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phora VP/Creative Director 총괄 : 이보영 님
-2-
#학업적인 선택의 배경
#첫 직장을 선택하신 계기
#커리어 선택의 기준
#영어를 극복하신 비결
#학업적인 선택의 배경
이화여대의 불어불문학을 하시다가 Rhode Island School of Design에 다시 입학하여 Graphic Design을, Royal College of Art에서 Communication Design 석사 과정을 하신 걸로 보았습니다. (미국과 영국도 학습 분위기가 다르다고 말씀하신 인터뷰를 읽어보았습니다.) 어떻게 이런 경로들을 선택하셨나요?
어렸을 때는 디자인을 하고 미술을 너무 하고 싶었는데요, 부모님께서는 미술 공부는 취미로 하는 거지 공부나 하라고 하셔서 그냥 인문계를 갔어요.
보영 님께서는 디자인 전공자가 아니셨고 부모님의 권유로 전혀 다른 분야를 가셨다. 이야기가 점점 흥미로워지고 있었다.
사실 제가 지금 하는 일이 굉장히 개념적인 사고력 하고, 그걸 눈으로 보고 시각적으로 예쁘게 만들 수 있는 능력, 그리고 다시 또 그걸 커뮤니케이션하는 능력도 같이 있어야 하기 때문에 딱 인문학과 예술적 감각이 합쳐져 있는 거거든요. 그런데 우리나라는 예체능계, 인문계, 이공계를 고등학교 때 딱 가르잖아요. 그리고 예체능계가 아니면 절대 미대를 가는 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보니까, 게다가 저는 문과 계통이어서 선생님과 상담할 때 이렇게 진로를 가지고 대학을 가는 게 가지 않겠느냐 또 하다 보니까, 고등학교 때까지 저는 말을 잘 들어서 대학까지 온 거예요.
그러다 한 때 불문과에서 프랑스로다 같이 언어 연수를 가는데, 아버지께서 그렇게 다 애들 가는데 가면 공부가 절대 안 되니까 ‘쪼르’라는데 너 혼자 가있어야 된다고 하셔서 저 멀리 처음 혼자 보내졌어요. 당시
저는 한 살 빠르게 입학을 했는데요, 18살 때인가 프랑스에 처음 혼자 간 거죠.
걔네는 빵 시옹이라는 시스템이 있어서 거기 가족들이랑 같이 지내면서 어학원 다니고 이러는 게 있었는데요, 보니까 제가 학교에서 배우는 책이 그 집 딸내미, 아들내미 5살짜리가 배우는 거랑 똑같은 거예요. 그래서 저는 죽어도 이걸 10년을 공부해도, 저 아이들이 10년 공부하는 거랑 차원이 다를 텐데 제가 불어불문과를 공부하고 있다는 자체가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하던 차에, 태국에서 온 여자 친구를 만났어요. 태국 이슬람 계통 쪽 종교를 믿는 집안이었는지, 자기는 태국에서 가출을 해서 미술 공부를 하러 프랑스로 왔다는 거예요. 그때 이 친구랑 얘기하는데, 너는 바보같이 미술을 하고 싶으면, 미술을 하는 거지, 미술을 못 했기 때문에 미술을 한 화가들이 가장 많았던 프랑스에 와서 미술을 한다는 게 말이 안 되는 거라고 그러기도 했죠."
보영 님의 말씀 속에서 초등학생 프랑스 아이들이 읽는 책을 쥐고 당황하시는 어린 여대생의 모습이 그려졌다. 그 짧은 찰나에 그런 생각을 떠올렸다는 게 대단하면서도 보영 님께 영감을 준 태국 친구의 말을 아직까지도 기억하고 계시다는 게 보영 님 인생의 큰 변곡점이었겠구나 싶었다. 보영 님께서 들려주시는 이야기는 너무 맛깔스러워서 나도 모르게 즐겁게 듣고 있었다. / 그렇다면 아버지는 어떻게 설득하신 걸까? 이야기가 이어졌다.
“대학교를 못 가게 하셨을 뿐이지 그래도 아버지가 국민학교 때부터 고등학교 2학년 때까지 계속 미술을 그리게는 해주셨었거든요? 그래서 그다음 해에는 여름이 되어서, 미술 관련한 공부를 해보고 싶다고 했더니 아버지께서 막 또 찾아보시더니 그럼 Rhode Island School of Design이어야지 다른 데는 안 된다고 하셔서, 가서 하긴 했는데 그런 적은 처음이었어요.
한국에서 학교 다니면서 미술공부를 하다가 화실도 갔다가 했지, 미술만 해본 적은 없었거든요. 그런데 해보니까, 6주를 밤을 새우며, 잠을 안 자고 그렇게 일을 해도 그렇게 행복한 걸 처음 느꼈어요. 그리고 내가 다시 와서 불어 공부를 할 생각을 하자니, 발쟈크 등등을 생각만 해도 어려운 거예요. 그래서 휴학을 하고 싶다고 부모님께 잘 말씀을 드렸어요. 사실 싫어하셨는데, 할머니께 말씀을 드린 게 계기가 되었어요.
사실 할머니께서 너무 미술공부를 하고 싶었는데, 할머니의 아버지께서 못 하게 하셨대요. 그런데 할머니가 아기를 7명을 다 낳으시고 미술 공부를 시작하셨거든요. 그런데 사실 고모들도 다 미술 쪽을 하세요. 그런데 저만 우리 아버지가 못 하게 하셨으니까, 제가 할머니께 말씀을 드리니 할머니께서 딱 아버지한테 전화를 하셔서, 내가 너 어려서 클 때 뭐 해라 뭐하지 마라 한 적이 없는데, 걔도 자기 하고 싶은 거 하게 두어라고 말씀을 해주셔서 그래서 미술로 바꿀 수 있었어요.”
보영 님의 이야기를 들으며 여러 생각이 들었다. 왜 사람의 인생이 운, 환경, 노력의 3합으로 이루어진다고 하셨는지 알 것 같았다.
든든한 지원군이셨던 할머니 의도 움, 그리고 딸을 생각해 주셨던 아버지의 도움까지 보영 님의 곁에는 감사한 지원군이 있었다. 하지만 그 과정 속에서 보영 님은 진정으로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외면하지 않았다. 보영 님을 믿어줄 수 있는 지원군을 찾아가 솔직한 심정을 말씀드렸고 보영 님의 지원군은 보영 님 곁을 지켜주셨다.
좋아하는 일이 생기고 그걸 진짜로 해내고 싶다면, 주변의 든든한 지원군을 찾는 것도 방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이야기가 이어졌다.
“그때는 참 역경을 딛고 뭐한 것 같은 느낌이었는데, 지금 가만히 생각해보니 아버지 덕분에 공부를 열심히 해서 인문학적인 능력과 글 쓰고 책을 읽는 능력을 키울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어려서 정말 책을 읽는 걸 너무너무 좋아했었거든요. 불문과 갔을 때 막 싫어서 간 건 아니고요, 내가 이렇게 해서 글을 쓸 수도 있고, 번역을 할 수도 있고 하겠다는 생각 때문에 갔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런 인문학적인 배경과 미술 관련했던 게 있어서 Creative Direction을 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왜냐하면 사실 Creative Direction은 인문적인 콘셉트를 만들고 그 콘셉트를 비주얼로 바꾸고 비주얼 한 걸 다시 커뮤니케이션이 되게 하는 거거든요. 그래서 아버지 덕분에 Creative Director가 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만약 미술만 공부를 했더라면 Designer로 남아 있었을 텐데 말이죠.
그냥 다른 공부들도 많이 하고, 책도 많이 읽고, 분석적인 사고력, 내러티브를 만들어내는 능력이라던지, Creative Directing이랑 브랜딩을 만드는 건 어떤 브랜드에 퍼스날 리티랑 내러티브를 집어넣는 거거든요. 그리고 사실 이건 인문적인 배경에서 오는 거기 때문에, 그리고 사실 지금 4팀 안에 에디토리얼 팀 이항상 같이 있을 수 있는 게 그 덕분인 것 같아요.”
이쯤 되니 나는 나도 모르게 속으로 ‘화아, 화아’ 감탄을 연발하고 있었는데, 보영 님을 도와주신 할머니 외에도 보영 님 인생에 큰 기로들에서 도움을 주신 아버지께 잊지 않고 감사하시는 보영 님의 마음 때문이었다.
또 이런 생각도 들었다. ‘성공’의 의미는 여러 가지 일 수 있기 때문에 다 퉁쳐서 ‘성공한’이라고 표현하기는 뭐하지만, 그래도 이렇게 ‘성공한’ 여성분들 뒤에는 훌륭한 아버지가 계셨던 게 아닐까. “‘성공한’ 남자 뒤에는 언제나‘훌륭한’ 어머니가 있다”는자주 듣던 프레임이었다.
그런데 이제 보니 ‘성공한’ 여자 뒤에도 ‘훌륭한’ 아버지가 있었다. 여성과 남성의 역할이 지나치게 이분화되는 우리나라환경이었지만, 보영 님을 뵈면서는 아버지가 양육에서 ‘딸’이라는 한 인격체를 건실히 만들어 내는 데 얼마나 귀하고 소중한 존재인가 떠올려볼 수 있었다.
또 “OO수저”라는 씁쓸한 표현이 난무하는 요즘 더욱 단비 같은 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초기 도움과 방향 설정이야 더 선견지명을 가지신 부모님께서 도와주실 수는 있지만, 그 이후의 행로는 결국 ‘스스로’가 할 수밖에 없고, 해나갈 수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 때문이다. -누가 시작했는지 모르겠지만 사실 나는 이 표현을 굉장히 싫어한다. 저렇게 한 번 언어로 프레임을 해버리면, 나 스스로의 처지도 그 언어에 분류해 사고하게 되고, 한 번 저렇게 닦지를 붙이면 내가 정말 바꿀 수 있는 것들이 없게끔 느껴지기 때문이다. 저 단어를 통해 현상을 분석하는 것은 좋지만, 자칫 언어로 내가 규정되어버리지 않게 주의해야 할 필요는 있는 것 같다.
그렇다면 왜 Royal College of Art에 석사 과정을 하러 가셨나요?
그때 학교 다닐 때 교수님들께 서대체로 유럽에서 오신 분들이었어요. 미국 대학교들이 생긴 근거를 보면, 2차 대전 때 유럽에서 핍박을 받던 유태인계 예술가들이 미국으로 이사를 왔거든요. 그때 만들어진 학교들이 Rhode Island School of Design, 크랩 브루 등 특히 동부 쪽에 많이 만들어졌어요. 그래서 선생님들이 항상 배워오신 유럽적인 사고를 미국에 많이 알려주셨는데, 특히 우리가 90년 대에 제일 좋아했던 미술적인 흐름, 디자인 흐름이 런던에서 나오는 게 많았거든요. 그러다 보니 런던에도 세 번 친구들이랑 배낭여행도 가고, 런던에서 나왔던 책들이라던지 디자인들 공부들을 하다 보니까, 그런 사람들, 선생님들께 배워보고 싶다는 생각을 해서 그래서 로열 컬리지 오브 아트에 갔었어요.
그리고 저는 사실 미술 공부를 예원 예고에서 한 사람도 아니어서, 그렇게 미술 공부를 열심히 한 사람도 아니었기 때문에 대학원을 한번 더 가야 어느 정도 디자인에 대한 걸 잘 이해할 수 있겠다고 생각도 했어요. 왜냐하면 로드 아일랜드 스쿨을 간 건, 이대 불문과에서 나와 편입한 전학생이었기 때문에 석사를 했어도 3년 만에 학업이 끝나기 때문에 간거든요. 다른 학점들이 인정이 되어서요. 그런 느낌 때문에 디자인, 미술 공부도 좀 더 했고요.
또 이후 보영 님은 그렇게 좋아하는 과정을 밟기 위해 과감히 ‘더 전문가들’이 모인 곳으로 배움의 여정을 떠났다. 보영 님은 예중이나 예고에서 공부를 하신 분도 아니었고, 따지고 보면 다른 사람들에 비해 시작이 늦은 것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에 개의치 않았다.
#첫 직장을 선택하신 계기
디자인, 크리에이티브 마케팅 쪽에서도 다양한 분야의 일을 해오셨던데요, 현재 Sephora샌프란 지부로 오시기까지, 뉴욕(Ralph Appelbaum)에서부터, Nylon magazine, Theory, AR Media, Limited Brands, L’Oreal, 신세계, Citizenboy 등으로 다양한 경력을 쌓아오셨습니다.
첫 직장은 선택보다는 저에게 노동 비자를 준다는 사람한테 갔어요. 다 유학생이니까, 졸업하고 나서 직장은 얻어야 되었고요. 다행히 요즘처럼 어렵지는 않아서요, 열심히 하고 포트폴리오를 잘 준비하면 노동 비자를 주었으니까요.
그래서 어느 게 제 첫 직장이라고 해야 할지는 모르겠는데, 랄프 아펠바움이었던 것 같아요. 항상 좋아했던 건 공간적인 것과 2D적인 걸 합쳐서 풀어내는 걸 좋아했는데, 랄프 아펠바움에서 그런 걸 할 수 있었었요. 뮤지엄 디자인을 하는 곳이었어요. 그래서 좋았어요. 자연사 박물관, 유태인 박물관, 뉴지엄 이런 걸 하는데, 저는 완전 베이비 디자이너일 때 뉴지엄을 했었거든요. 그렇게 일을 하면서 다시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영국 대학원을 준비했어요. 그래서 영국에서 공부를 할 때에도, 다 그런 전시 관련된 디자인에 대한 논문을 썼는데, 공간, 공간과 디지털 섞는 것, 다른 미디어를 섞는 것 등이 되게 재밌어서, 2D적인 것, 3D 적인 것 거기에 경험까지. 이런 게 되게 재밌었어요. 그래서 그것도 되게 도움이 되었던 것 같아요.
이야기 속에서 직접 맡으셨던 일이 얼마나 재밌었는지 느껴져서 내가 다 신나지는 기분이었다. 미국이나 영국은 여러 모로 박물관, 도서관 등 배움의 공간을 테마파크처럼 잘 조성해 둔다. 그런 것들을 직접 배우고 직접 풀어내셨다니 얼마나 재밌으셨을까!
첫 직장은 비교적 손쉽게 구하셨다면 이후 커리어는 어떻게 선택해오셨을까?
# 커리어 선택의 기준
저도 왜 그런진 잘 몰랐는데요, 어제 친한 친구와 통화를 하다가 이야기가 나왔어요. 랄프 아펠바움을 떠나서, 대학원을 가고, 나일론에 갔을 때 그때 편집장 이브 랜딩 부서(Branding Department)를 만드는데 너의 작업이 좋으니 팀을 꾸려줄 테니 한번 해보라고 해서 거기 가서 팀을 꾸렸다가, 그때 경기가 너무 안 좋았고, 닷컴이 크래시 되어서 레이오프도 되었다가, 레이오프가 되는 날 theory 사장님이 저희 클라이언트였는데 그분께서 전화를 하시더니, 크리에이티브팀을 만드는데 널 살짝 빼오는 건 그렇지만 기왕 일이 그렇게 된 것 크리에이티브 팀에 와주면 어떻겠니 해서 거기 가서는 아기를 임신을 해서 좀 일을 쉬었죠. 그랬다가 운이 좋아서 리미티드 브랜드의 싱크탱크, 리미티드 디자인 서비스라는 곳의 그래픽 팀을 새로 하는데 도와줄 수 있겠니 해서 또 갔다가. 그다음에 거기에서 로레알에서 슈에무라, 조지 아르마니 뷰티 팀을 만드는데 와줄 수 있겠냐고 해서 또 가고. 항상 크리에이티브 팀을 만들러 움직였어요.
팀을 만들러 움직였다’고 하시는 말씀 속에서 보영 님의 리더십이 엿보였다. 또 레이오프가 되었어도 바로 다른 클라이언트 분께 연락을 받고 하시면서 경력을 이어나가신 게 보영 님의 능력을 입증해주고 있는 것 같았다.
CitizenBoy는 제 회사였는데, 신세계에서는 브랜드 전략이나, 크리에이티브팀을 만드는데 도움을 줄 수 있겠느냐고 해서 갔는데 거기에다가 팀을 하나 만들고. 신세계 그룹 안 에버랜드 전략 팀을 만들고도 했죠. 그러고 나서 보니 세포라에서 팀을 하나를 합치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던 것 같아요. 제가 제 직원들을 다 새로 뽑았거든요. 그래서 저는 제 직원들을 뽑을 때 한국에서 온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어떡하나 걱정도 많이 했었는데, 다행히도 같이 사이좋게 지내서 얼마나 고마운지 몰라요. 팀이 5 개인 데한 팀에 20명씩 해서 총 100명이어서 되게 커요. 있는 팀은 다시 짜서, 프로세스를 바꾸는 건 해본 적이 없는 일인데, 그러다 보니까 첫 2년은 정말 힘들었는데, 지금 2년 반이 되니까 팀이 너무 잘 돌아가고 있어요.
또 이렇게 팀을 꾸리고 다니신다면, 그걸 보영 님 스스로의 힘이었고, 능력 덕분이라고 생각하실 수도 있을 텐데 보영 님은 다시 팀원들에게 그 고마움을 돌리고 지금 프로세스가 잘 돌아가고 있는 걸 기뻐하고 계셨다.
내가 원하는 가치가 내가 좋아하는 일, 잘 하는 일을 하면서 행복한 게 그게 제 가치인데 그게 안 맞게 되는 때가 있다고 생각이 되면 자리를 옮길 생각을 하게 되는 것 같고요, 그러다 보면 자주 자리를 옮기게 되는 것 같아요.
그리고 또 제 성격이 조금 막 나가는 성격인 게, 해보고 싶은 일을 한다고 무슨 큰일이 나겠어?라고 생각을 하고, 저건 너무 해보고 싶은 일인데?라는 생각이 들면 바꾸긴 하는 것 같아요.
그래서 애들이 보고 배우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기왕 하는 거면 원하는 일을 해서 살아가야 하는 건데, 내가 원하는 일을 좋아하면서 잘 하는 걸 보여줘서, 아이들이 원하는 일이 뭔지 옆에서 보고 찾아주는 게 제가 엄마의 위치에서 바라는 일이거든요. 자기들이 뭘 잘하는지, 어떤 걸 원하는지. 제가 뭘 시킬 수는 없잖아요. 다 타고 나는 건데. 제가 뭘 바꿀 수도 없고요. 태어난 그 순간부터 얘는 십몇 년 동안 얘였거든요. 그냥 똑같아요. 그래서 그냥 데리고 키우면서, 얘는 뭘 잘하는 애구나라는 걸 발견하고, 더 잘 해주고 싶은 게 제 바람이에요. 자기가 좋아하는 걸 잘 하고, 그걸 매일매일 하면서 살 수 있으면 그게 행복한 것 같아요. 사실 이런 게 너무 간단한 건데...
저는 한국에서 좀 안타까웠던 게, 전 국민이 ‘영어’랑‘수학’을 하는 거였어요. 너무 말이 안 되는 거잖아요. 우리 모두가 바꿔야 하는 거고요. 저는 고등학교 때, 너무 다행인 게 과외가 불법이어서 과외가 없었어요. 가만히 생각해보면 우리 민족은 과외가 평생 불법이었어야 하는데... (하하하) 저희는 되게 러키 한 세대였던 것 같아요.
아이스크림계, 떡볶이계로 놀러 다니고 붙잡혀 다닌 적은 없었으니까요
보영 님의 이야기 속에서 나 도보 영 님과 같은 엄마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좋아하는 일, 잘하는 일을 열심히 즐겁게 잘 해내면서 아이들도 원하는 일을 즐겁게 할 수 있도록 옆에서 봐주고 서포트해주는 일. 너무 많은 걸 어렸을 때부터 시키기보다, 작은 행동부터 미세하게 지켜봐 주는 게 좋은 걸까? 이 부분에 대해선 나중에 더 공부해보자고 생각했다.
또 좋아하는 걸 잘 하고 그 걸매 일 매일 하면서 살 수 있으면 그게 행복한 것 같다는 말씀이 진짜 크게 와 닿았다. 너무너무 간단한 사실...
#영어를 극복하신 비결
바이링구얼(Bilingual)인 적은 없었는데, 언어에 소질이 있었던 건 같아요. 그러다 보니까 불문과를 갔었던 이유도 있었던 거고. 열심히 노력해서 배운 거긴 하지만, 그래서 더 쉽게 배울 수 있었던 것도 같아요.
유학을 가서 배운 영어가 처음이었어요. 저 같은 경우에는 책을 많이 읽었던 것 같아요. 처음에는 너무 힘들었는데, 나중에는 논문도 써야 하니까요. 제가 간 때가 92년도여서, 그때는 유학생도 별로 없었어요. 25년 전에는 한국 사람도 별로 없었어요. 지금 세대와 또 다른 게 TV도 없고, 이메일, 인터넷도 없었어요. 국제 전화를 일반 전화로만 해야 할 때니까, 유학을 나오면 한국말을 쓸 때는 별로 없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배우려고 책을 열심히 봤던 것도 있었던 것 같아요. 또 다른 사람보다도 언어를 잘 했던 것 같기도 하고, 운 좋게 여러 가지가 맞았던 것 같아요.
운이 좋게 여러 가지가 맞았다고 하시지만, 앞서 좋아하는 공부를 하시게 되면서 영어로 더 찾아보고, 들어보게 되고 이런 톱니바퀴가 맞물린다면 영어도 보영 님께서 좋아하는 공부를 위한 수단으로써 작용했겠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에서는 공부의 목표가 ‘영어’ 자체가 되는 것 같은데, 사실 그보다도 더 중요한 건 영어든 한국어든 중국어든 무얼 좋아하고 잘 하고 싶은지가 아닐까? 보영 님의 이야기가 너무너무 재밌어서, 나는 설날에 할머니 할아버지 집에 와있다는 사실도 잊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