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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브리엘의오보에 Oct 30. 2017

지속 확인자 vs. 욕심 없는 자

끊이지 않고 확인하는 사람이 있다. "그건 이거 아닌가요?" "맞죠? 그건 이거죠?" 그리고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이 맞으면, 배시시 웃는다. 지속 확인자는 불안하다.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이 맞는지, 그것을 기준으로 판단하고 행동해도 되는지. 여기에 용기를 내도 되는지도 섞여 있다.

인생에 욕심 없는 자가 있다. 
그냥 호기심에 하나 배운다. 그렇게 열정을 가지고 속속들이 배우지 않는다. '아, 그렇구나' 정도 안다. 그 정도가 나에게 맞다는 듯.  
욕심 없는 자는 존재감이 없어 대중들의 시야 안에 존재하는 일이 적다. 그래서 그들은 열정적으로 무엇을 배울 필요가 없다. 자신이 만족하는 만큼 배우고, 자신의 손에 편하게 변형시켜 산다. 그래서 이 방법이 세상의 표준인지, 혹은 정해진 원칙인지 중요하지 않다. 

그런데 이런 욕심 없는 자가 보이는 사람이 있다. 
지속 확인자의 시야에 욕심 없는 자의 이러한 행동은 신경 쓰이는 행동이다. 왜냐하면, 자신이 알고 있는 것과 약간 다른 방법으로 무언가를 하며 만족한 듯 표정을 짓기 때문에. 
지속 확인자는 남들을 불러 확인한다. '이 방법이 맞나요?' 그래서 '어, 좀 특이한 방법이네' 혹은 '보통은 이렇게 안 하는데'라는 말이 들려오면 '그럼 이건 이렇게 하는 것이 맞죠?' 하며 최종 확인에 들어간다.

그 사이 욕심 없는 자의 얼굴은 홍조에 물든다. 자신은 자신이 알면 되는 만큼, 그리고 자신의 손에 편한 방법으로 하고 있는데, 그것이 정답인지 아닌지 확인하는 무대에 타의로 올라가게 된다. 그리고 '올바르지 않은 방법을 사용하는 자'가 되어 무대를 내려오게 된다.

지속 확인자는, 자신의 불안함을 잠재우기 위해, 욕심 없는 자의 평화를 깨뜨릴 때가 있다. 그렇다고 지속 확인자가 밖으로 보인 모든 행동이 '악'한 행동인가 하면 그렇게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욕심 없는 자는 상처를 입는다. 

여기서 욕심 없는 자가 자신이 상처를 입었다고, 지속 확인자가 자신에게 상처를 입혔다고, 이를 응징하겠다고 나서면, 욕심 없는 자에게는, 원래의 행보에서 벗어난 죄로 또 하나의 굴레가 씌워진다. '악의 없이 확인한 자를 악하다 몰아세운 죄.’

이런 일이 있은 후, 욕심 없는 자는 자신의 공간을 더욱 깊이 파고 그곳에 들어간다. 세상의 빛에 닿지 않으려고 더욱 노력한다. 

필자는 지속 확인자를 싫어한다.
지속 확인자가, 불안함에 자신이 알고 있는 사실이 진짜인지 확인하는 습성에는 불만이 없다. 
그러나 타인의 행동에 관여하여, 타인의 방식이 맞는지, 그 분야 전문가가 아닌 대중에게 확인하여, 누군가에게 다른 색을 입히는 행동에는 불만이 있다. 
그들은 자신의 순수한 확인 행동이 누군가에게는 상처를 줄 수 있다는 것을 모른다. 알 필요도 없다. 단지 자신이 사실을, 진실을, 세상의 원칙을 알고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나 간혹, 지속 확인자가 아는 방법이 틀리다고 하는 사람들이 나타날 때가 있다. 이 사람들은 지속 확인자도, 욕심 없는 자도 모른다. 단지 물어보니, 답했을 뿐이다.
욕심 없는 자가 하는 방법이 틀린 것은 아니라고. 지속 확인자가 알고 있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 아니라고.

이렇게 불안감이 상승하면 지속 확인자는 불안함을 잠재우기 위해 미친 듯이 돌아다닌다. 어떻게 해든, 특히 주위의 사람들 입에서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이 진실이라는 대답이 나오게 하려 한다. 별일 아닌 것이 사회 문제로 보이게 된다. 논쟁이 붙는다. 

그러고 시간이 흘러, 지속 확인자의 입에서는 이런 말이 나온다. “거기엔 여러 가지 방법이 있더라고.”

아~
이들도 인간이지. 숨을 쉬고, 자신이 아는 만큼 행하는 인간. 세금을 내고, 먹고 싸고 내일의 아침 해를 맞이하는 인간.
남들이 맞는다고 안심이 되는 습성을 지녔을 뿐이지. 맞는지 확인하는 것이 잘못은 아니니 그 부분은 계속 그냥 두고.
누군가의 기억에 ‘죽여버릴 만큼 철딱서니가 없는 인간’으로 남게 하면 되지. 상처 입히고 용서받고 상처 입히고 용서받고를 반복하게 해서 그들이 누군가에게 상처를 입힐 수 있다는 것을 절대 깨닫지 못하게 해야 할 인간들. 그렇게 순순히 선해 지게 못하게 해야 할 인간들.
왜냐고? 왜 이렇게 밖에 미워할 수 없냐고?
그들은 자신의 행동이 어떤 일을 벌일지 잘 모를 뿐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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