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확실성에의 대응

by 가브리엘의오보에

*커버 이미지: Photo by Jon Tyson on Unsplash


우리는 1초 앞도 예측할 수 없는 존재라고 한다. 우리 앞에는 언제나 해결해야 할 과제가 등장한다. 이 과제를 성공적으로 처리할 수 있을까? 결과의 불확실성만큼 발목을 잡는 생각도 없다.


어려운 과제는 할 수밖에 없는 과제와 할 수 있을 것 같은 과제로 분류할 수 있다. 할 수밖에 없는 과제는 무슨 일이 있어도 해야 할 일이다. 억지춘향이 따로 없다. 할 수 있을 것 같은 과제는 의욕과 힘을 주지만, 눈 아래 숨은 함정을 가린다. 불확실성과 눈 뜬 장님, 결과를 알 수 없다. 만일 신을 믿는다면 어떨까? 제물을 바치고 자신들의 안녕과 성공을 지켜 달라 기도할 것이다. 신은 불확실성을 확실성으로, 보지 못한 함정을 보이게 해주는 열쇠라 여겨진다.


만일, 신을 믿지 않는다면, 불확실성과 눈 뜬 장님의 장애를 해결할 방법은 무엇일까? 핵심적인 정보를 지속적으로 확보하고, 영향력이 큰 가능성에 대응할 도구를 과학적으로 마련하는 것이다. 이런 인간의 힘이 신을 능가할 수 있을까? 우리는 비교할 수 없다. 중요한 점은 신에 기대는 것과 정보 및 과학(도구)를 고안하는 것을 비교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점은 불확실성의 제거이다. 눈 뜬 장님의 상태도 불확실성으로 묶어 생각해 보자.


제갈량은 실존 인물이라고 생각한다. 정사 삼국지에 기록된 바가 있으니 실존했을 것이다. 삼국연의에서 묘사된 대로의 역량이 있었는지 확실하지 않다. 하지만 삼국연의를 논하더라도, 제갈량이 신에 의지에 기도와 의식을 통해 전쟁에 승리한 장면은 없다. 적벽대전의 바람을 부른 것도 천기를 보는 ‘기술’이 있어서다. 관우에게 북이 한 번 울리면 적을 치고 장비에게 화포가 한 번 울리면 공격하라고 지시를 할 때 그에게는 정보에 기반한 전략이 있었다. 지리적 상황, 적과 아군의 상황, 천기(날씨와 기후 변화)에 대한 해석 능력이 지시 받은 이를 놀라게 한 것이다.


제갈량의 묘사가 소설 속 등장인물이므로, 이 이야기에서 언급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하나? 그렇다면 투자의 귀재 워렌 버핏은 어떤 가? 그는 매일 기도하고 신이 투자처를 알려주길 기다리는 사람인가? 라듐을 발견한 퀴리 부인은 어떤 가? 상대성 이론은 아인슈타인이 목욕하고 백일 만에 받은 신의 알림인가? 이런 사례가 적절하지 않다면, 쟌다르크는 어떤 가? 그녀는 신의 전략으로 승리를 거두었나? 천사를 통해 전해진 군사의 배치, 공격 지점과 공격 방법, 협공과 방어 모두 신의 상세한 가이드대로 움직인 것인가?


제자백가의 등장은 신에게 의지하던 인간이 스스로 삶을 살아가는 방법을 깨우치려는 노력의 일환일 것이다. 제자백가의 이론 혹은 의견 혹은 철학은 정보를 수집하고 이를 검토한 일종의 통계, 일종의 사고, 일종의 분석이지 않았을까? 2천 년 이상 믿는 사람이 끊이지 않는 그들의 철학은 종교로 화했다. 유학은 유교로, 석가는 불교로 화했다. 물론, 국가의 존망에 영향을 미치는 전쟁에 대한 철학, 손가의 병법과 묵가의 방어책은 종교로 변하지 않았다. 아마도 전쟁 혹은 무는 상서롭지 않은 것이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제자백가 등장의 이면에는, ‘모든 인간이 이들과 같이 삶에 대한 철학을 세울 수 없다’는 사실이 존재한다. 결국, 대부분의 사람이 불확실성을 마음에서 몰아내는 방법은 신의 존재와 영능을 믿는 것인가? 사후세계의 심판을 기준으로 죄악 없는 삶을 사는 것인가?


과학이 자연의 진실을 밝혀 내기 전에, 비가 왜 오는지, 홍수는 왜 일어나는지, 지진은 왜 일어나는지 알 수 없었다. 식량을 수집 채집하기 위해 집을 나섰을 때 맹수를 만나지 않길 바랐지만 알 수 없었다. 하늘에서 번개가 내려 산이 불타고 땅이 파이는 이유는 알 수 없었다. 모든 자연 현상, 인간 사이의 갈등과 사고, 자연과 인간 사이의 사건, 더욱이 인간의 생로병사는 마련된 것이고, 누군가 설계를 할 것이라는 생각이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생각이 절대자를 만들고 절대자의 의지가 세상의 질서가 됐을 것이다. 뛰어난 인물의 탄생은 절대자가 세상에 던진 하나의 사건으로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초월적 영능에 고개 숙이지 않을 이유는 없다. 인간이든 동물이든 신에게 요청을 올리기 위해 바치지 못할 것이 없다. 더구나 한곳에 정착해 농사를 지을 때도, 초원을 찾아 방목을 할 때도 신에게 지켜주십사 기도를 했을 것이다. 지역에 따라 세상의 사건은 여러 신이 나누어 담당한다고도 생각했을 것이다. 하늘의 제우스, 바다의 포세이돈, 지하의 하데스가 그렇게 생겼을 것이다.


파악할 수 없는 사안에 초월적 존재를 대입하면 바로 설명이 됐다. 그리고 초월적 존재가 왜 그렇게 했는지는 신만이 아는 문제니 인간은 알 수 없는 것이 당연하다. 간혹 제사장이 풀이해 주기도 한다. 갑골로 미래를 예측하거나, 별의 움직임으로 특정인의 운명, 사건의 결말을 알아내는 제사장 혹은 사제는 지배자의 결정을 좌우할 힘을 가졌다. 그런데 여기서 갑골, 천문 등은 통계의 냄새가 난다. 별이 이렇게 움직일 때 ‘거의 대부분’ 이런 일이 일어난다, 갑골이 이렇게 쪼개지거나 갈라지면 이런 의미다라는 말은, 평균과 빈도가 아닐까? 그렇다면 이는 인간의 지혜이지 않을까?


화자는 종교 활동과 신앙 생활은 다른 의미라고 이해한다. 신앙 생활은 신의 말씀대로 생활하는 것이다. 신이 교회를 지어 11조를 내라고 율법을 내린 적은 없다. 이는 제물을 받치던 샤머니즘적 활동이다. 세상 여러 곳에서 묘사되는 신이 공통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이타주의다. ‘사랑하라’가 모든 종교의 공통적 철학이다. 그런 신의 말씀대로 생활하는 것이 신앙 생활이라고 이해한다.


신앙 생활은 자기 관리이자 명상이다. 신이라는 매개가 존재하고, 신에게 모든 결과를 맡기고 (“신의 뜻대로”) 나는 최선을 다하는 생활이다. 흔들리는 마음을 진정하는 명상과도 통한다. 그래서 신앙 생활이 허황된 활동이라고 이야기한 것이 아니다. 그리고 인간의 지혜를 잇고 발전시키는 것이 미래의 불확실성을 줄이는 좋은 방법이 되니 모두 인정하는 태도를 갖자는 말이다. 그런 의미를 이렇게 길게 이야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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