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왜 싸우고, 왜 또 대화하려 할까

정보의 장벽을 넘는 방법, 대화의 조건을 설계하는 일

by MICE 기획자 Michelle

〈진격의 거인〉이 남긴 ‘정보’와

‘대화의 자리’의 이야기

〈진격의 거인〉을 다 보고 나서,

한동안 아무것도 바로 쓰지 못했다.
정리가 안 돼서가 아니라, 너무 정리돼버려서였다.


우리는 왜 끊임없이 전쟁하는가.
그리고 왜, 어떤 사람은 끝까지

“대화”를 포기하지 않는가.


내게 이 작품은 ‘거인’의 이야기가 아니라
정보가 없을 때 공포가 생기고,

공포가 폭력을 만드는 인간의 이야기로 남았다.


정말 많은 생각을 하고 나누고 싶은 건 많지만

브런치에서는 기획자의 시각에서 정리를 해보려고 한다.



전쟁은 ‘악의’보다 ‘무지’에서 시작된다

이 작품이 잔인한 이유는

폭력적인 장면 때문만은 아니었다.
전쟁이 누군가의 특별한 악함으로 시작되는 게 아니라,
서로를 모르는 상태에서 너무 자연스럽게 시작된다는 것이 더 무서웠다.


모르면 인간은 상상으로 채운다.
그리고 그 상상은 자주 최악으로 기운다.

공포 → 방어 → 적대 → 폭력


이 흐름이 한번 시작되면,

그 다음은 “선택”이라기보다 “자동 반응”처럼 보인다.

작품 속에서 누군가의 증오는 대개 ‘팩트’가 아니라
전해 들은 이야기 위에 세워진다.
상대는 괴물로 단순화되고, 나는 피해자로 굳어진다.
그 순간 전쟁은 훨씬 쉬워진다.



‘벽’은 물리적 장벽이기 전에

정보의 장벽이다

벽은 안전을 준다.
하지만 그 안전은 “아는 것”을

제한하는 방식으로 유지된다.
어떤 정보는 차단되고,

어떤 정보는 제공되는 만큼만 허용된다.

그래서 사람들은 스스로 자유롭다고 느낄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자유는 종종 허용된 범위 안의 자유다.

이 작품이 다루는 자유는 결국 “마음대로”가 아니라
내가 믿는 세계가 전부가 아닐 수 있다는 걸

받아들이는 용기에 가까웠다.

인식의 한계를 깨뜨리는 자유.
거기서부터 자유는 시작되는 것처럼 보였다.



아르민이 믿었던 건 ‘선의’가 아니라

‘대화의 조건’이었다

내가 아르민을 좋아하는 이유는, 그가 착해서가 아니다.
아르민은 전쟁이 시작되는 메커니즘을

정확히 보는 사람처럼 보였다.


많은 인물들이 이렇게 결론 내릴 때,

“상대는 우리를 해치려 한다.”

“그러니 먼저 끝내야 한다.”


아르민은 결론 앞에서 질문을 멈추지 않는다.

“그들은 왜 그렇게 되었을까?”

“우리는 무엇을 모르고 있을까?”

“이 상황을 다르게 설명할 언어가 있을까?”

(C) 진격의 거인


그가 말하는 “대화”는 낭만이 아니다.
대화는 “좋은 마음”이 아니라
전쟁이 자동으로 시작되는 조건을

바꾸기 위한 전략이다.


정보가 없을 때 공포가 생긴다면,
정보와 질문은 공포가 폭력으로 넘어가기 전에
잠깐이라도 멈칫하게 만든다.


아르민은 그 멈칫의 가능성을 끝까지 붙잡는 인물이다.
나는 그게 리더십이라고 생각했다.
가장 빠른 승리를 고르는 사람이 아니라,
가장 느리고 어려운 선택으로

파국의 루프를 끊으려는 사람.



그래서 인간은 역사적으로

‘대화의 자리’를 만들었다

여기서 나는 이 작품을 보고 한 질문이 더 생겼다.

인간은 언제부터 회의와 서밋 같은 형식을 만들기 시작했을까?


전쟁이 지나간 자리에는 대개 회의가 놓였다.
상대가 무엇을 원했고 무엇을 두려워했는지를
‘문장’으로 만들기 위해서.

그리고 그 문장이 다시 무너질 수도 있다는 걸 알면서도,
그럼에도 다시 대화의 자리, 즉 테이블을 세우기 위해서.


역사적으로도 전쟁 이후

질서를 재편하려는 회의들이 반복되어 왔다.
나폴레옹 전쟁 이후 유럽 질서를 조정하려 했던

빈 회의(1814–1815) 같은 사례가 그렇다.
전쟁을 “관리하고 예방하는 규칙”을 논의하려 모였던

제1차 헤이그 평화회의(1899)도 마찬가지다.


회의가 전쟁을 완전히 끝내지는 못했다.
하지만 회의가 없을 때 인간은

더 쉽게 단순한 답으로 뛰어들었다.

모르는 상태에서의 공포는 폭력을 낳기 때문이다.


그래서 회의와 서밋, 컨퍼런스는
어쩌면 ‘평화 이벤트’가 아니라 오해를 줄이기 위한

사회적 장치로 생겨난 것처럼 보인다.



기술이 발전할 때도 사람은 모였다

— 표준을 만들기 위해

전쟁만이 아니다.
산업과 기술이 폭발할 때도 인간은 대규모로 모였다.

새로운 기술은 새로운 연결을 만들고,

동시에 새로운 오해와 충돌을 만들기 때문이다.


산업·디자인·국가 경쟁과 교류를 한 공간에 올려놓은

1851년 런던 그레이트 익스히비션 같은 사건이 그렇고,
국경을 넘는 통신이 확장되자 국제적 표준을 논의하는 회의가 필요해졌다.

1865년 국제전신회의에서 국제전신협약이 체결되고

국제전신연합(현 ITU의 전신)이 만들어진 흐름은,

기술이 결국 ‘대화의 자리(테이블)’을 낳는다는 걸 보여준다.


연결이 생기면, 공용어가 필요해진다.
그 공용어를 만드는 가장 원초적인 방식이

“모여서 말하는 것”이었다.



AI 시대에 질문은 더 또렷해진다

요즘 AI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이 작품이 다시 떠오른다.

정보는 더 빨리 퍼질 것이다.
정답도 더 쉽게 추천될 것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럴수록

내가 더 궁금한 건 이쪽이다.


정보가 많아지면 정말 이해가 늘어날까?
아니면 서로를 더 단순화할까?


정보는 문을 열어주지만,

그 문을 통과할 용기까지 주지는 않는다.

사람은 알고도 두려워한다.

두려워서 다시 편 가르기로 도망친다.
대화는 느리고, 위험하고,

내 세계를 흔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결국 다시 아르민으로 돌아온다.
“그래도 대화해보자”라고 말하는 사람.
완전한 이해가 불가능하다는 걸 알면서도,

그래도 시도해야 전쟁이 ‘필연’이 되지 않는다고 믿는 사람.



결론: 우리는 서로를 모르기 때문에 싸우고, 그래서 대화의 자리를 만든다

〈진격의 거인〉을 보고 내가 얻은 한 문장은 이렇다.


우리는 서로를 모르기 때문에 싸운다.
그래서 우리는 대화의 자리를 만든다.


테이블(대화의 자리)는 완전한 해결책이 아니다.
하지만 적어도, 공포가 폭력으로 넘어가기 전에
서로를 이해할 가능성을 남긴다.


그리고 나는 앞으로도 그 가능성을

설계하는 일을 계속하게 될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번 더 묻고,
한 번 더 말 걸어보는 사람이 남아 있는 한.


(C) 진격의 거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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