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선의 고점

[32] 이직러의 하루하루

by 미친꿈


( 내용과 무관한 사진 / 손님 가방 위에 올라간 카페 고양이 )

외주처에게 전달할 작업물에는 자료가 들어가는데, 이 자료는 단순한 줄글처럼 보여도 사실에 근거해야 한다. 더군다나 마지막엔 국가 기관이 이 작업물을 검수하므로 사실에 근거함은 굉장히 중요하다. 그래서 자료를 구하기 전에 내가 담당한 작업물을 맡은 외주처 직원에게 연락해 자료 구성을 어떻게 하면 좋을지 여쭈어보려 했다. 이미 한 달 전부터 팀장이 내가 담당한 원고에 자료 고증이 필요하다고 직접 적어 보여주셨고, 선임도 그 외주처 직원에게 자료에 관해 물어보라고 하셨다.


그래서 이번 주 월요일, 자료로 구성하면 좋을 만한 참고 자료를 여러 개를 넣은 파일을 만들었다. 필요한 최종 자료는 12개이고, 필수 자료 1개당 (내가 직접 찾은) 참고 자료 5개씩 넣어 총 60개의 자료가 포함된 파일이었다. 그런데 그 외주처 직원은 그 60개 참고 자료 중에서 12개 정도만 남도록 나머지 자료는 다 삭제한 채로 다시 파일을 내게 보내주셨다. 그분이 남긴 자료들도 기존 작업물에 이미 들어가 있었던 것이라서 익숙한 자료들로 대충 고르신 듯한 느낌을 받았다. 내가 알기로는 팀장은 고증이 필요하다는 입장이신 것 같았는데, 그 외주처 직원은 그냥 겉보기에 보기 좋은 자료를 남긴 듯 보였다. 그래서 그날에 그분에게 ‘자료 관련해서 궁금한 게 있어서 연락드려도 될까요?’라고 메시지를 보냈고, 그 직원은 저녁 9시쯤 ‘연락해도 괜찮다’는 메시지를 주었다. 그때 나는 퇴근 후 버스를 타고 집에 가는 길이었는데, 그 직원이 연락해도 된다고 하셨을 때 바로 연락드리는 것이 예의일 것 같아 버스에서 내려 인근 롯데리아에 들어가 전화를 걸었다. 당시 나는 일부러 그 참고 자료 60개가 들어간 (처음 내가 직원에게 전달했던) 그 파일을 프린트물로 출력해서 들고 있었고, 그 직원에게 연락이 올 것 같아서 미리 준비해 두었었다.


전화를 걸자 외주처 직원이 바로 “밖인가 봐?”라고 물으셨고, 나는 “네, 밖이라 좀 시끄러운데 전화드려도 괜찮을까요?”라고 여쭈었다. 그리고 “자료 관련해서 궁금한 게 있어서요. 선생님께 참고 자료를 자료 하나당 1~2개 정도만 남겨주셨는데, 각 자료마다 고증이 필요할 것 같아서요”라고 말씀드렸다.


그러자 그 직원은 “왜 고증이 필요해?”라며 다소 화난 느낌으로 되물으셨다. 나는 머릿속이 정리되지 않은 상태였고 편두통도 심했던 터라 “그게 선생님의 전공과 관련된 자료들이라, 그 분야는 예로부터 전해져 온 전통이 있기 때문에 사실성이 중요하다”라고 단편적으로 대답했다. 그러자 외주처 직원은 “자료는 그냥 넣으면 되지 왜 고증이 필요해? 누가 그런 거야?”라고 물으셨다. 나는 “팀장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고, 자가 검증되지 않으면 작업물이 나중에 국가기관에서 탈락시킬 수도 있다”라고 말씀드렸다. 그때부터 직원이 고성을 지르기 시작하셨다. “그 팀장 미친놈이네.”, “내가 이 바닥에서 십 년 넘게 있었는데 자료 고증이 필요하다는 말은 처음 들어.”, “그 팀장은 회의에도 참석 안 했으면서 무슨 고증이야, 고증은.”, “송 팀장이야? 송 팀장은 괜찮았는데, 그 고증 뭐라고 한 팀장은 참 미친놈이네. 그런 자식이 다 있어?”, “나 외주처 직원 목록에서 빼.”, “나 이제 그 작업물 작업 안 해.”라며 소리치셨다. 소리가 너무 커서 전화기 음성이 깨질 정도였다. 나는 “그런 뜻이 아니고요… 네, 네…” 하며 거의 아무 말도 못 한 채 듣기만 했다. 그러다 전화가 끊겼다. 롯데리아를 나와 다시 버스를 탔는데, 곧바로 그 직원에게 다시 전화가 왔다. 그분은 “그 팀장 미친놈이네!! 미쳤네!! 나 외주처 직원 목록에서 빼!! 나 작업할 자격도 없는 거네!!”라며 또 한참을 소리치시고 전화를 뚝 끊으셨다.


그렇게 집에 가는 길에 어안이 벙벙했다. 한참 멍하니 있다가 선임에게 곧바로 전화가 왔다. 선임은 “너 네가 담당한 외주처 직원에게 무슨 말했어? 그 직원분이 나한테 전화해서 에서 외주처 직원 목록에서 빼달라고 소리만 지르던데. 대화가 안돼. 외주처 직원 대표한테도 전화해서 소리쳤다더라. 외주처 직원 대표도 나한테 전화하고 난리야”라고 하셨다. 나는 “선임님이 외주처 직원에게 확인받으라고 하셔서 여쭌 것뿐인데, 그 직원분이 화를 내셨다. 팀장님도 고증이 필요하다고 말씀하셨고, 난 그냥 궁금한 점을 여쭌 거였다. 그런데 대화가 안 되고 그 직원분이 일방적으로 화를 내셨다”라고 말씀드렸다. 선임님은 “내일 아침에 이야기하자”라고 하시고 전화를 끊으셨다.


그날 나는 하루 종일 편두통이 심했다. 아침부터 선임에게 작업했던 파일을 보냈지만 계속 퇴짜를 맞았다. 처음에는 출처가 없다고 해서 출처를 추가했고, 그랬더니 “네가 작업한 거냐? 그 외주처 직원의 문체와 다르다”라고 하셨다. 사실 께서 그 외주처 직원이 내게 준 작업물은 과거 버전과 거의 동일해서, 똑같이 내놓을 수 없어 나는 그 자료 내용을 조금 다듬은 수준이었다. 그런데 선임은 “왜 똑같이 자료를 조금만 다듬기만 하냐. 자료 전체 수정을 해야지. 그건 마지막에 하는 거다”라고 내게 말했다.


그래서 주말 동안 쉬지 못하고 자료를 조금씩 수정했다. 그런데 월요일에 선임이 “왜 전체 내용을 바꿨냐”라고 하시며, 다시 원래대로 되돌리라고 하셨다. 수정한 부분을 하나하나 짚으시며 “이건 어디서 가져왔냐?”, “왜 질문도 안 하고 막 수정하냐?”, “나 무시하냐?”라고까지 말씀하셨다. 정말 피가 마르는 기분이었고 너무 억울했지만, 나는 “전혀 그런 의도는 없었습니다. 제가 소양이 부족한 것 같습니다”라고만 말씀드렸다.


그러자 선임님은 “그런 소양은 궁금하지 않고, 왜 나한테 질문도 안 하고 내용을 바꾸냐. 내가 너가 내용 바꾼 거 다시 되돌리느라 시간이 오래 걸린다”라고 하셨다. 정말 속이 뒤집어지는 기분이었다. 선임님께서는 지난주엔 “왜 다듬기만 하냐. 그건 마지막에 하는 거다”, “작업물이 옛날 버전하고 똑같다”라고 해놓고, 이번 주엔 왜 반대로 말씀하시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꾹 참고 “다시 수정하겠다”고만했다.


그렇게 퇴근 시간이 다가오는데 6시쯤 선임님이 “오늘 야근해서 필수 자료 12개 작성해”라고 말씀하셨다. 아직 아까 그 파일 수정도 마치지 못한 상황에서, 필수 자료 12개를 작성해야 했다. 하루에 3개 정도 작성해도 그 하루를 다 쓰는데, 12개를 야근하면서 다 하라는 말이었다.


믿기지 않아 다시 “12개 다 작성하라는 말씀이신가요?”라고 여쭈었고, 선임은 “네”라고 답하셨다. 게다가 다른 파일 정리 업무도 나에게 맡기셨다. 그렇게 ‘지난 주말 했던 작업 도로 정리’, ‘다른 작업 정리’, ‘필수 자료 12개 작성’이라는 세 가지 업무가 야근 중에 주어진 것이다.


그 와중에 밤에는 그 외주처 직원과의 필수 자료 고증 관련 큰 사건이 터졌다. 옛날 버전 자료를 그대로 베낀 것도 이 외주처 직원이었는데, 능력은 없으면서도 본인이 다 작업했다고 믿으며 위신과 체면은 유난히 챙기시는 분이었다.


그날 외주처 직원과의 통화 후, 내 마음속에는

“사람들은 네가 버림받길 원해”,

“사람들은 네가 잘 안 되길 바라”,

“역시 넌 버림받을 존재야”,

“역시 너는 사는 것보다 죽는 게 나아”

라는 말들이 자꾸 떠올랐다.


( 내용과 무관한 사진 / 궁의 창밖 )

바로 그다음 날 출근하자마자 선임이 회의실로 오라고 하셨고, 어젯밤 그 직원분이 왜 그렇게 화가 나셨는지 물었다. 나는 전날 있었던 일을 그대로 말씀드렸다. 선임은 “그 직원분이 이미 자료를 골라서 줬는데 왜 또 뭐가 궁금한 건데? 그때 외주처 직원에게 궁금했던 걸 나한테 말해봐”라고 하셨다. 그래서 필수 자료 하나하나를 짚으며 구체적으로 어떤 점이 궁금했는지를 설명드렸다. 예를 들어 “이 자료엔 이게 있어야 하는데, 그 외주처 직원분이 고르신 자료에는 그게 없었다. 그래서 고증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는 식으로 말했다.


선임은 “너는 그 외주처 직원에게 그냥 자료만 골라달라고 했지, 정확한지 봐달라고는 안 했잖아. 그걸 안 해서 화가 나신 것 같다”라고 말했고, 나는 “맞아요. 그래서 화나신 것 같아요”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난 “이 외주처 직원분과는 소통이 어렵다. 이런 식이면 앞으로도 함께 일하기 힘들 것 같다”라고 말씀드렸다. 선임은 “이런 상황은 팀장님도 아셔야 하니 다 말씀드리겠다. 지금 그 외주처 직원은 외주처 직원 대표에게도 연락해서 본인을 직원 목록에서 빼달라고 했다”라고 하셨다. 나는 “네”라고 대답했다.


이후 팀장과 회의실에서 대화를 나눴다. 팀장은 “선임님께 이야기는 들었지만, 네가 어제 있었던 일 다 말해봐”라고 하셨다. 나는 선임에게 드렸던 이야기를 다시 한번 팀장에게 또 말씀드렸다. 팀장은 “내가 고증이 필요하다고 말했던 건, 네가 직접 고증을 찾아야 한다는 의미였다. 그 외주처 직원은 그쪽 전공일 뿐이지 전문가는 아니다. 그런 외주처 직원에게 자꾸 물어보려고 해서 화가 나신 것 같다”라고 말씀하셨다. 하지만 나는 ‘외주처 직원이 그쪽 전공인데 그와 관련된 자료도 모르는 게 당연한가?’라는 억울한 마음이 들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과거에 그 외주처 직원은 지난 회의에서도 “내가 전문가인데 왜 네가 안다는 듯이 말대꾸하느냐”라고 다른 동료에게 지적한 적이 있었다.


팀장은 이어서 “집필진 앞에서 편집자는 을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일은 편집자가 알아서 해야 한다”라고 하셨고, 나는 “맞아요”라고 대답했다. 팀장은 “너 요즘 많이 힘들어 보여. 지난주에 그만둔 00 씨도 다크서클이 심해서 결국 그만뒀다. 너도 지금 같은 상태인 것 같다”라고 하셨다. 나는 “요즘 좀 힘들어요”라고 솔직히 말씀드렸다. 팀장은 “어떤 부분이 힘들어?”라고 물으셨고, 나는 “업무량이 많아요. 3개 자료 모두 제가 맡고 있는데 너무 벅차요. 특히 첫 번째 자료는 이해가 안 돼요. 다른 팀원들처럼 세세하게 작업하지 못하겠어요. 저는 그저 발버둥 치며 따라가려는 수준밖에 안 되는 것 같아요”라고 말했다. 그러자 팀장은 “그래 보여. 앞으로 두 달은 더 바쁠 텐데, 그걸 견디기 어려울 것 같아서 그만두는 게 좋을 것 같아. 권고사직으로 처리할게.”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이게 욕심일 수 있지만, 2개월은 더 버티고 싶어요”라고 말씀드렸지만, 팀장은 “그건 완전 욕심이야”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셨다.


사실 나도 지지난주부터 퇴사를 고민했지만 스스로 결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팀장께서 강하게 권유하셔서 오히려 마음이 편해졌고, 이쯤에서 그만두는 것이 맞다고 느꼈다.

팀장은 “너는 여기 다니면서 힘들었을 것 같다”라고 하셨고, 나는 그 말을 듣자 눈물이 났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저는 이전 직장에서도 비슷한 일을 겪고 퇴사했어요. 혹시 팀장님 보시기에 제가 어떤 점이 부족해서 이런 일이 반복되는 건지 말씀해 주실 수 있으신가요?”라고 여쭸다.

팀장은 “내가 너를 본 기간이 짧고, 직접 같이 일한 것도 아니지만 너는 마음속에 담아두는 말이 많은 것 같다. 그리고 넌 이쪽 직무보다는 단순 업무가 더 잘 맞을 수도 있다. 너는 여기 일에 어울리지 않는다”라고 말씀하셨다. 그때 팀장의 말은 모두 아프게 들렸다.


이때 팀장의 말씀들이 다 아프게 들렸지만, 난 “맞아요. 저에게 그런 점들이 있어요.”라고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적인 대답을 했다. 팀장은 나를 잘 알지 못하지만 30년 경력이 있고, 직원들을 생각해 주는 마음이 있다는 걸 알았기 때문에, 본인의 경험을 바탕으로 나를 위해 해주는 말로 들었다.

이렇게 팀장과 면담이 끝난 뒤 점심시간이 되었고, 자료 작업료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A와 B는 자신들이 담당한 자료의 작업료가 너무 적어서 외주처 직원들에게 민망하다고 말했고, 나는 내가 담당한 자료 가격이 적당한지 다른 팀에게 묻고 싶었다. 그래서 “제가 담당한 자 가격이 00원이다”라고 말하자마자 B가 “아니, 그거 별것도 없는데 00원? 와… 되게 많다”라고 하면서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타 팀원들은 내가 말한 00원이 적당하다고 얘기하고 있었지만, B는 억울해하는 표정을 계속 지었고, 그렇게 점심시간이 끝났다.


점심시간 중간에 타 팀원 한 분이 “너무 힘들어 보인다”라고 말해서 “업무량이 많아서 힘들고 앞으로 더 힘들어질 것 같다”라고 말했더니 A와 B는 썩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서로 눈빛을 주고받았다. 그 모습에 기분이 매우 치욕스러웠다. 그들이 무게를 잡자 그 말을 했던 타 팀원분도 괜히 이 말을 꺼낸 것 같아 민망해하는 듯 보였다. 이때 마음이 아팠고, ‘너는 너를 도와주는 사람을 지키지 못해. 그럴 힘도 없어.’라는 말이 들리는 것 같았다. 그 타 팀원분이 나에게만 자신이 가져온 김과 참치통조림을 계속 권했지만, A와 B가 강하게 싸한 분위기를 풍겨서 위축되고 속상한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그만두길 잘했다’는 마음도 들었다.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데 A와 B는 내 행동을 검열하는 것 같고, 나는 숨 막히는 느낌을 받았으며, 그들은 억울해하며 ‘넌 그럴 자격이 없어!’라고 말하는 듯 분노하는 느낌을 받았다.


전날 외주처 직원이 나에게 소리를 지른 일을 이날 점심시간 때 함께 점심을 함께했던 A와 B, 그리고 타 팀원들에게 이야기하고, 이날 아침에 선임과 팀장과 면담했다고 말하자 A가 넌지시 “사건사고가 많네”라고 읊조리듯이 말했다. 이 말이 정말 가시처럼 가슴에 콕 박혔다. 정말로 나에게만 사건이 많이 터진다는 느낌을 받고 있었고,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느끼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너만 이런 일이 생겨. 너만 사건이 많이 생겨.’라는 공격적인 말이 들리는 것 같았다.

( 내용과 무관한 사진 / 돌탑 위의 부처상 )

팀장은 퇴사하려면 업무 인수인계서라는 파일을 선임에게 제출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때도 예전처럼 작업물 파일을 정리해 선임에게 드렸을 때와 비슷한 일이 반복되었다. 인수인계서는 한 장 짜리 간단한 파일이었고, 나는 이전 직장에서는 이런 걸 해본 적이 없어서 그냥 서명하고 제출했다. 그런데 선임님이 내가 제출한 업무인계서를 읽고서는 “이거 읽어봤어? 이거 네가 한 업무 맞아?”라고 물으셨다. 그래서 내용을 읽어봤더니 내가 한 업무가 아닌 것이 쓰여 있었다. 나는 그걸 수정해야 한다는 걸 몰랐기 때문에 그게 양식인 줄 알고 그대로 제출했지만, 선임은 화를 내며 한숨을 쉬었다. 수정하고 프린트하려 했지만 또 뭐라고 하실까 봐 걱정되어 그냥 파일로 드렸다. 그러자 선임님은 한참 답이 없다가, USB에 지금까지 했던 업무를 정리해서 담아두라고 했다. 그리고 그걸 보고 인수인계서를 확인하겠다고 하셨다. 이때 나는 ‘기가 막히다. 여기서 고작 2개월 정도밖에 일하지 않았는데, 이직할 때 여기서 2개월밖에 일한 거 말해봤자 손해인데 왜 이렇게 저 선임은 거들먹거리나? 화가 난다’는 생각이 들었다. 첫 직장은 더 오래 다녔지만, 누구도 나에게 인수인계 파일을 만들어야 한다고 하거나, 그걸로 판단하겠다는 말은 한 적이 없었다. 아무튼 선임이 말한 대로 USB에 정리해 드렸다. 그런데도 그날은 아무 말 없고, 다음 날이 되자 “인수인계서 다 작성했어요?”라고 묻는 것이었다. 나는 선임이 USB에 담긴 파일로 판단해 줄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결국 내가 다시 수정해서 드리니 선임님은 틀렸다며 본인이 수정한 파일을 보내주었고, 그것을 프린트해 오라고 해서 그제야 서명해서 제출했다. 그럴 거면 미리 본인이 수정해 주던가. 안 그래도 퇴사하는 마당에 또 이런 패턴이 발생해서 정말 답답하고 고구마 백 개 먹은 느낌이었다.


이 직장에서의 일은 선임은 명확하게 지시하지 않으면서도 나는 어떻게든 알아서 해야만 하는 구조였다. 선임의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몰라 제식대로 처리하면 “자기 무시하냐”며 화를 냈다. 질문을 해도 답이 늦고, 일은 끊임없이 주었다. 게다가 선임은 “내가 확인해야 할 대상이 너만 있는 게 아니다”라고 말하기까지 했다. 나는 질문할 여유도 없었는데 질문하라고 하고, 질문하면 화내거나 대답을 안 하고, 업무는 계속 쌓였다. 그래서 ‘이 선임이 일부러 나를 퇴사하게 만들려 했던 건 아닐까?’라는 억울한 생각까지 들었다.


이날 타 팀 신입분이 같이 퇴근하자고 메시지를 줘서 함께 퇴근하게 되었다. 그 신입이 했던 말 중 기억나는 건, 본인은 담당 작업이 없는데 내가 담당 작업이 있느냐고 묻는 것이었다. 나는 내가 담당했던 작업분량을 말하자 그 친구가 놀란 기색을 보였다. 내가 “전 처음 입사하자마자 그 작업을 맡았어요”라고 말하자, 신입은 “아무리 경력이라도 입사하자마자 그 작업을 맡는 게 말이 되느냐”는 식으로 말했다. 또 기존 팀원들이 반년 넘게 작업해 오던 작업을 중간에 들어온 사람이 갑자기 맡으면 당연히 어렵지 않으냐고 했다. 그 말을 듣고 나는 나 자신에게 놀랐다. 나는 그걸 어려워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동안 작업 과정을 모르는 상태에서 업무를 맡았지만, 어려워하는 티를 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팀원들도 내가 맡은 작업물이 쉽고 업무량이 적다며 불만을 가졌기에 어려움을 표현할 수 없었다. 그런데 이 신입의 말 덕분에, ‘이렇게 어려운 걸 내가 지금까지 해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고, 업무에 허덕였던 이유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이 신입은 예전부터 만날 때마다 A와 B 때문에 힘든 것 아니냐는 뉘앙스를 풍겼고, 나는 A와 B 때문이라고 말하면 문제가 생길까 봐 “업무량이 많아서”라고만 대답했다. 그래도 이 친구가 내가 힘든 이유를 대신 이해해 주는 것 같아 고마웠다.



토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