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욱/아가씨
인간은 변하지 않는다. 그러나 사람은 변한다. ‘나’라는 존재에 대해, 우리는 ‘인간’이라고도 ‘사람’이라고도 부른다. 동일한 것이 아니었단 말인가? 인간은 결코 습관의 변경이나 훈련으로 변하지 않으며, 습관의 변경이나 훈련으로 변화할 수 있는 존재는 사람이라고 나는 생각해 왔다. 인간의 의미를 사전에서 찾으면 ‘사람’이라고 기술되어 있다. 사람의 의미를 사전에서 찾으면, ‘생각하고 언어를 사용하며, 도구를 만들어 쓰고 사회를 이루어 사는 동물’ (다른 동물과의 구분), ‘어떤 지역이나 시기에 태어나거나 살고 있거나 살았던 자’, ‘일정한 자격이나 품격을 갖춘 이, 비슷한 말 인간’, ‘인격에서 드러나는 됨됨이나 성질’이라고 기술되어 있다. 나는 혼란을 겪었다. 나는 왜 ‘인간’은 변할 수 없고 ‘사람’은 변할 수 있다고 생각했을까? 사전적 의미로 보면 같은 의미인데. 사전에 기술된 ‘인간’이란 단어의 예문이 기억에 남아서일까? ‘이 인간이 또 사고를 쳤어’ 혹은 ‘그 인간하고는 상대도 하기 싫다’라는 말들 때문이었을까? 오히려 이런 상황이 되니, 사람은 동물이고 인간은 본성이라 생각한 것 같다.
두 사람이 현실에서 벗어나고자 한다. 한 사람은 5세 정도에 한국으로 넘어와서, 그 넓은 저택을 벗어난 적이 없이 집 안에서 생활했다. 이모의 죽음을 겪었고, 욕망 가득한 이모부의 강권에 음서를 읽는 ‘아가씨’가 됐다. 자의에 의해서 그렇게 갇혀 지냈다 하더라도 갇혀 살고 있음은 점차 자각되고, 자유로움이 무엇인지는 모르나 언제나 반복되는 변화 없는 일상에서 벗어나고픈 갈망은 생기기 마련이다. ‘밖’의 맛을 본 적이 없어도 말이다. 극단적으로, 한쪽 손목에 팔찌를 차고 24시간 생활하다 보면 익숙해지기도 하지만 풀고 싶은 생각이 드는 것과 같을까? 현실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욕망의 출발점은 ‘불편함’ 이다. 불편함을 자각하고, 그것이 커지고, 스스로를 옥죄는 것이다. 옥죄인다는 상황은, 타인에 의해 내가 제한 받는 상황이다. 그러나 나 자신이 타인처럼 나를 옥죌 수도 있다. 스스로 물을 주고 양분을 준 ‘상상’ 때문에. 있지도 않은 코끼리를 눈앞에 놓인 뼈에 살을 붙여가며 상상하는 것이다. 이러한 점증적 상상은 자신의 처지를 더욱 나쁘게 보도록 한다. 그것이 실제 코끼리의 모습일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상상의 힘은 결과가 사실이 아님으로 들어날 때까지는 자기 확신의 양분을 스스로 찾아 빨아올려 성장한다.
자유란 세상에 하나 밖에 없는 보석이 아니다. 자유는 인간과 같다. 편안함과 불편함 사이에 힘없이 서 있다. 인간이 선과 악의 경계에 힘없이 서 있는 것처럼. 어떤 목적이든지, 나는 팔을 머리 위로 있는 힘껏 뻗고 싶다. 그러한 생각 안에 그리고 주변에 내가 어디에 앉아 있는지, 내가 어떤 상황에 놓여 있는지에 대한 생각은 포함되어 있지 않다. 그리고 팔을 뻗는 것이 죄인가? 잘못인가? 만약 팔을 앞이나 옆으로 뻗는다면, 내가 처한 상황을 굳이 파악하지 않더라도 남에게 닿아 불편을 초래할 수 있다고 생각이 들 것이다. 그러나 위로 뻗는 것이다. 인간의 머리 위에 있는 것은 비행기, 파리, 그리고 공기로 채워진 빈 공간뿐이다. 그렇게 스스로의 의지를 선한 것으로 상상하고 그 상상은 커질 대로 커져 사실이 된다. 그래서 팔을 뻗었다.
“... 질문이 있으신가요?”
난 강연 회장 청중석에 앉아 있었고, 연단과 그리 멀지 않아 행동이 강연자에게 잘 보이는 위치다. 연사의 말에 내 앞과 좌측 옆의 청중은 날 쳐다보게 됐다. 내 뒤와 우측에 가까이 있던 사람들이 먼저 나를 의식하게 됐다.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이것은 자유가 아니다. 이것은 연사의 강연을 중단시킨 침해이다. 나의 불편함을 해소하기 위해 한 행동이 남에게 불편을 끼쳤다.
나의 의지로 할 수 있는 것은, 타인에 의해 허용된 공간 내에서 정해진 행동을 하는 것뿐이다. 이것은 불편이다. 나는 나의 의지로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을 하고 싶다. 이것은 자유에 대한 갈망이다. 그리고 나는 내가 자유를 행사함에 있어서 타인에게 불편을 끼치지 않으려 한다. 이것이 진정한 자유이다. 그러나 내가 이러한 진정한 자유를 행사하려 하니 반대하는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은 나의 행동을 막음으로써 이익을 얻는 사람이다. 그는 내가 자신이 정한 조건 내에서 행동할 때 이점을 얻을 수 있다. 즉, 나의 자유가 그에게는 불편이다. 양측의 대결이 시작된다. 나는 진정한 자유를 쟁취하기 위해, 그리고 그는 자신의 이점 획득을 지속하기 위해. 우리는 관객이다. 누구를 응원하고 싶은가? 단순히 이점을 획득하기 위해 남의 진정한 자유를 막으면 안 된다는 이유만으로 나를 응원할 것인가? 아니면, 자유에 대한 갈망으로 누군가에게 손해를 입히면 안 된다고, 지금까지 잘 해왔지 않느냐고 라며 그를 응원할 것인가?
형이하학적인 신체적 불편이 형이상학적인 자유를 꿈꾸게 한다. 좋아하는 존재가 생기면 언제나 곁에 두고 싶어진다. 그러나 타인에 의해 그것이 제한되면 불편하다. 그래서 그 불편함을 편안함으로 바꾸고자 한다. 즉, 자유를 얻고자 한다. 자유를 얻었다는 인식을 갖게 되면, 호흡을 크게 한 번 하여 눌린 가슴을 넓힌다. 그러고 얻은 자유를 통해 조금씩, 옥죄이며 습관이 된 부분을 하나 둘 고쳐 나간다. 새로운 방식을 시도하면서 삶과 생활의 방법을 변경하고, 생각을 변경하고, 가치관을 변경하려 노력한다.
이 영화는 반전에 반전을 거듭해 머릿속에 불꽃을 펑펑 터트려 주는 스릴러는 아니다. 그러나 드라마 ‘동이’와 같이 결과를 먼저 보여주고 나서 과정을 보여준다. 마치 살인 사건이 일어나고 그 과정을 탐정을 통해 다시 보여줘 관객의 이해를 완결시키는 방식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방식의 영화 ‘아가씨’가 전하려는 것은 무엇일까? 탈출을 위한 관계 구축에 필요한 동성애라는 협업 형성 과정, 뛰어난 미학적 미장센의 추구,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긴장감, 신인 여배우의 훌륭한 연기와 기성 배우의 능숙한 연기, 혹은 일제 강점기 우리 민족이 겪은 옥죄임과 부자유의 삶을 은유한 듯한 ‘아가씨’라는 존재, 그 삶에서 빚어진, 개인적 욕망 추구의 말로, 바람직하지 않은 부의 추구가 주는 허망한 결말. 이렇게 생각되는 스토리를 통해 무엇을 생각하게 하려했을까? 만일 의도한 바가 있다면, 그 내용이 과연 우리의 어떤 삶의 부분에 필요한 것일까? 만일, ‘자유’에 대해 무언가를 생각할 계기를 던지는 것이 의도한 내용 중 하나라면 나에게는 성공한 것 같다.
어떤 존재가 혹은 어떤 조직이 나머지 대다수의 행동과 생각을 제한하고 제어하려는 환경에서 나에게 선택권이 없다. 그 누구도 나의 행동과 생각을 제한하거나 제어하려 하지 않는 환경에서 나에게 선택권이 있다. 이것이 개인에게 ‘자유’가 존재하는지 여부를 가늠할 기준이 된다. 그리고 ‘자유’의 베스트 프렌드 Best Friend는 ‘책임’이다. 내가 가진 선택권이란 자유를 행사한 후 벌어지는 모든 결과에 대해 크던 적던 책임을 져야 한다. 그것이 당연하다고 인식하고 기억하고 언제나 상기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다. 혹자는 이러한 행위를 ‘나쁘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본성인 것을. 왜 행복을 위해 성공을 위해 앞으로 나아가는가? 행복과 성공은 달기 때문이다. 이것을 달성하면 달고 저것에 이르면 쓰다. 당연히 선택은 닷 것이다. 자유는 달고 책임은 쓰다. 그래서 자유는 헌법까지 들먹이며 행사하려 하고, 책임은 온갖 변명과 이유를 대며 피하려고 한다. 아가씨는 자신의 자유를 찾기 위해 선택한 모든 행동의 결과에 대해 받아들일 것인가? 만일 그것이 성공했다면, 이점 획득의 대가로 선택한 모든 행동의 결과에 대해 받아들일 것인가?
아! 자유의 또 하나의 베스트 프렌드가 있었다. 내가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것이다. 도와주고 협력하는 이들은 있어도, 결정은 내가 하는 것이다. 부모의 설득에 못 이겨 결혼한다는 ‘결정’을 한 것은 바로 자신이라는 의미다. 인간은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참지 못한다. 그래서 ‘운명’과 ‘신의 섭리’를 내세운다. 이해하지 못하니 원인으로 ‘신’을 떠올린다. 나의 선택권이 혜택을 보는 사람의 수는 적더라도, 내가 속한 세계에서 상식과 매너를 포함한 모든 사회적 규칙 하에서 ‘옳은 것’이라면 책임은 경감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책임은 무겁다. 그러므로 내가 속한 세계에서의 선이 무엇인지 파악하는 것이 자유를 행사하기 전에 해야 할 준비다. 우리가 속한 세상에서 선과 악을 구별하는 기준은, 나의 선택이 타인에게 폐가 되는가 이다. 타인의 불편함을 이해하지도 사전에 상정하지도 못한다면, 그러고도 자신은 결코 나쁘지 않다고 주장하는 것은 어리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