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채식주의자
아무도 날 이해 못해... 의사도, 간호사도, 다 똑같아.. 이해하려고 하지도 않으면서... 약만 주고, 주사를 찌르는 거지(190 p)
문제는 동일해 보여도 원인은 다르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원인을 알아야 하는데, 문제의 양상만 보고 동일한 처방을 내린다. 그리고 언제나 ‘최선을 다했습니다만... 유감입니다’를 되풀이 한다.
세상 사람들은 편하게 사는 방법을 찾는데 귀신들이다. 첫째는 분류하기. 이런 특징은 A 그룹, 저런 특징은 B 그룹. 만나는 존재나 현상을 시각적으로 감지하고 이런 특징을 가지면 A 그룹으로 인식하고, 저런 특징을 가지면 B 그룹으로 인식하고 확정한다. 빠르게 변화하고, 밀려는 수많은 일을 제시간에 처리하고자 할 때 삶의 능률을 올리는 방법 중 하나가 빠른 분류이다. 우리는 솔루션을 맹신한다. 따라서 A 그룹용 솔루션이 있고 B 그룹용 솔루션이 있다. 더욱 나쁜 상황은, 솔루션이 듣지 않으면 이를 책임질 사람을 찾는다. 결코 원인을 분석하는, 시간이 오래 걸리고 귀찮은 원론적 접근법은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이 효율적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솔루션이 맞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어떤 방법을 써서든 이를 해결하고, ‘결과가 좋으면 됐잖아. 반성과 피드백이 왠말!’이라고 한다. 그러다 보니 정상과 비정상을 나누는 과정도 순식간에 일어난다. 가족도 이 분류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저녁이면 피곤한 몸에 대화도 귀찮은 하루하루. 아니, 귀찮음을 느끼기도 전에 남자든 여자든 자신만의 휴식용 굴로 들어가는 요즘, 문제아 A가 오늘은 말썽을 부리지 않았길 신께 기원하며 돌아온 현관에서 ‘이런!’ 안 좋은 아우라를 느낀다. 어지러진 실내를 치우고 힘껏 째려 본 후 씻고 잔다.
얼마 전 아내와 함께 아이 교육을 잠시 이야기 한 적이 있다. 우리 부부가 주목한 것은, 생각하는 습관, 깨달았을 때 행동으로 옮기는 실천력이다. 현상을 제대로 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 제대로가 무엇인지, 그것대로 행동했을 때의 주변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우리 아이야 판단할 수 있게 도와주고 싶었다. 비록 우리는 아직도 이런 과정에 익숙하지 않지만. 그래서 우리가 살면서 깨달은 것만이라도 아이에게 알려줄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라고 한 동안 주거니 받거니 대화를 했다. 16년의 혹은 18년의 ‘교육’ 시스템 속에서 우왕좌왕을 하며 사는 우리들이 우리 부부가 생각한 이런 교육을 받은 경우는 몇 번이나 있나? 그 횟수나 내용이 적고 많음을 이야기 하자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제대로 보고 판단하여 앞으로 나아가는 방법을 어떻게 하면 알려 줄 수 있을까 하는 것이, 10대 아이를 둔 부모로써 가지게 된 걱정이다.
우리의 부모는 해방을 겪고, 내전을 겪고, 경제발전 5개년 계획과 새마을 운동을 겪었다. 대부분 전업주부가 지배하는 가정에서 우리는 성장했다. 전업주부는 또한 당시에는 해체되지 않은 대가족 시스템에서 구성원으로서 생활을 하면서, 아침을 준비하고 잠시 쉬고 점심을 준비하고 잠시 쉬고 저녁을 준비하고 쉬는 사이사이마다 빨래와 청소를 한 후 하루를 마감했다. 아이들 숙제도 돕와야 했고 문제가 생기면 학교로 뛰어가기도 했다. 그 누구도 소위 ‘교양’이라는 교육은 받아본 기억이 없을 것이다. 집안의 내력이나 뼈대의 굵기와 무관하게 그러한 교육을 받은 사람들은 그 바쁜 시대 속에서도 빛을 냈다.
‘채식주의자’, ‘몽고반점’, 그리고 ‘나무 불꽃’은 커다란 사건을 겪고도 깨닫지 못하는 이들과, 깨닫는 것보다 자신의 과거와 현재를 이리저리 짜 맞춰 생각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라고 읽었다. 왜 갑자기 진저리 치도록 고기가 싫어졌는지 ‘가족’이 물어보고 조곤조곤 이야기를 나누었다면. 혼자서 대응하기 어려울 수 있으니, 그 많다는 박사들과 같이 상의를 했다면, 과연 성질이 불같은 아버지에게 뺨을 맞고 고기가 입에 쑤셔 넣어지고 결국 식칼로 자신의 손목을 긋고, 정신 병원으로 향하는 비극은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고기가 몸에 좋은 것은 알고 있다. 하지만 그녀의 가족들은 그녀가 왜 고기를 먹지 않게 되었는지 이해해 보려고 시도하지 않았다. 현상을 눈으로 보고 상식(?)에 맞춰 그녀에게 ‘고기를 먹어야 하니 먹어’라고 말하며, 성격이 급한 ‘가장’이 그렇게 손을 아무렇게나 휘두른 것이다. 성숙 되지 못한 현실 대응을 하는 아버지, 어머니, 남동생과 그 부인, 그 틈에 예술 혼을 불태운 형부와 나무 같은 언니, 그리고 내가 편해서 결혼한 남편으로 인해 순식간에 비정상적 인간이 되어 어린 시절의 몰이해를 반복해서 경험한 나.
소설을 읽으며 생각한 것은, 육체적 제재보다 더 무서운 것이 언어폭력이다. 휘두르는 사람이 ‘자기 할 말을 한 것이고, 뭐가 잘못 된 곳이 있냐?’는 그 말의 폭력성 말이다. 우리는 법의 기반 위에 철인정치의 그것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그 법에는 육체적 폭력을 제어하는 법은 제정되어 성문화 되어 있지만, 마음에 부상을 남기는 언어폭력에 대해서는 ‘명예 회손’이라는 얄팍한 내용만을 성문화 하고 있다. 아마도 우리의 법을 제정한 그들은, 언어폭력을 겪지 않았거나 가해자가 아닐까 생각될 정도로, 법에서의 언어폭력은 관심에서 배제되어 있다. 우리가 일상에서 괴로움을 경험하고, 심하면 자살을 생각하게 만드는 언어폭력은 초중고교 및 대학 교육을 거치며 훈련되고 사회생활을 하면서 정련된다. 우리는 소셜 미디어를 통해 다양한 삶의 모습을 경험한다. 때로는 ‘좋아요’를 클릭하지만 때로는 ‘싫어요’를 클릭하고 싶은 다양한 삶의 모습을 보게 된다. 80억 사람들이 사는 지구에는, 한 나라의 경계선 안에도 인구 수만큼의 삶의 모습이 존재한다. 그 모습 중 상식 밖의 생활 모습에 대한 심층적인 이해력은 부족한 모양이다. 이해가 안 되는 현상을 내 가족이 보이고 있으면 당황한다. 당황하니까 원인을 이해하려 하기보다, 가족 외 사람들에게 어떻게 분류될 지 걱정한다. 그리고 “너의 현재 행동은 이상하니 고쳐!”라고 윽박지른다. 더 가슴 아픈 것은 이해할 수 있는 사람들의 수가 언제나 소수라는 점이다. 민주주의 사회의 다수결의 원칙은 이럴 때 쥐약이다.
하다못해, 소설 속 상황과 다르게, 가족들에게 채식주의자의 생활상이 자주 전달됐다면 그녀는 고난을 면했을 지도 모른다. 즐겨보는 예능에서 ‘채식주의자를 인정하자’고 했다면 그랬을지도 모른다.
*이미지는 여기서: Photo by Josh Applegate on Unspla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