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볕이 나날이 따스하다. 봄이 시작되니 몸이 자연스럽게 산책길에 오르게 되었다. 혹독한 겨울이 끝나고 다시 오는 다정한 봄. 잔나무가지를 쭉쭉 뻗으며 꽃을 피워낼 준비를 하는 물오른 나무처럼 몸과 마음이 다시 살아난다.
늘 걸어가는 산책길에 미술 활동을 하는 공간이 있었다. 기웃기웃 하면서 여러번 내부의 동태를 살펴보았는데 왠지 선뜻 문을 열고 들어설 용기가 없었다. 커다란 유리창이 있어서 안에 사람이 있는지 훤히 보였지만 쑥스러웠다.
안에 사람이 없을 때는 창 바깥쪽으로 전시된 각종 그림, 공예품 등등을 찬찬히 구경하곤 했다. 최근에는 많이 가보지 못했지만 미술관 구경도 좋아하기 때문에. 그림 앞에 서서 작가의 깊은 의도는 잘 모르겠지만 마음대로 상상의 나래를 펼치고 아름다운 색채를 음미하는 게 즐겁다.
가까이 가보니 봄을 맞이하여 수채화반을 모집한다는 포스터가 붙어있었다. 봄과 함께 내 마음에도 한줄기 훈풍이 불어왔는지 얼른 사진을 찍어 왔다. 득달같이 전화를 걸어서 금요일 오후에 수채화반에 등록하러 가기로 하였다. 마침 오후 시간도 비어 있는 날이라 안성맞춤.
기대감을 가지고 간 수채화반에 오신 분들은 나이대가 상당히 높으셨다. 거의 50대 중후반에서 60대 이상이신 듯 보였다. ‘여기서는 어린 편’이라는 말을 듣다니 새삼 기분이 좋아진다. 심장내과 의사 선생님도 아무렇지 않게 “아직 나이도 젊으신데.”라고 하더니. 나이가 젊고 늙고는 어디에 기준을 두느냐에 따라 다르구나.
학교를 졸업한지 수십 년만에 다시 수채화 붓을 들었다. 처음에는 팔레트에 짠 스무개의 색을 붓에 묻히고 물을 섞여서 색을 칠해보는 것으로 시작했다. 마치 처음 글을 배우는 어린이처럼 조심스럽게 붓에 색을 뭍여 한 점씩 도화지에 찍어본다.
다음 단계로는 한 가지색에 물을 조금씩 더해서 그라데이션 하는 연습이었다. 수채화는 색의 농도로 칠해지는 그림인 것을 알게 되었다. 한 가지색에 점점 물을 더 많이 섞으면 색이 옅어진다. 처음부터 너무 진하게 칠하면 그림은 망하게 되니 옅은 색으로 시작해야 한다. 섬세함과 인내를 요구하는 그림이다.
요조 숙녀같은 수채화 보다는 아무래도 오일화 같이 마구 덧칠하는 게 적성에 맞지 않을까 싶은데. 아무도 무슨 그림인지 못 알아보면 추상화라고 주장하면서. 아니면 행위예술같은 것을 하거나. 나의 참된 본성이 무엇일까 다시 곰곰이 돌아보게 된다. 극단적인 종 잡을 수 없는 캐릭터가 있는 것 같다. 인간의 성격이란 하나가 아니라 혼재되어 있는 게 맞지 않을까 싶다.
그 다음에는 세가지 색을 조합해서 회색을 만들어보라 하셨지만 회색이 잘 나오지는 않았다. 보색을 섞으면 된다는 데 보색도 잘 기억이 나질 않았다. 언제적 학교 미술 시간에 배운 보색인가. 빨강과 초록과 노랑과 검정인가.
마침내 그림다운 그림으로 밤 하늘의 별과 산을 그려보았다. 푸른색 물감 몇 개를 섞어서 그리는 것이었는데 성격이 급하여 그라데이션이 제대로 표현되지 않았다. 두 시간이 훌쩍 지나갔고 수업을 하러 가야 해서 마음도 급했다. 빨리 마무리 해야 겠다는 생각에 대충 슥슥.
성격대로 거침없이 그려 넣고 소금을 뿌려서 별빛을 표현해 보았는데 물감이 마르기 전에 뿌려야 하는데 타이밍도 잘 못 맞춘 것 같다. 산의 회색이 잘 안나와서 소금 위에 검정색을 덧칠까지 했다. 망할 망. 망하면 어떤가 나의 고유한 예술세계를 마음껏 펼쳐보며 즐거우면 됐지. 그리고 꽃과 이파리 세 개도 하나 그렸는데 시간이 없어서 허둥지둥 다음 시간에 마무리 할 것을 기약하고 뛰쳐 나왔다.
오랜만에 폭풍 수다를 떨고 모임다운 모임에 참석하니 신경이 시끄럽긴 했지만 다들 자기만의 그림의 세계에 빠져서 고요하게 색을 섞어 보는 재미가 있었다. 벚꽃, 등나무꽃이나 나무 등 그림을 숙제로 그려오셔서 앞에서 보여주며 칭찬을 하는 분위기도 정겨웠다. 속으로는 멀리서 보니 괜찮았는데 “가까이에서 보니 별로네.” 싶은 그림도 있었으나 의외로 감탄이 나오는 그림도 있었다. 알게 모르게 독설가인가. 아마 작품을 보여주는 분은 학교에서 칭찬받는 학생처럼 어깨가 으쓱해지고 뿌듯해지는 시간일 것이다.
마지막 인사로 “재미있는 시간이었습니다.” 라고 했는데 다른 분들이 웃으셨다. 진심이었는데 다소 어색한 인사였나.
앞으로의 시간도 기대가 된다. 왠지 디테일에 강하고 꼼꼼해야 하는 수채화는 잘 안 맞는 것 같지만 성질을 죽이고 도를 닦고 심신 수양을 하면서 난을 치는 심사임당의 마음으로 그려봐야겠다.
이로써 왠지 잘 맞는 취미를 하나 발견한 것 같아서 또 기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