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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브리엘의오보에 Oct 26. 2017

이 능력자에 대한 우리의 자세

제임스 맨골드/로건

명백히 보통의 인간들과 다른 사람들은 그들만의 세계를 열어야 한다. 그들은 핍박받을 것이므로, 혹은 그들은 가진 재주나 능력으로 이용당할 것이므로, 그들은 별도의 세상을 열고 거기서 모여 살아야 한다.

이신론이 탄생한 배경과는 다르게 필자는 이렇게 상상한다. 이신론은, '신은 이 세상을 창조하고 나서 더 이상 인간 세상에 관여하지 않는다'라는 이론이다. 

신의 동일성(identity)을 어떻게 정의해야 할까? 이 세상과 인간을 창조한 초월적 절대자. 어디에나 존재하는 창조주. 모든 신앙생활과 이기적 종교생활의 중심이 되는 절대자. 만일 이러한 동일성 정의가 사실이라고 가정했을 때, 신은 왜 자신이 만든 세상에 더 이상 관여하지 않을까? 여기엔 어떤 뜻이 있을까?

혹시 신은 자신이 만든 이기적 존재의 등쌀에서 벗어나고자 한 것은 아닐까?

혹자는 신이 인간을 천사보다 낮은 능력의 존재로 만들었다 하고, 혹자는 신이 인간을 신보다 낮은 능력의 존재로 만들었다고 한다. 아마도, 신이 인간에게 준, 세상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능력으로 부여한 것은 생각할 수 있는 지능과 필요한 것을 직접 만들어 낼 수 있는 손이 아닐까? 그러니, 먹을 식량이 있고, 활용할 자재가 있는 이 지구에 인간을 만들어 놓았으니 스스로 알아서 생활해 가라고 하고는, 세상에 더 이상 손을 대지 않는 걸까?

공룡이 그 긴 시간 동안 지구 위에서 군림을 했어도, 어떤 이유에서든 최후를 맞이한 것처럼, 인간도 이 긴 시간 동안 지구 위에서 군림하고 있어도, 언젠가 최후를 맞이할 것을 알고, 이미 그렇게 정했으니 더 이상 관여하지 않고 차세대 지구 위 군림 생물을 준비해 두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것이 아니라면, 이기적 인간의 등쌀에 함께 살기를 포기하고 그들만의 세상을 만들어 거기에만 거하는 것은 아닐까?

우리가 알고 있는 신화는, 그 당시 인간의 이해력에 의해 묘사되어 황당할 뿐, 실제 존재했던, 인간을 초월하는 존재들에 관한 이야기는 아닐까? 그들은, 자신의 능력을 사용해, 사실은 지구 위에 살고 있지만, 인간의 눈에 띄지 않는 '중간계(신의 영역과 인간의 영역 사이)'에 머물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러다가, 인간계에만 존재하는 소재 혹은 자재를 구하러 나왔다가 인간의 눈에 들켜, 인간의 동화나 신화 혹은 전설을 남긴 것은 아닐까?

영화 '로간'은 관객에게 너무 많은 것을 개방한 채 이야기를 시작했다. 불사의 몸인 로간이 다리를 절고, 몸도 잘 못 가누는 상태로 이야기를 시작했으니 말이다. 그를 불사로 만들었던 물질에서 나온 독성 물질로 불사의 몸이 죽어가는 몸으로 변해 있었으니 말이다.

X맨 그룹이 활동할 당시에는, X맨이 보통 인간들과 공생할 수 있던 이유가 있었다. X맨 그룹은 세상을 자신의 방식으로 변화시키려는 무리들과 싸웠다. 그 전쟁의 목적이 보통의 인간들과 통하였으므로, X맨은 보통의 인간과는 차별되는 능력을 가졌더라도 때로는 협력하며, 여전히 차별 당하며 유지되어 올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X맨 집단이란 별도의 세상을, 보통 인간들의 세상 한 켠에 만들고, 세 들어 살 듯 어렵게 어렵게 생활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끊임없이 이기적 보통 인간들에 의해 공격당하고 결국 소멸의 위험이 처했다. 

더구나 이번에 인간은, 핵폭탄이라는, 공멸의 무기보다, 이능력자를 활용해 보다 강력한 군대를 창설하려 했다. 마치, 신무기처럼 이능력자들을 활용하려 했다. 하지만, 생명의 존엄성을 믿는 일부 무리들에 의해, 향후 무기가 될 아이들은, X맨이 존재하던 시절처럼, 탈출이라는 보호를 받는다. 그 탈출의 목적지는, 그들을 이용하려는 나라에서 벗어나, 그들을 받아주는(목적은 모른다) 나라로의 망명이다.

그러나 이 영화의 대미에 나오는 옛날 영화 '쉐인'의 대사는 이 글의 주된 방향성을 잘 보여 준다. 이능력자는 보통의 인간들의 어려움을 해소할 수는 있지만, 그들과 어울릴 수 없으며, 이능력자를 없애거나 이용하려는 무리들로 인해 이능력자가 섞여 살려는 착한 마음의 보통 인간 군에 위험을 초래한다. 언제부터인가, 이능력자는 양날의 검이었다. 마음 착한 보통 사람들을 보호하는 장점을 가진 반면, 주위 어떤 것이라도 활용하여 자신의 이익을 높이려는 무리들의 관심의 대상이 된다. 활용 군의 관심이 바로 이능력자가 보통 인간 군에서 사라져야 할 단점이 된다.

보통의 인간의 이기적인 가치관이 초월적 존재들이 함께 살 수 없는 환경을 조성한 것이다. 그래서, 열심히 사는 사람이 어려울 때 도와줄 존재들이 견디지 못하고 그들만의 세상을 열고 거기서 모여 살거나, 존재감을 숨기고 보통의 인간들 눈에 띄지 않게 섞여 사는 것은 아닐까? 그러나, 핍박받는 무리 속에 섞여 살던 이능력자의 분노 조절 한계가 초과될 때 이능력자는 분연히 일어나 핍박하는 무리를 없애고, 또다시 이런 위험이 발생할까 저어하여 다시 길을 떠나는 것은 아닐까?

판타지란, 기분 좋은 상상이다. 그러나, 판타지 영화나 소설은 결코 기분 좋은 상상이 아니다.
초월적 능력자들이 보통 사람들과 섞여 살며 모두를 복되게 할 기회를 빼앗는 이야기이므로. 

우리는 상기해야 한다. 우리가 기억 못하는 과거의 어느 순간, 올바른 생각을 가지고 그것을 실현하려는 사람들이, 현실의 주도권을 잡은 이들의 불안요소가 되어 축출되었던, 그런 일이 있었음을. 그래서, 언제나 보통의 인간은 어렵게 살 수밖에 없음을. 그러므로 판타지가 기분 좋은 상상은 되지 못한다는 것을.

초월적 능력 소유자를 지키는 것은, 보통의 인간들이라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그들보다 숫자가 많고, 지능을 가지고 있으며, 필요한 것을 만들 손을 가진 보통 사람들이 그들을 지켜야 한다. 초월적 이능력자들의 능력을 우리와 같은 손으로 인식하고, 다를 수밖에 없지만 어울려 사는 것이 우리의 행복을 좀 더 앞당길 수 있는 기회라는 것을 보통 인간들은 인식해야 한다.

기존의 질서를 지키는 것보다, 새로운 것으로 세상을 보다 나은 세상으로 만드는 것보다, 예상치 못했던 변화에 유연하게 대응하는 능력이 후천적으로라도 보통 인간들에게  발생 향상되어야 할 것이다. 자신들을 지켜줄, 그리고 자신들이 지킬 존재들과 어울려 살기 위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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