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을 잇는 사람들] 2. 하나의 회의가 열리기까지

그래서, 국제회의기획자는 정확히 무슨 일을 하나요?

by MICE 기획자 Michelle

지난 글에서 제가 어떻게 우연히,

그리고 운명처럼 국제회의기획(PCO)의 세계에

발을 들였는지 이야기했습니다.


오늘은 그 길 위에서 우리가 정확히 어떤 일을

하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 더 깊이 해보려 합니다.


하나의 아이디어가 수천 명이 모이는 컨퍼런스로 현실화되기까지,

그 보이지 않는 여정을 살짝 소개합니다.


물론, 어떤 행사인지, 누가 주최자인지,

예산이 얼마나 되는지, 준비일정과 기간이 얼마나 되는지에 따라

세부적인 준비사항과 진행은 다 다르지만

대략적으로 행사 하나가 기획될 때의

일정에 따라 필요한 일들을 따라가 볼게요.


이것은 단순히 업무의 나열이 아닌,

하나의 행사를 만들어가는 기획자의 사고법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Phase 1. 모든 것의 시작: 'Why'로 청사진 그리기 (D-365 ~ D-180)


모든 프로젝트는 "이런 행사를 하고 싶습니다"

라는 한 문장에서 시작됩니다.


이때 주니어 기획자들이 가장 빠지기 쉬운 함정은

'How(어떻게)'를 먼저 고민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Why(왜)'입니다.


처음 국제회의 유치 제안서를 쓸 때가 기억납니다.

의욕만 앞서서 우리나라의 훌륭한 컨벤션 센터,

맛있는 음식, 발전된 IT 인프라를 백과사전처럼 나열하기 바빴습니다.


그때 제 사수였던 Diana가 물었습니다.


"좋아, 다 좋은데…

그래서 이 사람들이 왜 다른 도시가 아니라 꼭 서울에 와야 하지?"


그 질문이 제게는 큰 충격이었습니다.


그때 깨달았습니다.

우리의 첫 번째 일은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질문하는 것이라는 사실을요.


이 행사는 왜 열려야만 하는가?

이 행사를 통해 주최자는 무엇을 얻고 싶어 하는가?

이 행사를 통해 참가자들은 무엇을 얻어 가야 하는가?

참가자들의 가장 큰 고민은 무엇인가?


이 'Why'를 집요하게 파고들 때

비로소 행사의 진짜 '본질'이 드러납니다.

그 본질을 찾아낸 제안서만이 클라이언트 또는 이사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습니다.

행사를 기획할 때도 이 질문에 대한 답이 바로 행사의 '본질'이자 '북극성'이 됩니다.

이 북극성이 명확해야만, 수많은 의사결정의 순간에 길을 잃지 않습니다.


그 본질을 찾았다면, 이제 현실의 땅에 발을 디딜 차례입니다.

현실의 영역, 바로 예산과 베뉴(Venue) 선정이죠.


예산은 단순히 돈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상상력에 그어지는 첫 번째 현실적인 한계선입니다.

이 한계 안에서 최고의 가치를 만드는 것이 기획자의 역량이기에,

동시에 우리의 창의력을 시험하는 첫 번째 무대이기도 합니다.


베뉴는 역시 단순히 행사가 열리는 장소를 넘어,

참가자들이 우리 세계에 들어서는 '첫 번째 문'입니다.

저는 베뉴를 볼 때 늘 참가자의 입장에서 공항에서부터의

모든 여정을 머릿속으로 그려봅니다.


그들의 경험이 편안하고 즐거울 때,

행사는 이미 절반은 성공한 셈이니까요.



Phase 2. 집 짓기: 콘텐츠와 사람을 모으다 (D-180 ~ D-30)


행사의 본질이 정해졌다면, 이제 그 본질을 채울 콘텐츠,

즉 행사의 심장이라 할 수 있는 '연사(Speaker)'와 '프로그램'을 기획합니다.


많은 주니어들이 연사 섭외를 '연락처를 알아내 메일을 보내는 일'로

생각하지만, 본질은 '콘텐츠 큐레이팅'입니다.

이 연사의 메시지가 우리 행사의 'Why'와 어떻게 연결되는지,

그의 지식이 참가자들에게 어떤 영감을 줄 수 있는지

깊이 고민하고 진심으로 설득해야 합니다.


이메일 한 통으로 끝나는 섭외는 없습니다.

해당 분야의 최고 권위자를 모시기 위해 수십 번의 메일을 주고받고,

때로는 그분의 논문까지 읽어가며 맞춤형으로 제안해야 합니다.

그렇게 한 분 한 분 연사가 확정될 때마다 행사의 심장이 뛰기 시작합니다.


2014년 서울세계수학자대회를 준비할 때,

행사의 목표 중 하나는 '수학은 어렵고 지루하다'는

대중의 편견을 깨는 것이었습니다.


단순히 수학자들만의 학술대회가 아니라,

수학이라는 학문이 우리 삶과 얼마나 다채롭게 연결되어 있는지

보여주는 축제로 만들고 싶었죠.


그래서 저희는 기존의 학술대회 프레임을 넘어섰습니다.

세계적인 수학자이자 월스트리트의 전설이 된 짐 사이먼스의 대중 강연을 기획했고,

프랑스 대사관과 협력하여 세드릭 빌라니 교수 같은 석학들의 대담과 함께

프랑스 수학 영화 «어떻게 내가 수학을 싫어하게 되었나» 상영회를 열었습니다.

수학자와 이창호 9단의 바둑 대결 같은 흥미로운 이벤트와

수학의 원리를 체험하는 전시회까지,

'수학'이라는 하나의 점에서 출발한 아이디어는

다양한 문화 프로그램으로 뻗어 나갔습니다.


이 모든 기획은 연사를 '섭외'하는 것을 넘어,

우리의 'Why'에 공감하는 파트너들을 '연결'하는 과정이었습니다.

우리의 진심 어린 제안에 많은 분들이 기꺼이 동참해주셨고,

그 결과 수학자대회는 전문가들뿐만 아니라

수많은 일반 시민과 학생들이 함께 즐기는 거대한 축제가 될 수 있었습니다.


콘텐츠의 힘은 바로 이렇게 사람과 사람,

분야와 분야를 연결하는 데서 나온다고 저는 믿습니다.


그렇게 좋은 콘텐츠가 준비되면,

이제 진심으로 사람들을 초대해야 합니다.

바로 '홍보'와 '등록'입니다.

심장이 뛰면 온몸에 피를 보내야 하니까요.


기억하세요. 우리의 잠재 참가자들은 전 세계에 흩어져 있고, 모두가 바쁩니다.

단순히 행사 정보를 나열한 이메일은 아무도 읽지 않습니다.

그들의 시간을 내어 우리 행사에 와야만 하는 이유,

이곳에서만 얻을 수 있는 특별한 경험이 무엇인지를

끊임없이 고민하고 전달해야 합니다.


홈페이지를 오픈하고, 뉴스레터를 발송하며

전 세계의 잠재 참가자들에게 우리가 만든

이 멋진 집에 방문해달라고 초대장을 보내는거죠.


등록 시스템조차도 단순히 데이터 입력 창이 아니라,

참가자를 환영하는 따뜻한 첫인사가 되어야 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우리의 초대에 응한 손님들이 가장 먼저 마주하는 대문이자

참가자가 우리와 처음으로 관계를 맺는 '첫인상'이기 때문이죠.


여기서부터 긍정적인 경험이 시작되어야 합니다.

간편하고 친절해야 함은 물론, 수천 명의 데이터를 안전하고 체계적으로

관리하는 것은 기본 중의 기본입니다.



Phase 3. 마지막 퍼즐: 모든 것을 제자리에 (D-30 ~ D-1)


행사가 한 달 앞으로 다가오면,

PCO의 시간은 48시간처럼 흐릅니다.


디자인, 인쇄, 기념품, 수송, 식음료, 통역, 현장 운영 인력 등

수십 개의 협력업체와 마지막 퍼즐을 맞춥니다.


행사를 앞두고 제 책상 위에는

늘 전화번호부 두께의 '실행계획서'가 놓입니다.


수백 페이지에 달하는 그 책 속에는

행사의 모든 시나리오와 변수,

담당자의 이름과 연락처까지,

말 그대로 행사의 모든 것이 담겨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걸 왜 이렇게까지 만드냐고 묻기도 합니다.


ISO 국제기구 총회를 준비할 때였습니다.

이 매뉴얼에 있던 'VIP 의전 차량은 반드시 정문에서

3미터 떨어진 곳에 정차 후, 의전 담당자가 먼저 내려 문을 연다'는

단 한 줄의 문장이 있었습니다.


행사 당일, 예상치 못한 비가 내렸고 현장은 혼잡했습니다.

하지만 이 매뉴얼을 숙지한 현장 요원 덕분에 VIP는

비 한 방울 맞지 않고 차에서 내릴 수 있었습니다.

사소해 보이지만, 이런 디테일 하나가 행사의 품격을 결정합니다.


디테일은 완벽을 만들고, 완벽은 집착이 아닌 신념에서 나옵니다.


기획자는 오케스트라의 지휘자가 됩니다.

수백 페이지에 달하는 '실행계획서' 또는 '운영 매뉴얼'은 우리의 악보입니다.

모든 스태프가 한 몸처럼 움직일 수 있도록 교육하고 또 리허설합니다.

모든 돌발상황에 대한 시나리오까지 담긴 이 악보가 있기에,

우리는 현장에서 혼돈에 빠지지 않고 지휘를 계속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행사 전날 밤, 텅 빈 컨벤션 홀에 조명이 켜집니다.

내일이면 수천 명의 사람들로 북적일 이 공간을 고요함 속에서 바라볼 때,

PCO는 비로소 우리가 연결한 수만 개의 점들이 만들어낸 거대한 그림을 마주합니다.


그 엄청난 책임감과 가슴 벅찬 설렘.

그것이 우리가 이 모든 과정을 견디게 하는 가장 큰 보상 중 하나일 겁니다.


하지만 이 완벽하게 짜인 계획이 현실과 만나는 순간,

진짜 이야기는 시작됩니다.


무대 위 백조가 우아한 자태를 뽐내기 위해

물밑에서 어떤 발버둥을 치는지, 그 이야기가 바로 다음에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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