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I. 내러티브와 투자

-내러티브 투자의 정석-

by 아나키스트

우연과 필연에 대한 인식


내러티브는 해석학입니다.

그저 꿈을 이야기하거나, 소설 같은 스토리텔링이 아닙니다.

삼라만상을 어떻게 볼 것인가?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고민할 때 쓰는 인식적 틀, 즉 세상을 보는 안경입니다.


이 내러티브란 안경은 ‘우연’이란 현상을 매우 중요시 봅니다.

저는 우연히 이 세상에 왔습니다.

제가 태어난 것 그것도 한국인으로, 박 씨 성을 가지고 태어난 것이 저의 의지도 계획도 아닙니다.

우연히 태어난 저이지만, 한국인의 문화와 체계(system) 안에서 예측 가능한 행위들, 군대도 가고, 때론 병에 걸리기도 합니다.


저는 확신합니다.

분명히 죽을 것입니다.

죽음은 필연입니다.

그러나 언제 어디서 어떻게 죽을 것인가는 우연이지요.

즉 우연으로 시작해서 필연을 거쳐 우연으로 매듭지을 것이 저의 인생입니다.

삼라만사 모든 만물은 우연의 산물입니다.

최소한 인간의 능력으로 알 수 있는 범위 안에서는 그렇습니다.

그것들이 고유의 필연과정을 거칠 것입니다.


저는 호랑이로 태어나려고 했습니다.

지금 웃으셨지요? 그럼 저의 존재의 시작이 한국인으로 태어난 것은 우연이지요?

동시 태어남 자체가 결과이고 그 결과 역시 우연이지요?

저의 시작과 끝은 우연의 산물이지 저의 계획으로 될 수 없는 것이지요?

즉 저의 계획대로 됐다면 그건 행운이지, 저라는 한 개인이 세운 계획의 필연적 산물이 아닙니다.


이 말을 이해하시기 위해서는 시간과 공간 개념을 사유해야 하는데, 본 글의 목적이 아니니 위에서 언급한 책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투자의 세계에서도 이 우연과 필연에 대한 이해는 매우 중요하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우연과 필연을 오해한 대표적인 인식론자가 실존주의의 거장 키에르케고르이죠.

한 때는 서양의 인식론의 한 획을 그은 인물이죠.

그는 말하기를 B(birth)와 D(death) 사이에 C(choice)가 있다고 하면서 어제 나의 선택이 오늘의 나라는 오류를 범했습니다.

틀린 말은 아니나 어딘가 허전한 구석이 있지요?

왜냐하면 어제의 나의 선택이 오늘의 결과물이 되려면 하루의 시간이 지나는 동안 나는 시간과 공간을 조정 통제하는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잠자는 동안 절대 심장마비가 일어나지 못하도록 하고, 지붕이 무너지지 않도록 할 수 있는 전지전능한 능력의 소유자여야 합니다. 그래야만 어제 내가 선택한 결과물이 오늘의 나가 될 수 있습니다.

즉 선택한 계획대로 되려면 전지전능함이 필수입니다.


투자에 있어서 결과물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만 그런가요?

우연이란 단어를 들으면 뭔가 내 것 같지 않고, 스쳐 지나가는 바람 같지 않으세요? 혹은 우연, 가격을 매길 수도 없고, 애써서 추구한 수도 없는 나와 동떨어진 그 무엇 같지는 않으신지요?

또한 우연이라 하면 뭔가 불안정한 느낌은 없으세요?

예를 들어 나의 목표를 위해 계획하고 준비했는데.. 그 결과는 우연에 맡겨진다면?

반면에 필연이라 하면 뭔가 거부할 수 없는 운명 같고, ‘반드시’ ‘꼭’이란 것과 연동되지 않으세요? “필연적이야!” 그러면 “아~ 그렇구나”, 하며 수긍하는데 반면 “우연이었어!”, 그러면 “그렇구나!”라고 하며 별 것 아닌 것처럼 넘어가지 않으세요?


만약 제가 느낀 것을 여러분도 느끼신다면 왜 그럴까요?

우리는 알게 모르게 우연은 무질서고 필연은 질서적이라는 인식이 숨어 있고, 무질서는 나쁘고 질서는 좋은 것이란 의식 속에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단어를 바꿔 보죠.

우연은 정형화되지 않은 개연성이고, 필연은 절대적으로 바뀔 수 없는 숙명이다.

우연적 결과물은 찰나와 순간이 좌지우지하고, 필연은 시작과 계획에 의해 결정된다.

어떤 것이 더 답답하고 기회의 폭이 넓다고 생각되십니까?

저는 후자인데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다만 우연은 나 자신이 운전할 수 없는 것이고, 필연은 일정 부분 내가 조정 가능한 것뿐입니다.


고대 그리스 로마부터 근대 모더니즘까지 세계관은 어떤 필연, 합목적적으로 삼라만상은 움직인다고 봤습니다.

그러기에 모든 삼라만상에는 나름의 질서로 움직이고, 그 움직임은 분명하게 갈 바가 ‘이미’ 정해져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들의 사고에는 우연에 대해 돌아볼 생각조차 하지 않았고 우연은 무질서이기에 선하지 않은 것입니다.

이런 세계관이 깨지기 시작한 결정적 상상력이 그 유명한 상대성이론입니다.

투자의 세계에서 우연과 필연을 논한다면 우연과 실력으로 돌려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투자 결과는 우연인가? 필연, 즉 실력인가? 운이 좋았어! 우연히 그리 되었다고 하는 거죠.


그럼 운이 나빴어! 필연입니까?

우연이 싫은 것이 아니라 나쁜 우연이 괴로운 거죠.

우리가 투자세계에서 우연과 필연을 논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우리의 투자결실은 우연인가? 필연인가?

과학적이고 체계적이며 계획적으로 잘 짜인 것이라면 그 결실 역시 과학에 합당한 결과물, 계획한 대로 목표는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런데 과연 그런가요? 만약 그렇지 않다면 둘 중 하나입니다.

나쁜 우연이란 것이 개입되었거나, 계획 자체가 잘 못 되었거나.

그나마 나쁜 우연 때문이라 판단되면 희망이라도 가질 수 있는데, 계획 자체가 잘 못 되었다면, 아이고 갈 길이 멉니다.

계획하지 않은 의외의 결실도 있습니다.

우리는 투자함에 있어서 말로는 운칠기삼이라고 농담하면서도 실천함에 있어서는 우연성을 들여다볼 생각은 안 하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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