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채화가 점점 좋아진다. 수채화를 시작하면 두 시간 동안 시간을 잊는다. 처음에는 두 시간을 꼼짝 않고 그림을 그릴 수 있으려나 걱정이었는데 웬걸 그림 몇 장을 그리니 순식간에 지나갔다. 말로만 듣던 사차원이라던지 다른 세계에 들어갔다 나오는 것일 수도 있다. 걱정이나 근심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으시거나 일상이 무료하시다면 수채화를 권하고 싶다. 취미생활은 우리를 모든 것으로부터 떠난 무아지경에 빠지게 한다. 이것이 심신의 안정과 정신 치료에 도움이 될 것 같다.
오늘은 봄이라는 글씨 옆에 아주 작은 꽃과 나무 두 그루를 그렸다. 봄이라는 글자를 새겨넣고 손톱만한 꽃을 그려서 완성하였다. 크기가 작다 보니 순식간에 뚝딱 그려져서 적성에 맞았다. 캘리그라피를 배운적이 없어서 글씨가 동그랗고 예쁘게 써지지 않았지만 언제나처럼 만족스럽다. 이제 와서 화가가 될 게 아니니 어떤 결과가 나와도 개의치 않고. 미미하게라도 그림이 나아지고 스스로의 만족감만 올라가면 된다. 게다가 선생님이 계속 “잘한다 잘한다.” 칭찬을 해주시니 어린 아이처럼 기분도 으쓱해진다.
이 곳이 미술 치료를 하는 곳이어서 치료차 방문하신 분들도 있는 것 같다. 난 자아 도취 내지는 무한 긍정성을 치료해야 하는데. 주장하고픈 것은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건 정신건강에 무엇보다 중요하다. 지금까지 이 험난한 세상에서 버텨온 삶은, 결과가 어떠하든 누구나 칭찬받아 마땅하지 않을까?
그러니 타인이 찬탄하지 않더라도 내가 수고한 내 자신을 매일 다독여주면 된다. 사실상 내가 존재하지 않으면 세상 무엇도 상관 없지 않는가? 요즘에는 건강을 최우선으로 두고 있다. ‘나의 건강을 위해서’이라는 단어를 떠올리면 어떤 불쾌한 감정이나 물질에 대한 욕심이 스며들 틈이 없다. 노란 산수유가 제일 먼저 와글와글 반겨주는 호수 주변을 씩씩하게 돌며 다 필요 없고 건강하게만 살자고 다짐했다.
늘상 그런것처럼 수채화를 그리면서도 자기 만족감이 드높다. 선생님이 계속 칭찬을 해주시기도 하고 어떤 일에 대해 기대감이 높지 않기 때문이다. 기대감이 낮으면 만족감은 올라간다. 마음대로 색을 고르고 칠하며 무의 상태에서 정신을 놓아주고 몰입하는 시간 자체가 즐거우니 결과물은 그리 신경 쓰이지 않는다.
원래 디테일에 약해서 전체를 보기 때문에 작은 실수라든지는 가볍게 넘긴다. 멋있게 포장하여 말하자면 나무보다는 숲을 본다. 마음 한구석에 아쉬움이 남아있기는 해도 내려놓으려 노력하고. 이제 시작했으니 앞으로 더 잘 그리면 된다. 직업이 화가가 아니니 전문가가 될 필요도 없고.
INFP는 ‘게으른 완벽주의자’ 라더니 인간이란 원래 완벽하지 못하니 아예 완벽하기를 포기하는 것 같다. 어떻게 보면 패배자로 보일 수도 있지만 나름의 우여곡절을 통해 살아가는 방법을 터득한 인간이다.
나무를 그릴 때 스케치한 선을 넘어가면서 칠할 수 있어서 기뻤다. 수채화는 색의 농도를 잘 조절해야 하지만 또 원하는대로 붓질을 슥슥해도 된다. 틀에 박히는 것을 선호하지 않기 때문에 이 점에서 수채화의 매력을 다시금 느끼게 되었다. 똑같은 붓질은 매력이 없다면서 선생님이 선을 넘어 더 과감하고 다양하게 터치를 해주셨다.
나무를 스케치하기 시작했다. 그림을 잘 못 그려서 다짜고짜 나무를 그리라고 하셔서 당황스러웠지만 선생님의 꼼꼼한 지도를 받으며 그림을 그려나갔다. '왜 나는 나무도 자아를 표현하여 뚱뚱하게 그리는가?' 몸통과 잎의 크기를 조절하고 옅은 색을 전체적으로 입히고 점점 진하게 2단계, 3단계로 색을 덧입혔다. 선생님의 마법의 손길로 그림은 점점 완성되어갔다. 절반은 선생님이 그리시는 듯.
‘뿌리기’라고 해서 붓에 물감을 묻혀 점점이 뿌리는 방법이 있다. 아주 마음에 들었다. 붓에 물감을 뭍히고 다른 붓에 두드려 마음껏 뿌리면서 떨어지는 잎과 벚꽂을 표현해 보았다. ‘내 스타일이구만.’ 뿌리기를 하면 그림이 한층 환상적으로 보인다. 마구 마구 뿌려서 흩날리는 벚꽃을 표현해보았다.
수채화는 인내가 필요하다. 첫 번째 색을 입히고 그 위에 좀 더 진하게 계속 농도를 짙게 그려가는 데 처음의 색이 마르기를 기다려야 한다. 나뭇잎을 그리고 마르기를 기다리지 못해서 그 잎 사이에 언뜻언뜻 보이는 나뭇가지는 잘 표현이 되지 않았다. 다음에는 급한 마음을 다잡고 천천히 그려보리라.
이리하여 회원분께서 가져오신 오븐에 구운 고구마를 먹고 간간히 수다를 떨며 즐거운 수채화 시간을 보냈다. 동네 마실 나온 아주머니와 비슷하나 심오한 예술의 세계에도 잠깐 들어갔다 나왔다 했다. ‘간만에 비대면 만남이 참 즐겁구나.’라는 생각이 든다. 요즘 사회성이 날로 줄어드는 것 같은데 이제 조금 더 사람을 만나야 할 때가 다가오나 보다.
“마음이 우울하면 그림을 그려야 한다.”고 갑자기 침묵이 가득한 공간을 깨고 결연하게 선언하듯이 주장하시는 회원분의 말에 깔깔 웃었다. 스케치북에 숙제까지 열심히 그려오시면서 그간 마음의 치유를 상당히 받으신 것 같다. 어쩌면 ‘나의 존재와 능력에 대한 인정’이 우리를 점차로 치유할지도 모른다. 오랜만에 인간 세상에 나오니 웃음이 절로 난다.
앞으로 회원분들과 호수도 산책하고 사진도 찍고 할 계획이 있어서 간만에 소통이 있는 세상에서 살아보게 될 것 같다. 불특정한 만남이 약간 두렵기도 하지만 두렵다고 나서지 않으면 누구를 만날 수 있으리. 그나저나 나의 수채화 사랑은 어디까지 이어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