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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브리엘의오보에 Feb 22. 2018

도시의 소모, 시골의 충전

한국영화 '리틀 포레스트'를 보고

도시는 어느새 소모의 장소가 됐다. 맑은 물과 공기를 가진, 그래서 건강한 식재료를 직접 재배하고 수확하며 건강하게 조리해 먹을 수 있는 ‘시골’은 충전의 장소가 됐다.


‘리틀 포레스트’와의 인연은 짧지 않다. 느티나무 도서관에서 처음 만난, 2 권짜리 만화책이 첫 만남이다. 덕분에 귀농이 아니라 시골에서 먹을 것을 재배하며 사는 삶을 진지하게 생각했다. 지금도 그 생각은 버리지 않았다. 어쩌면 시기를 보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다음이 일본 영화와의 만남이다. 원작의 캐릭터보다, 강렬하다면 강렬한 영화 속 ‘그녀’ 캐릭터의 첫인상에 살짝 주눅이 든 것은 사실이었다고 고백하겠다. 그 큰 눈과 생각보다 큰 키에 놀란 탓일 것이다. 내가 놀랐다고 하여 누군가 잘못을 한 것은 아니다. 그냥 내가 놀란 것이다.


좋아한 만화가 애니메이션화 되길 기다리다 본다. 그것은 ‘움직임’ 때문이다. 작화가 스토리에 활기를 불어넣어준다. ‘움직임’에는 두 가지가 있다. 캐릭터의 움직임과 주위 환경의 움직임. 영화의 그것은 만화의 작화보다 활기의 정도가 진하고 강렬하다. 그래서 만화가, 혹은 라이트 노벨이나 소설이 ‘움직이게’ 되면 본다. 더 진하고 강렬한 활기를 느껴보고 싶어 한다. 거기에 신선한 변화까지 있을 경우 그 작품은 반복해서 다시 보게 되는 작품이 된다.


이런 나이기에, 일본 영화 ‘리틀 포레스트’는 상영 예정이 알려졌을 때 고대하는 영화가 됐다. 이 시기까지의 ‘리틀 포레스트’를 볼 때, 시골에 살게 된 계기나 주인공 내면의 많은 생각에는 눈길이 가지 않았다. 자연 속에 융화된 시골의 모습, 패치카, 주방의 간결함, 조리 과정에 마음과 시선을 집중했다. 굳이 쿡방, 먹방을 즐겨봤기 때문이라고 변명하지 않겠다. 다만, 그런 환경을 필요로 하고 관심이 있다는 것을 자각하지 못하다가 일본 영화의 움직임에 자각하게 된 것이다 라는 것이 사실일 것이다.


한국 영화는 리틀 포레스트와의 세 번째 만남이다. 한국영화는 주인공이 왜 시골집에 돌아오게 됐는지, 그리고 엄마에 대한 주인공의 생각이 전체 이야기의 출발점이다. 


도시는 어느새 소모의 장소가 됐고, 시골은 충전의 장소가 됐다. 계기가 명확해 짐에 따라 주인공의 내면에 더 눈이 갔다. 쉬어버린 도시락, 썩고 있는 양파, 진상의 향연 등 도시는 필요 이상으로 우리를 소모시켰다. 말도 없이 사라진 엄마도 원망스럽다. 업마가 사라지니 소모되어 힘이 없을 때 안주할 공간이 없어져 버렸다. 정성 들여 싼 도시락에 어리광 부리는 남자 친구도 결코 안주할 수 없다. 돌아온 시골집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엄마의 사라짐이 더 원망스러워졌다. 그 헤어짐이 더 이해가 가지 않는다.

 

그런 그녀에게 어린 시절 친구가 다가왔다. 친족이 부족하면 친구가 풍족해지는 것인가? 

친구니까 도울 수 있고 친구니까 기대듯 소리 지를 수 있는 것이다. 덕분에 내면의 고민에 빠질 시간이 없다. 친구들의 질문들이 발걸음을 앞으로 나아가게 한다. 자신의 내면으로 빠져들지 못하게 한다. 억수로 쏟아지는 비 속을 뚫고 강아지를 돌볼 정도로 인간다워졌다.


만화 원작, 일본 영화, 그리고 한국 영화, 이 각각의 만남에서 내가 느낀 점은 이렇게 모두 달랐고, 주목한 부분도 모두 달랐다. 행운이다. 만화 원작에서는 ‘레시피’를 스마트폰으로 촬영했다. 일본 영화에서는 시골과 집 안에 집중했다. 한국 영화를 볼 때는 주인공에 집중했고, 현지화된 음식(특히 떡볶이와 아카시아 꽃 튀김)에 집중했다. 동일한 스토리라인과 동일한 캐릭터가 만화, 일본 영화, 한국 영화에서 매번 새로운 옷을 입고 나오며, 그 스타일에 만족감을 느꼈으니 웃으며 극장을 벗어날 수 있었다.


만화 원작의 여 주인공 캐릭터, 일본 영화 여 주인공 배우, 그리고 한국 영화 여 주인공 배우는 모두 다르게 주인공을 표현하고 있다. 만화 원작의 캐릭터는 시골 물이 담뿍 든 사람이 읍내 생활을 하다 돌아온 존재였다. 일본 영화 여 주인공은, 도시 물이 담뿍 든 사람이 시골로 돌아온 존재였다. 한국 영화 여 주인공은 ‘한’ 사람이 도시의 변두리와 시골의 집 모두 생활해 본 경험자다. 이렇게 색깔이 다르니까 이야기의 색깔도 달라진 모양이다. 같은 스토리에 강조점이 다르니 '다른' 이야기로 느낀 모양이다.


한국 영화 주인공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도시에서 소모시키고도 모자라 배를 주리던 사람이라는 것이 명확하게 그려졌다. 시골집으로 돌아와 화가 난 듯 주위와 부딪힐 정도로 도시 생활의 영향력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했다. 그 후 1년 동안 화난 얼굴은 웃는 낯으로, 자신 마음속에 갇힌 시선은 주위 사람으로 옮겨졌다. 서울 말로는 ‘주변머리가 넓어진’ 것이고, 어르신 표현으로는 ‘널픈수(?)’가 생긴 것이다. 


조리와 재배가 과연 소모된 인간을 재 충전할 수 있을까 의문을 가져본다. 


동양 철학에서 인간 생명의 원천은 ‘기’다. ‘기’는 호흡을 통해, 그리고 섭식을 통해 보충된다. 4 계절을 하나의 과정으로 하여 반복적으로 진행되는 농사일에 집중하게 됨으로써, 직장-숙소를 반복해 ‘기’를 호흡할 수 없던 자신을 변화시켰다. ‘돈’이 없으면 식사를 할 수 없는 도시 속 자신에서, 주변 사람들의 도움으로 씨앗을 받아 직접 재배하고 그것을 먹는 시골 속 자신으로 변화했다. 조리 기술을 가진 덕에 그리고 무언가를 재배할 수 있었기에, 그것의 결과물인 음식을 건강하게 먹을 수 있었다. 결국, 단순하게 ‘조리와 재배가 과연 인간을 재 충전할 수 있을까’라는 의문으로 이 작품을 정리할 수는 없겠다. 


모든 것이 인위적인 도시는, 인간이 만들어 모든 것이 불완전하므로, 그 속에서 살려는 인간은 필요 이상으로 자신을 소모시킬 수밖에 없다. 시골은 인위적 환경이 아닌 자연이 지배하는 공간이다. 자연은 주기 반복적 특성을 가진다. 간혹 예전과 다른 모습을 보이긴 하지만 미리 힌트를 준다. 그런 환경에서 인간은 자신을 소모시키지 않고 자연의 질서 속에 녹아들어가려고 노력한다. 바로 충전과 사용의 반복적 선순환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만화 원작과 일본 영화에서 구체적으로 느끼지 못한 부분이 바로 이 부분이다. 그래서 다시 만나 보려 한다. 느티나무 도서관에서  만화 원작을, VOD 서비스에서 일본 영화를 다시 볼 생각이다. 그래서 한국 영화가 명확하게 ‘보여준(사실 내가 못 본 것일 것이다)’ 부분을 원작과 일본 영화에서 찾아보려 한다. 드디어, 몇 번이고 반복해서 보는 작품을 하나 더 갖게 됐다.


*표지 이미지는 여기서: Photo by Alex Read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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