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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브리엘의오보에 Apr 21. 2021

무료했던 물, 생기를 준 나그네

Gabriel's Playlist

*커버 이미지: Photo by Steve Halama on Unsplash


삶은 무척 짧다. 노년 인구가 증가하고 인간의 수명이 늘고 있다고 잊을 만하면 들린다. 하지만 이는 상대적인 ‘긴 수명’이다. 그러니 과거에 얽매여 있거나 미래의 불안에 휩쓸릴 새가 없다. 1초 전은 과거고 1초 후는 미래다. 그럼 우리의 현재는 지금밖에 없다. 그 ‘지금’이 물리적으로 어느 정도의 시간인지도 모르겠다. 우리의 현재는 단지 ‘찰라’다. 그렇게 짧다. 현재에 집중한다는 말의 의미는 1초 전에 얽매이지 않고 1초 후에 마음 졸이지 않고 지금 하는 일에 집중한다는 말일 것이다. 시간이란 어쩌면 ‘전에’ 있었던 일을 추억하는데 필요한 지시자일 뿐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집중할 현재를 원래부터 가지고 있지 못했는지 모른다. 그런 허망한 시간 속에서 바람을 가진 이가 있었다.


그가 나타나기 전 그녀는 호랑이를, 물고기를 보길 원하는 갇힌, 잔잔한 물이었다. 그가 나타나면서 창을 두드리고 예고 없이 밥을 먹으러 오면서 파문이 일고 생기가 스며든다. 만나면 헤어지고 헤어지면 만난다는 말은 츠네오를 두고 한 말 만은 아니다. 하지만 그는 생기를 주던 나그네가 되고 만다.


쿠미코, 우리 조제의 다리는 움직이지 않는다. 왜 다리를 움직이지 못하는지 알지 못하는, 그녀를 돌보는 할머니. 영화를 집중해서 보던 관객도, 조제와 오래 지낸 고아원 동기도, 그녀를 돌보던 할머니도, 그녀를 좋아하던 츠네오도 조제의 생각과 사고방식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츠네오는 그녀와 만남을 거듭하면서, 조제가 호랑이를, 물고기를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보고 싶었다는 생각을 알게 된다. 그녀가 말을 하고 나서야 그녀의 생각을 알 수 있었다. 언제나 그렇다. 말을 해야 알 수 있다.


Photo by Gayatri Malhotra on Unsplash


느리고 느린 할머니와의 산책. 사고가 빈발하고, 무엇이 들어 있는지 모를 구루마가 나쁜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해 조제가 칼을 휘두르는 사고가 일어나는 산책. 그 산책은 조제에게 어떤 의미일까? 버린 책을 읽고 두 다리가 멀쩡한 ‘일반인’보다 넓게 사실을 아는 조제. 움직이지 않는 다리로 갇혀 있는 것은 단지 그녀의 육체뿐이었다. 사랑하는 사람, 기꺼이 자신을 위해 호랑이를, 물고기를 함께 보러 갈 수 있는 사람이 나타나길 기다리고 있던 조제. 산책은 간접 경험으로 알게 된 세상과 세상을 이루어내는 사람을 실제 눈으로 보길 원하는 그녀 마음의 표현이다. 세상에 마음대로 참여할 수 없었기 때문에 누군가의 힘을 빌려서라도 세상 속으로 들어가고 싶어 했을까? 산책이란 조제에게 세상 속에 들어가 세상을 경험하는 바람이었을 것이다.


호랑이, 물고기는 조제에게 어떤 의미인가? 또 요리는 그녀에게 어떤 의미 이길래 음식 조리에 열심일까? 조리는 표현이기도 하다. 레시피에 따라 식재료를 다듬고, 익히는 일이 조리가 아니다. 조리에는 다른 의미가 있나? 가족들의 식사를 마련하기 위해서? 바쁘게 하루를 산 그들에게 조리를 통해 밥 먹는 동안이라도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있을 수 있게 기회를 주는 행위, 관심의 표현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모두에게 조금이라도 정신적 여유가 있다면 대화도 가능할 것이다. 할머니와 함께 사는 동안 조제는 할머니와 식사를 하면서 대화를 했을까? 노환으로 행동이 느리고 불편한 할머니, 다리가 움직이지 않아 불편한 조제. 집에 있는 시간이 많은 두 사람의 식사는 대화의 시간이었을까? 그렇게 하루 종일 붙어 있으면 대화는 사라진다. 조제의 생각을 이해하지 못하는데도 대화는 없다. 둘 사이에 나눌 화제가 없기 때문이다. 항상 붙어 있다는 것은 그런 의미다. 결혼 생활이 거듭되면서 대화가 사라지는 부분의 모습이 이렇다. 츠네오가 식사를 같이 할 때 그들은 대화를 했다. 모르는 것이 많던 츠네오의 물음에 답을 하는 정도지만.


Photo by Patrick Jansen on Unsplash


호랑이는 백수의 왕이다. 사자와 싸워도 이길지 모를, 강하고 힘이 센 동물이다. 다리가 움직이지 않는 조제는 자신을 한없이 약하게 느꼈을까? 그래서 백수의 왕인 호랑이가 보고 싶었던 것일까? 약한 자가 강한 자를 보면 힘을 얻던가? 힘찬 모습을 부러워하며 부풀어 오르는 가슴을 대리 만족이라고 불렀던가? 하지만 호랑이를 본 조제는 시큰둥하다. 우리에 갇힌 호랑이. 움직일 공간이라고는 우리 안이 전부. 조제를 보고 으르렁거리는 호랑이에게 ‘자신이 더 이상 왕이 아니다’라는 생각은 없어 보인다. 하지만 조제는 실망에 가까운 표정이다. 커다랗고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고 으르렁거려도 우리에 갇힌 동물일 뿐이다. 책을 많이 읽고 간접 경험이 많은 조제는 집에 갇힌 사람일 뿐이다. 보지 않음만 못했을까? 휴관인줄 모르고 먼 길을 가서 수족관에 도착한 조제. “물고기니까 헤엄쳐 나올 수 있지 않아”라며 짜증을 낸다. 물고기가 둥둥 떠다니는 숙소에서 조제는 물고기가 자신보다 자유로운 생물로 보이지 않는 모양이다. 물고기는 물에서 산다. 물속에 세상을 이루고 산다. 물속을 아무리 유영해도 물을 벗어날 수 없다. 물은 물고기를 가둔다. 누구도 없이 혼자 세상에 나갔을 때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조제의 다른 모습이다.


츠네오와 헤어지기 전 조제는 “우린 또다시 고독해지고.. 모든 것이 다 그래‘라고 말한다. 나에게 없는 것을 가져 부러워보이던 상대도 나에게 있는 것이 없는 결핍을 가지고 있다. 원하는 모든 것을 가진 이도 없지만, 원하는 모든 것을 가질 필요도 없다. 호랑이는 우리에 갇혀 있고, 물고기는 수조에 갇혀 있다. 그 넓은 바다를 보아도 처음에야 반가운 ’우와!‘지 조제에게는 혼자 다가갈 수도 없는 광활한 곳이다. 


츠네오가 권했는데, 조제는 휠체어를 거부했다. 매번 조제의 다리 역할을 하는 일이 처음에는 사랑이라는 감정 뒤에 가려질 수 있지만, 점점 현실로 드러난다. 아마도 츠네오의 권유는 이런 마음이었을 것이다. 츠네오가 떠나고 전동 휠체어를 타고 머리카락을 날리며 달리는 조제는 이제 어떤 마음일까? 츠네오를 잊고 그 대신 전동 휠체어로 세상 속으로 들어간 것일까? 오히려 ‘잊는다’, ‘잊지 못 한다’라는 통속적 생각은 그녀의 것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움직일 수 있는 면적은 좁아도 그녀의 정신은 한도 끝도 없이 뻗어나가니까. 츠네오가 떠나고 세상에 들어갈 방법으로 조제는 전동 휠체어를 고른지도 모른다. 츠네오는 다가와 생기를 준 나그네, 전동 휠체어는 직접 선택한 그녀의 다리.


Photo by Lukas Zischke on Unsplash


삶에 대한 생각이 ‘일반인’보다 깊고 넓은 조제. 마치 앞이 보이지 않는 사람의 청력이 일반인보다 민감한 것에 비유할 수 있을까? 영화를 한 번 더 본다고 해도 화자는 조제를 이해할 수 없을 것 같다. 쿠미코는 이제 움직이지 않는 다리 때문에 갇혀 있는 호랑이나 물고기가 아니다. 여전히 주방 벤치에서 바닥으로 털썩 떨어져 내리겠지만, 그녀는 혼자 장을 볼 수 있는 세상속 사람이 됐다.


https://youtu.be/BDNrUVRMS8I



https://blog.naver.com/gegmagazine2021

#영화 #조제호랑이그리고물고기들 #산책 #자유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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