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 이직러의 하루하루
선임이 일을 주지 않아서 책을 읽고 있었는데, 선임이 지금 뭐 하고 있냐고 물었다. 그 말이 막 무서웠다. 아무것도 안 하고 있다고 답하기가 두려웠다. 그래서 망설이고 있는데, 선임이 “바쁘지 않으면 이거 해요”라고 해서 그 업무를 했다.
그날 느꼈던 내면의 자기비난은 이러했다.
“저 사람은 너만 혼내.”
“넌 심지어 누군가를 미워하지 않는 사람마저도 널 미워하게 만드는 사람이야.”
“너를 질투하는 사람들은 네가 잘되는 걸 막고, 네가 잘 안되게 만들 거야.”
“넌 뒷담화한 적도 없는데 오해받고 미움받게 될 거야.”
“저 사람들은 다 보호받는데, 너만 보호받지 못하네.”
“날 퇴사하게 만들려는 저이들의 마음들이 아프다.”
이런 말들이 나를 무너뜨렸다.
그리고 팀원들이 나에게 업무 분담 관련 불만을 품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서, 그들이 ‘ABC가 대단한 걸 문제 삼은 줄 알았는데, 겨우 업무 분담 얘기였더라’고 느꼈을 때 곰곰이 생각했다. 나도 업무 분담에서 불공평하고 억울함을 느꼈기 때문이다.
왜 그랬을까. 생각해보니 A, B, C는 절대적 평등, 즉 형식적인 평등을 원했지만, 나는 늦게 들어온 신입이라 경험이나 지식 면에서 불리했기 때문에 실질적인 평등이 필요했던 것이었다. 하지만 이걸 선임이나 팀장에게 말하기엔 너무 늦었다. 그래서 나는 또다시 “넌 부당한 걸 당할 수밖에 없는 애야”라는 생각으로 스스로를 자책하게 되었다.
선임이 목요일에 팀 식사를 하자고 하기 전까지는 그날의 나는 그냥 도시락 싸 와서 먹고 조용히 다른 팀원들에게 마지막 인사만 하려고 했었다. 그런데 그것조차 못하게 막는 느낌이 들었다. 마지막 순간마저 그들 마음 편하자고 나를 불행하게 만든다고 느껴졌다. 물론 마지막 날에 팀 식사가 있는 게 일반적이긴 하지만, 나는 팀이라는 소속감을 느끼지 못했고, 오히려 적대감을 느끼고 있었기에 식사를 같이하는 게 너무 싫었다. 하지만 같이 식사하기 싫다고 속마음을 내뱉지 못하고, 좋다고 답했다.
그날 A와 B가 동시에 우리 팀 메신저방에 자신이 맡은 외주처 직원의 업무 파일을 올렸을 때 느낀 건 이렇다. 이 둘은 매번 어떻게 작성할지를 공유하고, 항상 동시에 파일을 올린다. 그러다 보니 선임은 두 사람에게 동시에 피드백을 하게 되고, 상대적으로 나의 결과물은 그들의 결과물과 어긋나 보이게 되며, 결국 나는 무수히 다시 해오라는 말을 들으며 혼나는 패턴에 빠지게 된다.
그래서 소외감, 불공평함, 억울함이 들었다. 그날 정말 불안했다. “앞으로 뭐 해 먹고 살지?”, “내 미래가 너무 아득하다.”, “내 커리어는 이미 망가졌고, 덜 망가지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이런 생각들이 머리를 가득 채웠다.
다음 날 아침에 출근하자마자 짐을 싹 정리했다. 서럽고, 비참하고, 버려진 느낌이 들었다. 아득하고 슬프기도 했다. 그렇게 짐을 싸는 동안 A, B, C는 내게 말 한마디도 걸지 않았다. 이번 주 내내 나에게 말을 걸지 않았고, 대화도 나눈 적이 없었다. 점심시간에 같이 있을 땐, 서로 직접적으로 이야기하기보다는 다른 팀원들과만 이야기하는 식이었다.
아침에 A, B, C가 동시에 키득거릴 때 들었던 생각은 “다른 사람은 괜찮은데 너만 소외될 만한 사람이야”였다.
그날 선임에게 면담을 신청할까 말까 고민하다가 결국 용기 내서 신청했다. 내가 가장 궁금했던 건, 선임이 입장에서 내가 자신을 왜 무시한다고 생각했는지 였다. 물어보니, 선임은 “한번 한 말이 고쳐지지 않고 반복되는 게 문제였다”고 했다. 그 외 하고 싶은 말이나 조언이 있는지 물었더니 이렇게 말했다.
“내가 뭔가를 지적했던 건, 당신의 존재를 지적한 게 아니라 업무를 지적한 거였다. 부정적인 피드백은 바로 털어버리면 좋겠고, 피드백은 반영되어야 한다. 차라리 이쪽보다는 다른쪽으로 가는 건 어떻겠느냐. 직무 교육도 받아봤으면 좋겠다. 계속 이쪽 일을 할 거라면 쉬는 동안 교육받아보는 것도 좋겠다. 속에 담아두지 말고 말해도 된다. 남에게 맞추는 성향인데, 그러지 말고 조금은 뻔뻔해질 필요가 있다.”
그리고 팀장이 뭔가를 이야기했는지, 선임이 먼저 “혹시 이전 직장에서도 비슷한 일을 겪었냐”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나는 “어렸을 때 형성된 습관이 쉽게 고쳐지지 않아서, 이전 직장에서도 비슷한 피드백을 받고 힘들었다”고 답했다. 선임과 오해가 조금은 풀린 것 같아, 면담 신청하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선임은 “OO씨가 오기 전에, 우리는 그 자리에 올 신입을 되게 기다려왔었다”고 했다. 그 말이 오히려 나를 고통스럽게 했다. 그 자리는 원래 사랑받을 준비가 된 자리였는데, “너라서 버림받았어”라는 내면의 말이 가슴을 찔렀다.
선임은 다음 날부터 안 나와도 된다고 했다. 나가기 전에 외주처 직원들이 모인 단톡방에 마지막 인사를 하라고 했다. 예전 직장에선 그런 인사를 한 적이 없는데, 이곳에선 마지막까지도 뭘 시켰다. 그 인사마저, 자기들 입장에서 ‘신입을 내보낸 것이 아니다’라는 인식을 만들기 위한 것 같아 마음이 복잡했다.
그래도 단톡방에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연휴 잘 보내세요”라고 인사를 남겼다. 그런데 예전에 나에게 고함을 지르며 목록에서 빼달라고 했던 그 직원이 “수고 많으셨습니다. 즐거운 날들 많이 만들시길 바랍니다”라고 썼다. 그 문장을 보고 나서, 속이 뒤집히고 절망감, 굴욕감, 비참함이 밀려왔다.
나는 속으로 외쳤다. “너니까 저런 사람한테 당하지”메 ㅔㅂ
“넌 하찮은 존재야”, “넌 버림받을 만해.”
그날이 마지막 근무일이었기에, 4시쯤 팀장께 인사드리고, 사무실 책상 하나하나 돌며 마지막 인사를 드렸다. 씁쓸했고, 창피했고, 우울했고, 잘못한 사람 같았다. 타팀원 중 한 명이 “고생만 하다 간다”고 메시지를 보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