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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미셸 Michelle Dec 26. 2019

[리뷰] 광기와 외로움의 갈림길에서

영화 '고흐, 영원의 문에서'를 보고

12월 23일 저녁 특별 시사회에서,

'고흐, 영원의 문에서'라는 영화를 보고 왔습니다.

루미네 분들의 감사한 표 협찬 덕분에 보게 되었습니다.

부족한 글솜씨에도, 리뷰단 중 하나로 선정해주신 점,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다만, 고흐의 생각의 흐름과 집념,

자연을 사랑하는 섬세함 등을 좋아하는 고흐 팬 중 하나로서 무척 기대했던 영화였고,

개인적으로 인도네시아에서 온 친구도 데리고 영화를 보러갔기에 더욱 기대가 컸던 듯 합니다.

(더불어 '러빙 빈센트'도 매우 재밌게 본 인생 영화 중 하나인 상태로요.)


하여, 이렇게 높은 기대를 품고 갔던 사람의 리뷰임을 미리 밝힙니다. :)






영화를 볼 때 흔히 우리는 영화는 스토리를 말해준다고 하지, 보여준다고 하지 않습니다.

(영화가 보는 건데 무슨 소리야?라는 생각이 드실 수도 있겠는데요)


덧붙임 설명을 하자면 아래와 같습니다.


영화가 가진 본질적인 한계 때문입니다.

영화를 통해서 우리는 제 3자의 눈으로 등장인물들을 ‘관찰’할 수 밖에 없습니다.


하여, 책과 같은 매체 속에서 상황들을 ‘세세하게 묘사해 보여주는 것’으로

이야기 속에 마치 내가 등장하는 것처럼 공감하고, 등장인물들의 감정선을 따라가게 하는 것과 달리,

영화는 철저히 ‘타자의 시각’이 되어 ‘말해지는 이야기’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일 수 밖에 없을 때가 있습니다.


그런 측면에서 영화는 때로 책보다 더 복합적인 예술의 측면을 가지고 있습니다.


귀를 자른 후 동네 의사와 면담하는 고흐


한 방향으로만 흘러가는 한정 된 러닝 타임 안에서

등장인물들의 행동과 대사만으로 감독은

한 편의 이야기를 ‘친절하고도 명백하게 차근차근 말해주어야’하기 때문입니다.


관객들이 모두 다른 배경과 시선을 가지고도,

동일한 메시지를 따라가며 몰입할 수 있도록,

마치 양떼들의 목자가 된 듯 친절한 안내자가 되어주는 것이죠.


하지만 이번 ‘고흐, 영원의 문에서’라는 영화에서는 그 안내가 다소 불친절하다 느꼈습니다.


고흐의 작품 세계와 철학 세계 등을 좋아하고

그의 자연과 그림에 대한 결연하고도 숭고한 열정과

사람을 대할 때에는 한없이 순수하고 섬세한 태도 등을 아는 관객으로서

고흐에 대해 기대하고 있었던 선입견이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여 이 리뷰는 철저히 주관적인 관점에서 쓰인 것임을 밝히며,

영화 표를 협찬 받아 감사하게 감상을 하게 되었더라도

제 개인적인 솔직한 후기를 남기는 것이 저와 이 영화를 기대하고 보실 분들께 

다양한 논의의 시작이 되게 해 영화를 다양한 시각으로 해석하도록 돕지 않을까 싶어 

다소 직설적이고 개인적인 리뷰를 남깁니다.






‘고흐, 영원의 문에서’ 이야기로 드러나는 고흐는

‘영혼의 편지’에서 읽히는 고흐의 심성과 필체, 입체적인 인물로서의 고흐와는 전혀 다른 모습입니다.


영화 도입부에서 고흐는 광활한 대지를 돌아다니는 인물입니다.


목적이 있는 결연한 상태라기 보다는,

자연의 향취에 취해 비틀거리는 방랑자에 가까운 느낌을 받았습니다.


자연의 아름다움을 만끽하는 방랑자 고흐


게다가 다소 비정상적인(?) 혹은 폭력적인(?) 행동도 합니다.

 

염소를 치는 여인에게는 다가가 작품에 담고 싶다며,

불편한 자세를 다소 강요(?)하기도 하고,

마음이 가는 풍경들에는 흠뻑 녹아들어 흙을 흩뿌리거나

화면 한 가득 채워지는 들판을 하염없이 걸으며 방황합니다.


하지만 자연을 떠난 고흐는 언제나 외지인이고,

주류에 스며들지 못하는 비주류입니다.


영화 도입부에서 화단의 사람들이

결의를 다지며 자신들의 이익들에 대해 논할 때,

어렴풋한 불만을 가지고 있더라도 고흐는 그 틈에 끼어들지 못합니다.


고흐의 성향에 대해 제가 설득되지 않았기에,

고흐가 원하지 않아서였는지,

그럴 능력이 없어서였는지,

아니면 무관심해서였는지는 불명확했지만,

어쨌거나 고흐는 한창 벌어지는 논의에서 열외에 있습니다.


물론 고흐보다 훨씬 도전적이고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고갱은

또 다른 계층을 만들어내는 것이냐며 화를 내 화단의 여론을 뒤흔든 뒤 자리를 뜹니다.


(영화 전반에 걸쳐 고흐와 고갱은 성향 면에서도 선명히 대비됩니다.

영화 마지막 부분에서 고흐는 샛노란색으로 묘사되는 반면,

고갱은 스스로를 불타는 빨간색이라고 합니다.

그 정도로 이 둘의 성향 차이는 명확합니다.)


열정적이나 들판의 자유로운 황소 같았던 고갱


하지만 영화에서 고흐는 고갱과 친구가 됩니다.


다만, 이후 고흐는 고갱과의 짧은 우정 어린 시간을

프랑스 남부 아를에서 보내면서

마치 바람 앞에 위태로워 보이는 촛불처럼

불안정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에 고갱이 떠나기로 하자, 고흐는 반쯤 미쳐 버립니다.


외로웠던 아를에서의 생활에서

동생 테오를 통해 아프리카의 어느 섬으로 훌쩍 떠난

고갱을 프랑스 남부로 불러오는 것으로 설득해 

한 때 고갱과 함께 예술을 논하며 작품을 완성하는 행복한 시간들을 보내지만,

이내 고갱은 그림이 팔리고 평단에 알려지기 시작하면서 파리의 삶으로 돌아가는 것을 택하기 때문이지요.


고갱과 행복한 한 때를 보내던 고흐


영화는 그런 고흐의 심리에 따라

뿌연 화면 처리를 바탕으로 고흐의 심정을 관객이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려 합니다.


(이 뿌연 처리는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스토리 텔링 기법 중 하나입니다.

고흐가 먹먹함과 어쩔 줄 모름을 느낄 때면, 화면의 절반 이상이 눈물 젖은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처럼 화면이 변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영화의 초점 자체가 어쩌면,

희망과 열정으로 가득찼던 고흐의 초장년기보다

고갱을 떠나 보내고, 귀를 자르기도 하며,

외로움과 내면적인 갈등에 사로잡힌 중년기 이후에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지금 돌아보면 어쩌면, 영화의 제목도 그래서 '영원의 문에서'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영화는 고흐의 전 생애가 아니라,

고흐가 영원 불멸의 존재가 되기 직전,

즉 죽음으로 넘어가기 직전, 저 세상으로 가기 직전인 '문 앞'에서의 나날들에 초점을 맞췄으니까요.




또 다른 흥미로웠던 점은

고흐의 이야기를 전달하는 영화적 기법입니다.


마치 고흐의 광기 어린 모습과 세상에 이해 받지 못하는 모습을

더욱 부각시키기라도 하고 싶은지,

고흐와 대화를 나누는 주변인들을 통해 고흐의 입을 엽니다.


영화 속에서 감독은 

고흐가 자연과 하나되거나,

그림을 그리는 붓터치에 열중할 때를 제외하면

다른 인물들을 고흐 앞에 앉혀 두고 

고흐와 이야기를 나누게 합니다.


인터뷰 형식처럼 고흐의 내면 세계를,

고흐의 이야기를 관객에게 전달하려는 것인 듯 했습니다.


하지만 다소 안타까웠던 점은,

이렇게 제 3자에 의해 그려지는 고흐의 모습은

고흐의 섬세한 내면을 부각시키기 보다는,

제 3자들의 시선을 통해 고흐가 이상한 사람이었다는 것에 더 가깝게 느껴지게 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만일 그게 감독의 의도였다면, 의도가 잘 살아났다고 생각합니다.)


고흐를 정신 병원에서 꺼내주기 위해 찾아왔던 신부


다만, 고흐를 바라보는 당대 사람들의 시각,

고흐를 이상히 여기는 당대인들의 시각이 이 영화의 중점이 아니었다면,

고흐의 외롭고, 수척해진 내면에 더 집중하기에

그러한 스토리 텔링 방식은 다소 난해하게 여겨졌습니다.


귀를 자르고 정신 병원에 가기 전까지

고흐와 이야기를 나누던 의사와의 대화 속에서도

정신 병원에서 다시 외부로 나올 수 있을지 판가름하는

신부님과의 대화 속에서도 고흐는 내면의 무언가를 표현하고자 하지만,

그 무언가는 어쩌면 제가 알고 있던 고흐와는 너무 이질적이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대체로 고흐는 영화 전반에 걸쳐

심약하지만 자연을 집착적으로 사랑하는 ‘미치광이’로 묘사되고 있는데,

고흐 삶의 전반적인 이야기를 아는 관객이라면

과연 납득할 수 있는 묘사일까 불편한 마음도 들었습니다.


테오와의 관계에서도 고흐는 다소 의존적이거나 심약한 모습으로 비춰집니다.


실제 테오는 고흐가 지속해서 예술을 추구할 수 있도록,

형이 형만의 세계관을 가지고 신념을 지속할 수 있도록

경제적, 정신적으로 도움을 주는 후원자였습니다.


하지만 영화 속에서 테오는 그런 도움을 주기도 하지만,

심약해진 고흐를 품으며 달래는 모습도 등장함으로서,

어쩐지 고흐와 동등한 위치, 혹은 형의 예술 세계를 믿어주고 지지해주는 후원자이기 보다

고흐 내면의 광기와 어리광을 안심시켜주는 아버지 같은 모습도 보입니다.


약해진 고흐를 품어주는 테오


저는 이러한 인물들의 관계에 있어서,

실제 고흐와 영화가 그려내는 고흐의 차이에서 오는 괴리감을 떨어트려 둘 수 없었습니다.


물론 감독이 전하고 싶은 메시지는 무엇인지,

제 짧은 식견으로는 그 깊은 뜻까지 헤아리지 못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또 물론 하나의 정답, 하나의 메시지가 정해진 영화라고 하더라도

다양하게 해석해 새로운 스토리로 피어날 수 있도록 돕는 영화가 좋은 영화인 것도 맞습니다.


게다가 고흐를 ‘지속하는 열정의 화신,’ ‘세상의 잣대에 굴하지 않고, 자신만의 세계관을 유지하며 나는 그래도 그림을 그릴 것이다’고 했던 하나의 이미지로서 소비하는 것만도 너무 단편적인 접근일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고흐는 ‘외로움과 광기 앞에 흔들리던 유약한 영혼’ 

하나만으로 그려지기엔 너무나도 아쉬운 인물입니다.


물감이 없고, 돈이 모자르지만,

진정한 예술에는 시간과 끈기, 힘들더라도 매일 갈고 닦는 끝없는 노력이 꼭 필요하다고 테오를 설득하고

지금 당장의 그림이 팔리지 않더라도 붓질을 멈추지 않을 것이라며 무수한 작품들을 완성해냈던 고흐입니다.



그림에 담는 자연과 사람들에게서 형언할 수 없는 숭고함을 발견하고,

자신의 그림이 혹여 그 반짝임을 다 담아내지 못하게 될 때의 아쉬움과 부족함으로

스스로를 지속해서 채찍질하며 새로운 그림들에 그만의 영혼들을 불어넣던 고흐입니다.


또 서툰 첫사랑에 실패했지만,

그 자신도 궁핍하고 보잘 것 없는 사람이지만,

임신한 몸으로 거리에 버려져 병으로 죽어가는 임산부를 구해내어 

아기를 출산하고, 끝내  삶을 지속할 수 있도록 도와주던 고흐입니다.


실제 그가 작성한, 테오에게 보내는 600통이 넘는 편지에서 고흐는 전혀 다른 사람입니다.


영화에서의 고흐는 ‘그림은 영원히 남으니까’라는 모토를 바탕으로 

고흐가 그림을 지속해 그려나가는 것처럼 그려지는데,

실제 고흐는 영원히 후대에까지 그림을 남기기 위해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물론 위대한 그림을 그리고자 했고,

그림을 통해 영원에 가까워지고자 했지만,

그는 ‘예술의 본질’에 가까워지기 위해 노력하다 보면 그 끝에 가닿을 것이라고 믿었기에

그림 그리는 것을 멈추지 않았기에 영원한 별이 되었던 것이지

영원이 되기 위해 그림을 계속 그려나간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고흐가 테오, 그의 친구 고갱과 나누었던 600편이 넘는 서신을 추린 에세이집,

'영혼의 편지'를 읽으시면 그 섬세한 내면 세계와 고흐라는 인물의 입체성을 더 깊이 이해하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저의 이러한 평가가 이 영화 전부를 평가하는 목소리의 전부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고흐의 사상과 삶을 좋아하는 한 팬이었기에,

그가 그려지는 모습에 선입견을 지닌 채 다가갔을 수 있습니다.



하여 저는 오히려 고흐를 모르는 사람들은 이 영화를 통해 고흐의 어떤 모습을 느꼈을지,

혹은 이미 고흐를 알고 있던 사람들은 이 영화를 통해 고흐에 대해 어떻게 생각이 바뀌었는지 궁금합니다.



또 개인적으로 이 영화를 통해 고흐의 새로운 모습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고흐라는 한 사람이 광기와 외로움을 지니고

어떻게 삶의 마지막 순간에 다다르는지 

지금까지 우리에게 익숙했던 고흐의 모습과 다르게

그의 말년이 어떻게 전개 되었다고 생각하는지.


그리고 고흐를 바라보는 감독의 시선은 어떠했는지,

새롭게 알게 될 수 있었고,

그의 삶을 이렇게도 표현할 수 있구나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다만,

고흐와 고흐를 둘러싼 주변 인물들을 통해

마지막까지 철저히 외지인이었고, 

죽을 때까지 죽음의 원인을 밝히지 않으며

외로움에 스러져간 영혼으로서의 고흐는 

우리에게 어떻게 영원이 된 것인지,

영화를 뛰어넘어 그의 삶과 연관시켜 생각해볼 수 있다면

더 풍부하게 영화를 감상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는 평생 외지인이었고,

주변인들에게 이해받지 못해 광기와 외로움의 갈림길에서 고뇌하기도 했지만,

결코 자연과 사람에 대한 애정을 잃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를 영원의 문으로 인도한 건,

그 따뜻한 영혼 덕분이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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