖는다. 특정 그룹이 지속적인 이득을 보고 있다 판단하게 된다. 특정 그룹이 자기 그룹의 이득을 위해 법을 마음대로 고칠 힘이 있다고 판단한다. 특정 그룹은 악의 그룹이 된다. 


 

법의 가치를 높이고 이를 따르는 구성원의 수를 늘리기 위해 사고방식을 바꾸려는 노력이 지속되고 있다. ‘조직이란...’, ‘사회란...’, ‘의무란...’, 그리고 ‘권리를 행사하려면...’이란 교육이 다양한 채널을 통해 사회 전반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기관을 통해, 부모를 통해, 교사를 통해, 상사를 통해, 선배를 통해 개인은 소속한 조직의 규칙을 학습하고, 이 규칙을 지키지 않았을 때 제재를 받는다. 규칙을 이해한 사람은 어느새 규칙을 정할 위치에 가 있기도 하다. 규칙이 이해되지 않는 사람은 규칙이 정한 울타리를 벗어나려 시도하고 그럴 때마다 규제의 방해를 받는다. 항상 규제 하에 있는 사람은 규칙을 이해하고 겉으로 보기에 자유로이 살게 된 사람을 ‘약삭빠르다’라고 판단하고 악의 그룹으로 분류하기도 한다. ‘어떻게 아부를 했길래...’, ‘자신의 소신도 버려가며...’ 등의 피해 의식이 성장한다. 악은 절대 살펴보면 안 되고 물리치고 제거해야 할 대상이다. 그들이 없다면 나는 규제에서 풀려나 내 추구와 판단 대로 살 텐데. 


 

그들은 어떤 위치에 있나 


 

우리는 뛰어난 업적을 이룬 인물의 위인전을 만들어 전파한다. 위인전은 성공을 추구하든 추구하지 않든 구성원 대부분의 필독서가 된다. ‘나도 뛰어난, 혹은 훌륭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 의식적으로든 잠재의식적으로든 형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뛰어나고 혹은 훌륭한 사람이 되고 싶지 않은 사람이 있다면 얼마나 될까? 따라서 악 혹은 악인은 그 대상이 아니다. 아니, ‘반면 교사’다. ‘그렇게 살지 말아야지’라는 교훈을 얻는다. 반면 교사가 있기 때문에 우리는 악 혹은 악인이 되지 않을 수 있다. 훌륭한 위인의 추구와 판단을 본받고, 반면 교사의 추구와 판단을 삶에서 배제하며 산다면 훌륭함에 도달할 수는 없어도 선인의 위치는 유지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생각이 든다. ‘반면 교사를 제대로 활용하고 있나?’, ‘제거할 항목만 늘려 스스로를 옥죄고 있지 않나?’, ‘반면 교사에게 얻은 교훈은 내 삶과 동떨어져 나는 어제와 같은 위치에 있지 않나?’, ‘어차피 악이라면 이용해 먹고 버려도 되지 않나? 아, 이건 악의 태도인가?’라는 혼란에 빠졌다. 그래서 먼저 현대의 악 혹은 악인을 정의해 봤다. 


 

‘나의 기분을 상하게 하고 행복을 제한하는 존재 혹은 행위’라고 우선 쓴다. 내 마음에 상처를 남기는 존재가 있다. 틀린 말은 아닌데 들으면 기분이 나빠 말도 사람도 멀리한다. 이런 상황이 반복되니 그 사람은 내 삶에서 제거해야 할 악 혹은 악인이 된다. 나의 상사는 장마에 비 오듯 일을 지시한다. 현재 일이 어떻게 진행되는지를 물으면서도 일하고 있는 나에게 추가적으로 일을 지시한다. 매일 야근, 철야가 이어진다. 책을 잔뜩 들고 있는 사람에게는 책 위에 연필 한 자루를 올려도 무너진다. 덕분에 건강도 마음도 상했다. 지난달에는 1 주일 간 입원을 했다. 과로로 면역력이 낮아서 뇌 수막염이 왔단다. 잠시 나를 추스르고 복귀한 첫날, 팀장은 ‘이제 괜찮아?’라고 묻는다. ‘어?’ 하는데 팀장은 ‘그럼...’이라고 똑같은 패턴을 반복한다. 그로 인해 내 삶-일의 균형은 깨어진지 오래고 난 다시 입원할 것 같다. 스트레스가 쌓인다. 오래간만에 일찍 퇴근해서는 상사에게 시달리고 있는 사람들끼리 늦게까지 술을 마시며 스트레스를 해소해 본다. 술이 덜 깬 다음 날, 철야를 했다. 야근, 철야, 술의 반복이다. 이번이 과장 진급 시기였는데 통과하지 못했다. 이유는 성과 부족이다. 야근, 철야를 하는데 성과를 못 냈다. 인사팀은 공식적으로 기록된 성과만으로 판단하는 것 같다. 이렇게 해서 나는 언제쯤 과장을 달 수 있을까? 팀장을 계속 따라가야 하나? 아니, 휘둘리고 있어야 하나? 대리에서 과장이 되면 명예도 급여도 상승하니 그간의 고난을 보상받아 미소를 띌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 미끄러졌으니 미소는 온데 간데없다. 상사로 인해 내 추구와 판단이 제한되고 행복이 침해받고 있다. 그 상사는 명백한 악인이다. 자신의 성공을 위해 팀원을 미친 듯이 일로 돌리는 악귀다. 


 

‘그들을 본받자’라는 의도는 아니다 


 

현실이든 극영화든 글 작품이든 악인은 상대적으로 높은 지위에 있다. 누군가에게 지시를 내릴 수 있거나 그룹 전체를 움직인다. 그들은 끼리끼리 모여 커뮤니티를 이루고 커뮤니티의 힘을 활용한다. 현재에 머물러 있다가는 우리 선한 사람들의 핍박과 고난은 영원할 것 같다. 이렇게까지 생각이 들 정도라면 심각한 상황이며, 이 상황을 타개할 시기다. 더구나 생각은 하고 있는데 고난이 지속되고 있다면 고민할 시간도 없어 보인다. 고민은 언제나 ‘시간 소요'라는 이미지를 꼬리표처럼 달고 다닌다. 그러니 미루게 된다. 하루를 미루면 고난은 하루 더 지속된다. 1주일을 미루면 1주일 동안 고난이 지속된다. 살 수가 없다. 미칠 것 같다. 죽여 버리고 싶다.  


 

그런데 먼저 짚고 넘어가고 싶은 부분은, ‘피해자가 선은 아니다’라는 것이다. 당함을 겪는 모든 사람이 선은 아니다. 단지 피해를 입은 사람이다. 따라서 앞으로 피해를 입는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고민에 붙어 있는 ‘시간 소요’라는 꼬리표를 과감히 띄자. 이것이 출발점이다. ‘시간 소요’라는 꼬리표는 사실 고민에만 붙어 있지 않다. 곰곰이 생각해 보자. ‘시간 소요’라는 꼬리표가 붙어 있는, 반드시 해야 할 일을 몇 개 가지고 있나? 그 수가 많을수록 나라는 사람은 ‘효율적인 능률적인 생산적인 방법을 아직 갖지 못한 사람’일 수 있다. 그래서 미룰 수밖에 없는 사람일 수 있다. 어쩌면 상사에게 일 더하기 일 더하기 일 더하기의 과정을 반복적으로 당하는 이유가 이 때문인가? 나의 직장 생활 처음은 어땠지? 선배와 상사의 방법을 보고 따라 했다. 그 방법대로 하면 혼나지 않았다. 상사와 선배들이 이루어내는 성과의 형태를 보고 동일한 형태의 성과를 달성하는 것을 방향성으로 삼았다. 조직에 속했으니 '조직의 질서'에 따라야 함은 당연하다. 그 방법에 익숙해질 무렵, 그 방법이 현실에서 먹히지 않게 됐다. 선배를 다시 보고 상사를 다시 본다. 언뜻 보기에 별다른 점을 발견할 수 없다. 그런데 일을 완료하는 시점이 점점 지연된다. 야근이 철야가 된다.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다. 점심을 거르는 일이 잦아진다. 시간이 없어 이동 중에 혹은 편의점에 서서 라면이나 샌드위치를 먹고는 다시 사무실로 가서 일을 한다. 주말에 늦잠을 자고 머리가 베개에 붙기만 하면 잠을 잤다. 피로는 풀리지 않는다. 간 때문인가 해서 약도 먹는다. 머리는 점점 굳어가는 것 같고, 성과가 나지 않아 조바심이 난다. 


 

악 혹은 악인을 발전의 계기로 삼는다. 상사의 지시가 계속 쌓이기만 할 때 자신의 일하는 방법을 의심한 것까지는 좋은 시작이었다. 그러나 선배와 상사의 방법을 ‘자세히’ 살펴본 후 자신의 일하는 방법을 살펴봐야 했다. 지연 없이 즉시, 당장! 문서 파일명에 version 표시가 0.1에서 시작해서 지금은 2.5인데 결재가 나지 않았다면 늦었지만 중간 결재에서 수정한 항목들을 볼 때다. 다행히 수정 사항을 메모를 했다면 비교해 본다. 수정했는데도 통과되지 않으니 개선할 시기라는 것이다. 원인은 일의 정체를 이해하지 못했고, 수정의 의도를 읽어내지 못했다. 근본적인 원인이라 여기서 방법을 도출하긴 어렵다. 일을 조각내서 까뒤집어 본다. 그로 인해 오늘도 철야다. 그러나 생산적인 철야다. 첫 술에 배부르지 못해도 좋다. 상사가 뿌리는 일 장마를 계기로 자신을 돌아본다. 그래서 개선을 해낸다. 이것이 악인을, 악을 이용하는 방법이다. 반면 교사로 삼고 ‘내가 팀장이 되면 그러지 말아야지'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쟤가 왜 지랄이지?’라는 생각이 들면 자신을 돌아보라. 악 혹은 악인이 가진 장점 혹은 효용성은 여기에 있다. 


 

나에게 발전할 여지가 있나 


 

내 주위 악 혹은 악인은 상사에 국한되지 않는다. 선배 등 윗사람에 국한되지 않는다. ‘친구였나 싶다’라는 생각이 들게 하는 아픈말쟁이 동료, 가끔 툭 던지고 가는 칼 같은 말의 동생 모두 내 발전의 계기를 가져오는 악 혹은 악인이다. 


 

이렇게 쓰다 보니, 이런 생각이 난다. ‘싫은 곳에 답이 있나?’ 항상은 아니더라도, 내용은 옳은 싫은 소리 속에 내가 먹을 떡이 있나 보다. ‘싫은 소리’를 피해만 온 나는 발전할 계기 중 여러 개를 놓친 것 같다. 말의 진위를 파악하는 습관이 있다면 놓치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나에게 ‘싫은 소리’가 들린다는 것은, 내가 발전할 여지가 있다는 것이다. 고맙게도 나를 일깨우는 소리가 들린 것이다. 잔다르크만 신의 소리를 들은 것이 아니다. ‘싫은 소리’라는 못생긴 신의 소리가 나에게 들린 것이다. ‘너는 더 발전할 수 있다'라는 말이 꼴 보기 싫은 모습으로 나타난 것이다.  


 

싫은 소리의 발생은 나의 행동에서 나온다. 내 행동과 태도를 보다 못해 인근의 교류 중인 사람들이 나를 깨우치는 소리다. 그러고 보니 난 어린애였나 보다. 그래서 입에 단 것만 삼켰나 보다. 12년 초 중 고등학교를 다니고 4년 대학을 다니고 3년 직장 생활을 한 지성인이 아니라, 그냥 마음이 성장하지 못한 어른 아이였나 보다. 그래서 충고를 싫다 여겼나 보다. 말의 진위도 모르고 연락을 끊었나 보다. 나타나면 말을 걸까 피했나 보다. 이래서는 악 혹은 악인을 제거만 할 뿐이다. 못된 놈이지 않나? 그러니 이용할 대로 이용해 버려라. 왜 나에게 그런 이야기를 하는지 진위를 파악해라. 어쩌면 이런 과정의 반복이 내 주위에서 악 혹은 악인을 선 혹은 선인으로 바꿀지도 모른다. 세상을 선과 선인으로 채우는 위대한 혹은 훌륭한 일을 일상을 살면서 해낼 수 있을 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상대가 악 혹은 악인이라 말하는 것은 바로 나기 때문이다. ‘저러고도 저 팀장은 집에선 착한 아빠, 자상한 남편이겠지?’라는 악에 받친 말을 하는 내가 악 혹은 악인은 아닌가? 그런 비 생산적이고 스스로에게 절대 도움 되지 못한 판단을 내린 어린애가 바로 나 아니었나? 


 

눈앞에 악 혹은 악인이 등장하면, 이용할 구석이 없는지 살펴보라. 싫은 소리가 들리면 ‘아! 개선할 시기구나!’라고 판단하라. 어떤가? 해 봄직하다 생각이 드는 ‘강요’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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