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미노 요루/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
인간 사회 내 대인 관계에는 2 가지 형태가 있다고 정의하겠다.
하나는 Relationship. 무언가 덕지덕지 붙어 끈끈하고 잘 분리되지 못 할 것 같은 뉘앙스. 또 하나는 Interaction. 각자의 역할이 있고 역할을 수행하며 서로 협력과 협업을 반복하는 상큼한 뉘앙스. 모든 관계는 너와 나의 닿음을 형성의 시작으로 한다. 닿음 또한 2 가지 계기로 만들어진다. 하나는 우연, 또 하나는 선택. 우연은 의도하지 않은 마주침이며 선택은 의도적 계획 하에서 일어난다. 선택은 선발의 과정을 거치고, 우연은 끌림의 과정을 거친다.
그녀와 '비밀을 아는 클라스메이트'의 관계는 우연히 보게 된 공병문고(共病; 처가 임신(姙娠) 하며 남편(男便)도 처와 같은 임신(姙娠) 증세(症勢)를 일으키는 병(病)으로 처의 해산(解散)과 함께 치료(治療) 됨), 그리고 둘 사이의 비밀 공유라는 접점에서 출발했다. 이렇게 시작된 관계는 '비밀을 아는 클라스메이트'의 절제한 감정이 일시에 분출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이 둘의 관계 지속과 유지는 선택이라는 과정을 거친다. 시작은 우연히, 진행 과정은 끊임없는 선택의 반복으로 구성된다. 인생이 갖는 결과로서의 모양새는 인간 각자의 선택의 결과이다. 강요에 의한 것일 수 있지만,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시각적 모습들은 내가 그 행동을 하여 만들어진 결과로, 원인에 상관없이 내가 '하기로 해서' 나타난 결말이다. '비밀을 아는 클라스메이트'가 이러한 우연과 선택의 관계를 그만두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그리고 그녀 역시 '비밀을 아는 클라스메이트'에게 끊임없이 선택을 강요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가 이 관계를 지속한 이유는, 스스로 자기완성을 원하는 기존의 습성에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녀의 도발은 기존에 그가 피해 오던 인간관계와는 다른, 즉 받아들일 수 있는 도발이었다. 비록, 고 2 여름의 나이이지만, 두 사람이 이성임이 느껴지는 순간들이 이성 관계만이 주는 텐션을 높였고, 상대에 대한 주목과 집중, 그리고 기다림을 낳았다. 그러나, 이것이 과연 통상적으로 '사랑'이라 확신할 수 있는 상태인가는 의문이다. 그가 그녀에게는 속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상대이기에 관계를 지속했을 것이다. 그녀는 가족 외에는 누구에게도 자신의 병을, 죽는 그 아슬아슬한 순간까지 숨기며 살아가려 결심했다. 그런데 의외의 사건이 생긴 것이다. 비밀이 우연히 노출된다. 시한부 인생이라는, 10대가 받아들이기 힘든(50대라고 받아들이기 쉬울까) 인생 완결의 비정상적인 모양새가 그녀로 하여금 가족 외에 속마음을 나눌 존재로서 그를 선택한 것은 아닐까? 상황의 특수성을 말하고 있다.
절친인 교코는 이런 자신을 보고 매일 눈물을 흘릴 것이므로, 대상에서 제외됐다. '비밀을 아는 클래스메이트'에게는 이일을 계기로 비밀스러운 부분까지 열어 버린다. 우연을 핑계로 절친도 아닌 한 남자를, 자신의 불안과 안타까움과 아쉬움을 토로할 대상으로 삼았다. 생이 끝날 것을 알기에 그녀에게는 망설임이 없었던 지도 모른다. '비밀을 안다'라는 이유로 그와 망설임 없는 탐험을 계속 했는지도 모른다. 지킬 수 있다 약속을 해가며. 게다가, 10대 아이들에게는 나쁜 짓이라 교육되는 행위의 시도. 그런 섣부른 행동도, 최후에는 추억이 되어 버렸다. 그녀의 성격상, 다른 반 아이들을 대하는 태도와 그를 대하는 태도가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숨기지 않아도 좋을 존재, 어쩌면 우리가 한 명 정도 가졌으면 하는 동반자를 이일을 계기로 가지게 됐는지도 모르겠다. 말년의 행운이라 말하면 과한가? 이렇게 추정 투의 말을 지속하는 문제는, 작품을 끝까지 읽은 후에도 그녀의 행동과 선택들이 과연 그녀의 진심이었을까 의심이 들었기 때문이다. 막판에 몰린, 마음속에 여유가 없는 한 인간에게서 일어나는 불안정한 행위들이 아니었을까 의심이 되기 때문이다. 시한부 인생이라는 상황이 낳은, 기존의 상식을 넘는 행동을 하고, 하고 싶은 일들을 할 기회를 '비밀을 아는 클라스메이트'를 통해 그녀는 마음껏 행했는지도 모른다. 스스로 밝히기도 하지만, 그녀는 타인과의 관계를 통해 자신이 완성된다 생각하고 있으므로, 일련의 도전들은 비밀을 아는 클라스메이트가 곁에 남아 있기 때문에 그렇게 행동하기로 선택했는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이 소설은 로맨스 소설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인생의 마지막을 아는 소녀와, 인생의 모양을 결정해 버린 소년의 만남의 이야기뿐일 지도 모른다.
내가 그녀라면 어떤 시간들을 보냈을까? 물론 망설이던 일을 했을 것이다. 이런저런 이유로 미루고, 미루다 시기를 놓쳐 마음속에 던져 놓은 일을 하나씩 꺼내어, 혹은 몇 개를 한꺼번에 꺼내어 이행했을지도 모르겠다. 시한부라는 한계가 생긴 후, 스스로 덮어씌운 한계를 걷어 내고 저지르고 다녔을지도 모른다. 좋아하는 사람에게 서프라이즈 키스를 할 수도 있겠다. 마음에 들지 않는 놈의 엉덩이를 발로 걷어 찰 수도 있겠다.
내가 '비밀을 아는 클라스메이트'라면 어떤 선택을 했을까? 나에게, 첫눈에 반하지도 않은 소녀가 시한부 인생이라는 것을 알고, 그로인해 접점이 생기고, 만나자는 제안을 받았을 때, 스스로 사회로 향하는 문을 닫은 나는 그녀의 곁에 머무르는 일은 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대인 관계를 필요하지 않다 생각한 나는 가족에게 돌아가라는 말만 되풀이하며, 혼자만의 생활을 지켜나갔을지도 모른다. 스스로를 안고 살기에도 버거운 내게, 타인을 끌어안을 공간이 마음속에 남아 있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건조한 생각은 소설 속 이야기를 만들어 내지 못했을 것이다. 시한부 인생에 대한 동정마저 없는, 건조한 남자로 남는 선택을 했을지도 모르겠다. 더구나, '비밀을 아는 클라스메이트'가 이성에 대한 끌림만으로 이 관계를 유지했을 리도 없다고 아직까지 생각하고 있다. 시한부 인생이란 그 슬픈 스토리를 목도하고 있으면서도, 그녀를 향한 슬픔보다는 내가 해온 생활을, 그 마음의 평화를 잃을지 모른다는 긴장감이 늘어 그녀 곁에 머물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가 오열한 마지막의 감정 폭발이 내가 어떤 생각을 갖든 나의 결과가 되지 않았을까? 그녀의 죽음을 대면했으면서도 예의 건조한 마음을 유지하고 있던 그가 마지막, 자신의 감정을 확인한 순간 터져 나온 눈물이 내 것이 아니었을까?
사랑하게 됐지만, 그 감정을 애써 부정한 것도 아니지만, 그가 그녀 곁에 머문 것은, 사랑이라는 감정의,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은 또 다른 외연이지 않을까? 어쩌면 나는 특별한 순간에 자신의 감정을 확인하는 사례들을 기억하지 못한 결과일 수도 있다. 그녀가 죽지 않았다면, 병이 나아 버렸다면, 애인이 아니라 친구가 되어 있었을지도 모른다. 둘이 따로 보낸 시간도 있으니 절친 교코와 비슷한 위치에 설 수도 있을 것이다. 스스로의 마음을 잘 알지 못하는, 스스로의 감정에 익숙하지 않은, 상식과 이성이라 오해란 선입견으로 가득 찬 나이므로, 이런 식의 독서를 하고 있다. 하지만, 나 역시, '비밀을 아는 클라스메이트'와 같은 시기에 감정이 폭발했을 것이란 확신을 숨기지 않겠다. 그리고 신체적인, 농밀한 접촉 없이도 사랑은, 남을 아끼는 마음은 생기고 유지되고 내면에 쌓인다는 사실을 애써 숨기지는 않겠다. 다만, 부러운 것은, 그녀가 남긴 유언을 실천하는, 그것이 자신의 감정에 충실한 것임을 인정하는, '비밀을 아는 클라스메이트'의 태도이다. 물론, 그런 선택을 하기까지 그도 시간이 필요했고, 나였어도 시간이 필요했을 것이다. 적어도 그녀와 '비밀을 아는 클라스메이트'는 공식 연인은 아니었기 때문에, 반드시 해야 할 일 같은 것은 없다. 이런 생각 때문에 '비밀을 아는 클라스메이트'의 선택과 실천을 나는 부러워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지금 이 순간, 공적으로 혹은 사적으로 내가 사랑한다 정의한 사람들이 주위에 있는 대도 불구하고, 나는 그들이 내가 했으면 하는 행동들을 행하지 못하고 있다.
이 소설의 대미는 반전이다. 만일 선입견대로의 결말을 맞이했다면, '비밀을 아는 클라스메이트'가 닫혀 있던 사회를 향한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서는 일은 없었을 것같다. 오히려 자신만의 세계 속에서 누구에게나 생길 수 없는 일을 추억하며 예전의 자기 모습으로 돌아갔을 수도 있겠다. 마지막 그가 보인 감정의 폭발은 애써서 잊고 있던 사회에 대한 그리움, 참여의 욕망, 교류에 대한 바람이 한꺼번에 터져 나온 것일 것이다. 그녀로 인해 자신 안에 존재하지 않는다 스스로 분류하고 정의했던 억눌린 감정과 생각 그리고 바람들이 한꺼번에 터져 나와, 그녀라는 계기를 시작으로 사회 속으로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일 것이다. 나는 반드시 사회로의 복귀가 올바른 삶의 태도라 보진 않는다. 개인의 행복이라는 관점에서는 홀로 사는 삶이 행복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사회적으로 올바른 길로 들어갈 수 있는 이런 계기를 스스로 필요 없다 생각하는 나에게 이러한 계기가 있었으면 한다. 그녀처럼 앉아 있으려는 나를 강제로 일으켜 조금이라도 움직이게 하는 '강요'가 내게도 등장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