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리에서 만난 그 젊은이들
LA 하면 떠오르는 것은 쨍한 태양, 탁 트인 해변, 그리고 할리우드다. 특히나 숙소가 Hollyewood Boulevard라고 할리우드 메인 스트릿 근처여서, 집 밖으로만 나오면 마치 오랜 꿈을 품고 할리우드로 상경한 영화배우라도 된 듯한 기분이다.
짧은 시간 동안이었지만 거리와 우버 안에서 만난 젊은이들 중에는 영화에 관한 꿈을 품은 이들이 많았다. LA의 모든 사람들이 영화 관련 일을 하지는 않겠지만, ‘영화 ’에 초점을 두고 도시를 관찰하니 그 부분이 더 줌인된달까. 예를 들어, 우버를 타고 돌아다니다 보면 어떤 택시 기사들은 말을 걸어서 스몰 톡(잡담)을 나누기도 하는데, 그러다 보면 타는 손님들마다 뭐 하면서 생계를 꾸리는지 이야기가 나올 때가 있다. 나야 관광차, 또 인터뷰 프로젝트 차 왔다고 하지만 어떤 사람은‘오늘 오디션을 봤는데 제발 붙었으면 좋겠어요’로 말문을 열기도 했고, 애니메이션 회사에 다닌다거나, 그래픽 담당 일을 하고 있다는 사람들도 있었다. 다 각자의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일 테지만, 내 눈에는 그게 그렇게 멋져 보였다.
게다가 이틀 전에는 ‘제프리 친(Jeffrey Chin)’이라는 중국계 미국인 감독 분과 그분의 영화인 친구들을 자택에서 만나기도 했다. 미국 대사관 분께서 소개해주신 덕분에 나는 ‘제프리 친’에 대해 알게 되었고, 나 스스로를 ‘한국 영화 업종에서 일하고 싶은 꿈이 많은 대학생이며 인터뷰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라고 소개하며 시간이 된다면, 한 번 만나자고 했다. 과연 답장이 올까 두근거리던 차에, 토요일에 친구들과 피자 파티를 하는데 초대하고 싶다는 연락이 온 것이다! 신이 났다. 가지 않을 이유가 없다.
우버를 타고 할리우드 시내를 벗어난 주택가에 도착했다. 작은 수영장이 가운데에 있고, 수영장을 중심으로 두 개층의 다세대 주택이 미음 자로 둘러져있는 빌라였는데, 제프리와 동료들은 소규모의 피자 파티를 열고 있었다. 감독인 제프리를 중심으로, 영화 음악을 제작한다는 조지 쇼, 아직 USC에서 현대 음악을 공부 중이라는 여자분(잠깐 얼굴만 비추고 가서 이름이 기억나질 않는다), 슬럼독 밀리어네어의 주인공 형으로 출연했다는 영화배우 비비쉬 시바쿠르, 음악 퍼포먼스 전공생인 헨리 최까지 한데 모여 이야기를 나누었다.
너희 나라(우리나라)에서도 대통령을 탄핵하기 위해 시위를 하고 있다는 기사를 봤어. LA 시내에도 엊그제 반 트럼프 시위가 크게 있어서, 교통이 다 마비될 정도였다는 거 아니?.
나라가 안정되길 바라는 우리들 만큼이나, 자기 나라의 미래에 대해 걱정하고 있는 미국의 젊은이들이었다. 각자 무슨 일을 하며 살고 있으며, 최근에 트럼프가 대통령이 되어서 LA 사람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온다는 시위 얘기까지, 즐겁게 웃음꽃을 피웠다. 끽해야 나와 3-4살 밖에 차이 나지 않는 이들이었다. 이렇게 막무가내로 찾아온 외국인을 자신들의 세계로 초대해 삶의 일부를 공유하는 마음의 여유와 따뜻함이 참 고마웠다.
그리고 오늘 이 이야기를 쓰고 있는 이유는 ‘제프리’때문이다. 그가 특히 흥미로운 인물이었던 점은 사람 좋아 보이는 인상 때문만이 아니었다. 알고 보니 그는 ‘내 운명은 내가 개척해’ 타입의 인물이었다. ‘수천 통의 Cold Call (전화를 통해 고객을 설득하는 영업전화)’을 통해 무일푼에서 시작해 대형 영화사와 지역 펀딩으로부터 각종 영화 장비와 투자금을 지원받아 자신의 영화를 처음 찍었다. 제프리는 중국계 미국인인데 부모님은 두 분 다 법조인이었다. 여느 아시안 부모님들처럼 그는 부모님으로부터 대학을 졸업하고, 영화감독이 아니라 법 공부를 해보라는 권유도 받았다. 제프리는 그게 싫었다. 대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한 편만 영화를 찍어보고 안 되면 그렇게 하자고 했단다. 그렇게 해서 친구와 함께 음향 장비 하나만 들고, 온갖 곳에 연락해서 지원금을 모았고, 그렇게 찍은 작품이 ‘LIL TOKYO REPORTER’였다. 1930년대, LA의 리틀 도쿄의 리더이자 출판가였던 일본인 ‘세이 후지이’의 삶의 궤적을 그린 작품이다. 그는 미국 시민권자가 아니어서 변호사가 될 수 없었지만, 꾸준히 미국의 차별적인 법 제도와 싸워 미국 내 일본 의사들이 처음으로 일본인 병원을 설립하도록 하는 등 일본계 이주민들과 그들의 후손을 미국 주류 사회와 연결시켜 주는 초석을 마련했다. 미국 내 이방인이자 비주류였던 아시안들이 어떻게 정착하고 살아남는지 희망의 과정들을 그린 것이다.
이 이야기는 중국계 미국인으로서 일본인의 삶을 조명하는 특이한 시도였을 뿐만 아니라, 나중에 그의 인생에도 큰 전환점이 되었다. 이 작품으로 제프리는 미국 내 지역 영화제에서 각종 상을 수상했기 때문이다. 그 후 2016년 어느 11월, 토요일 점심, 그는 이런 날이 올 줄 몰랐겠지만, 그는 그의 친구들과 여느 20대처럼 집 앞 수영장에서 한담을 나누고 있다. 편안한 옷차림으로 둘러앉아 이번 주말에는 또 어떤 유튜브 동영상을 제작할지를 이야기하면서... 물론 또 다른 작품을 찍기 위해서는 또 자금이 필요할 테지만, 이제 제프리는 아무것도 없는 학생이 아니다. 시도를 했고, 작품 하나를 완성했고, 목표를 이루었다. 그리고 그 작품 경력으로 FOX(미국 방송사) 네트워크의 보조 피디로 일을 하고 있다.
제프리의 이야기를 들으며 부러운 마음과 감탄이 동시에 떠올랐다. 좋아하는 일이라면 한 번이라도 시도해보는 그의 개인적인 용기와, 그런 도전을 무모하다고만 보지 않는 사회적인 분위기 모두가 부러웠다. 그들이라고 막연한 꿈을 위해 시도하는 것이 왜 두렵지 않았을까. 또 배우 친구의 경우, 배역 한 번을 따기 위해 무수한 오디션을 거쳐야 하는 게 왜 힘겹지 않았을까. 대신 그들은 그 두려움에 멈추느니 그냥 정면으로 두려움을 마주했고, 어떤 결과에도 ‘그럼에도 다시 하는’ 방식을 택했다. 무엇보다 제프리 자신에게 영화를 제작한다는 꿈은‘과정의 소중함’이지 ‘결과의 중요성’이 아니었다. 게다가 그런 제프리의 꿈을 응원 해준, 펀딩 해준 사람들이 있었음을 보면서 개인의 꿈을 지지해주는 사회적인 분위기도 뒷받침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나라였으면 아이디어만 있고 실패할지도 모르는 프로젝트를 위해 지역 사회가 한 젊은이를 온전히 응원해줄 수 있었을까. 게다가 영화 직종을 늘 동경해왔어도, 워낙 불안정한 투자 생태계, 열악한 제작 환경 등 ‘여자 애가 열정만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야’라는 이야기를 귀에못 박히게 들어오면서, 한 편으로는 ‘네가 너무 노오오력이 부족해서 그래’라는 말도 듣는 세대로서는, 누가 되었든, 내 꿈의 크기가 무엇이든, 꿈을 위해 한 번은 시도해보게 해주는 환경이 부러웠다.
게다가 이야기를 나누면서, ‘미국식 표현의 자유와 타인의 개성을 존중해 주는 태도’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게 되었다. 우선 이들은 언제나 그들 자신의 몫을 위해서 목소리를 낼 준비가 된 것처럼 보였다. 트럼프에 대해 이야기하며 또 시위에 나가자고 하고, 미국 내 영화계에서‘아시안’이 제대로 그려지지 않으면 제대로 그려지지 않아서 불공평하다고 각종 기사들을 퍼 날랐다. 부족하면 부족하다고 정부와 지역 사회에도 끊임없이 요청했다. 그렇다고 권리만 바라며, 본인의 의무를 다 하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물론 모든 미국 젊은이들이 이들 같다고 할 수도 없고, 이 젊은이들 이바라는 이상적인 세상은 언제 올지도 모르지만, 더 나은 세상이 오길 바람에 어떤 목소리라도 내며 각자의 자리에서 하고 싶은 일을 즐겁게 해나가는 게 인상 깊었다. 단기적으로 열심히 살면서, 장기적으로 긍정하는 모습이랄까. 우리와 비슷하면서도 또 다른 모습이었다.
이야기가 무르익다 보니, 제프리도 내게 물었다. 이런 인터뷰 프로젝트를 하게 된 동기가 뭐냐고.
한국은 교육열이 높은데, 부모님들이나 사회에서 바라는 ‘성공하는,’ ‘이상적인’ 직업들이 몇 있어. 또 갈수록 취업이 힘들어지면서, 많은 젊은이들이 안정적인 직장을 찾고, 예를 들어, 이런 영화 쪽 일은 아무나 할 수도, 꿈꾸기도 어려워지고 있지. 그래도 나는 미국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의 다양한 인생 여정을 조명해보고, 그들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었어. 다양하게 살아도 좋다고. 또 그러기 위해서 가장 약한? 위치에 있다고도 볼 수 있는 동양인 여성 중에 미국에서 성공한 사람들을 만나서 이야기를 듣는다면 더 좋지 않을까 했지. 틀에 맞춘 것처럼 우리는 다 똑같은 인생을 살기 위해 태어난 게 아니잖아.
이미 ‘다양성’에많이 노출되어 있는 이들이 과연 ‘한국 문화의 획일적인 모습’을 이해할까 싶어서 최대한 구체적으로 이야기했다. 물론 고개는 끄덕였지만 완전히 이해한 것 같지는 않았다. ‘That’s awesome~’ (미국인들은 뭐만 하면어썸이 많이 나온다) 하면서 웃는 모습에 어느 정도 안심은 했다. 그러면서 미국에 오고 나서 전과 다르게 바뀐 내 모습에 나도 놀랐다. 한국에서는 분위기를 봐가면서 내 의견이 지나치게 강하게 표현되지는 않을까 조심스러울 때도 있었는데, 여기에서는 그런 걱정 없이 내 이야기를 온전히 드러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나만의 독특한 이야기’가 있는 그대로 흥미롭게 받아들여지니 기분이 좋았다. 한국에서는 친구 무리 내에서, 비슷한 의견을 내고 동조하다 보면 친해지기가 쉽고, 튀면 눈 밖에 나기 쉬웠던 반면, 여기서는 ‘내가 이들과 다름’을 그대로 드러내도 오히려 어필하는 게 되고, 어색한 마음의 벽을 허물기에도 더 좋다고 느껴졌다. ‘다름’을 존중하고 좋아해 주는 문화에서는 나도 상대의 개성을 더 존중할 수 있게 될 뿐만 아니라, 나도 더 존중받을 수 있게 된다고 느꼈다.
그게 우연한 만남으로 이어진 토요일의 Chill Out이었다.
같은 지구 위에 있지만, 비슷한 꿈을 꾸고, 다른 방식의 삶을 사는 젊은이를 만났다니... 복합적인 감정이 들었다. 메일 한 통이 새로운 세계로 나를 인도하고, 그 인연으로 내가 알던 세계를 깨고 나올 수 있구나 감사했다. 심지어는 제프리가 USC의 친구를 소개하여 주어, 내일은 처음으로 미국 내 최고의 영화 학교 중 하나인 USC 내부 투어도 하게 되었다. 미국은 원래 이렇게 사람을 잘 연결해주는 건가? 고마우면서도, 새삼 사람 일은 알 수 없는 거고, 무작정 거리에 나서는 일이 이렇게 즐거운 거구나 싶었다. 내가 가고 있는 이 길이 최종적으로 어디를 향할지는 모르겠지만 되돌아봤을 때, 참 잘 지내왔네 싶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