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더빌트 대학교 영문학과 부교수님 : 신혜린 교수님
#지금 계신 분야의 매력
저는 글 쓰는 걸 좋아해서 책을 읽고 글을 쓴다는 걸 굉장히 사랑하는데, 개인적인 차원에서 글을 갖고 일을 한다는 건 굉장히 축복이라고 생각해요. 사실 학술 저널에 나오는 글 같은 건 사람들이 잘 안 읽겠죠. 학술 서적도 그렇고. 그래도 아까 말했듯이, 공을 많이 던지면 한두 가지는 걸리게 되어 있죠. 비유하자면, 정치가는 수없이 많은데 그중에 임팩트를 남기는 사람은 많지 않지만, 그만큼 사람들 일에 관심을 가지고 의견 던지기를 하고, 대화를 촉발하는 시도가 많이 있으면 있을수록 뭔가 결과가 나오는 거겠죠.
예를 들어, 포스트 휴머니즘 담론이면 뜬구름 잡는 이야기가 아니에요. 문학이라는 기제는 사이보그나 로봇 같은 현실을 상상으로 재현하는데, 현실을 그냥 재현하고 탈피하고 마는 게 아니라, 사람들로 하여금 현실을 더 비판적으로 들여다볼 수 있게 해주죠. 문학은 새로운 현실을 촉발할 수 있게 하는 원동력이라고 저는 믿어요. 지금까지 보면 어떤 세계의 패러다임도, 순간들도 그 기반에는 사람들이 세상을 어떻게 보고 표현하고, 소통하고 대화를 나누는가가 항상 그 밑바탕에 있었어요. 그리고 그런 기본적인 행위와 생각을 문학과 철학이라고 보는 거잖아요. 저는 이 활동들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믿어요.
교수님의 문학에 대한 열정과 믿음은 다시 책장을 들춰보고 싶은 마음을 들게 하기에 충분했다. “현실을 재현하고 탈피하고 마는 게 아니라, 현실을 더 비판적으로 보아 새로운 현실을 촉발해준다”는 말이 특히나 좋았다! 그래도 계속되는 궁금증...
어떻게 문학이 새로운 현실을 더 촉발해줄 수 있을까요?
예로 사이보그를 들어 볼게요. 사이보그를 통해 다양한 생각을 해볼 수 있죠. 인간의 몸을 기계로 바꿀 수 있어서 세상이 편리해졌다는 표면적인-단순한 변형에 대한 생각도 있겠지만, 상상만 했던 몸의 일부를 교환 가능하다면 어떻게 될까, 인간의 궁극적인 가치는 무엇인가, 그런 게 과연 있는 걸까, 우리에게 원래 편견이 있었던 건 아닐까, 그렇게 다양한 생각을 하게 되거든요. 인공지능도 공상과학에 보면 수십 년 전부터 논의가 있었어요. 프랑켄슈타인과 같은 작품이 그 예예요. 수백 년 전부터 과학과 인간에 관해 이미 제기되어온 문제인데, 요즘 알파고 현상과 연결할 수 있죠. 인간만의 전유물이라고 생각했던 ‘사고력, 예측 불가한 방향성’ 등을 인간의 피조물이 가질 수 있다면 뭘 의미하는가?로 생각해볼 수 있으니까요.
그리고 사이보그나 로봇도 ‘우리와는 다르다’, 내지는 ‘인간만이 유기적이다’라는 개념과 연결할 수 있는데, 여기서도 인종 문제와 같은 또 다른 생각이 출발할 수 있죠. 백인이 정한 인간의 기준은 백인인데, 그와 다른 인종은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장애인은 어떻게 받아들이는가 등의 문제들이 따라오잖아요? 우리가 생각하는 사회적인 기로에서, 정상이라는 범주에서 벗어나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대처할지는 결국 타자에 대한 논의이고, 굉장히 폭넓게 접근하는 논의인데, 저는 그 기반이 되는이 분야에 굉장히 감사하고 있어요. 어떤 분야든 다 그 바탕에 철학이 있고, 자기가 생각하는 바를 세상에 어떻게 표현하는가가 인문학이니까요. 그 일부로 참여할 수 있다는 게 굉장히 큰 축복이고, 학생들을 가르칠 때 저는 가장 많이 느껴요.
컴퓨터 공학 전공인 학생들은 제가 못 보는 것들을 텍스트에서 발견하고, 수학 전공인 학생들은 제가 파악하지 못하는 구조적인 미라든가 이런 걸 파악할 수도 있고, 문학하는 학생들이나 철학하는 학생들은 또 다른 식으로도 접근할 수도 있고. 그러니까 항상 사람을 겸손하게 하고, 배우게 하는 좋은 공간이 교실이거든요, 학교 내에서 새로운 의견을 내서 긍정적인 변화를 가져온다든지, 이런 것들이 보이면 그 이상의 보람이 있어요.
한창 언론에서 떠드는 알파고와 인공지능, 로봇 등에 대한 모든 논의가 이미수 백 년 전부터 문학 속 상상에서 이루어졌고 그게 현실화되는 요즘이라니! 문학은 모든 분야의 근본이면서 미래를 보는 창인 가도 싶어 두근거렸다. 또 이런 게 왜 근본적으로 인문학, 독서를 장려하는 이유가 되는지 알 것 같았다. 교수님의 말씀을 듣다 보니 인문학, 독서도 누군가에게 주입하는 “일방적인 교육”이 아니라 진심으로 마음에서 우러나와 호기심과 학문적 발견에 대한 즐거움으로 지속될 수 있다는 점 등이 떠올랐다.
게다가 교수님의 이런 지적 겸손함도 좋았다. 끊임없이 학생들을 통해서도 배우시며, 학생들을 가르칠 때 가장 배우기 좋고 보람이 있다는 말씀이 뜻깊었다.
#과도한 스펙 경쟁을 하고 있는 대학생들에게 한 말씀
안타까운 현상이죠. 그래도 개개인의 행복을 놓고 보고 아까 위에서 말했던 가치와 연결해서 언급해 보자면요. 젊은 세대들이 앞으로 나가면서, 내가 뭔가를 함으로써 얼마큼 나 자신에게 만족할 수 있고, 나 자신에게 만족해서 남들에게 어떤 영향을 주는가를 생각하다 보면, 정말 많은 사람들이 찾지 못하고 있는 무언가를(아마도 행복을?) 찾는 사람이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을 하고요. 뭐 제가 문학 교수를 해도 다른 사람들이 제 직업에 대해 찾아보면서 이런 장단점이 있네 등등 이런 조건들을 따질 수 있잖아요? 물론 일을 더 열심히 해서 승진하고, 보수를 타고 이런 것들도 중요한데, 저는 그런 것들을 떠나서 제일 중요한 건, 창피해하거나 실패하거나 두려워하지 않는 게 제일 중요한 것 같아요. 부딪혀보고.
사람이 사람인데 실패하는 게 어떻게 안 두렵겠어요.. 실패를 해봤으면 어때요. 결론이 나오기 전까지는 결과라는 건 모르는 거잖아요. 그 사람이 죽고 나서도 사람의 인생은 끊임없이 앞으로 나아가는 거기 때문에 결론이 아니에요. 그러니까 내가 어떤 일을 겪었든 간에, 나중에 어느 시점에서 든 나한테 유용하게 쓰일 거예요. 인생에서의 낭비도 한계가 없고, 어느 것이든 나에게는 소중한 경험이니까. 그런 가치들을 되새기면서(살면 좋지 않을까요).
“사람이 죽고 나서도 사람의 인생은 끊임없이 앞으로 나아가는 거기 때문에 결론이 아니에요”라니... 내가 어떤 일을 겪었든, 나중에 소중한 경험이 된다는 말씀들의 울림이 컸다.
점점 덜 실패하기 위해 우리는 많은 노력을 기울이는데, 사실 그런 실패들도 겪어야 그게 다 삶의 근육이 되는 게 아닐까? 사실 천재들, 에디슨이 나베 토벤이나 모차르트나 훌륭하다고 알려진 예술가들도 가장 많이 실패한 아이디어들을 낸 사람들이었다고 하고, 경영학 수업을 통해서는 ‘아무 실패도 하지 않는다면, 그건 아무 행동도 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라는 말도 듣는다. 긋겠도다 실패가 고통스럽다고 생각하기 때문인데, 그건 우리 사회가 급격한 산업화를 겪으면서 실패를 용인해주는 지수가 가장 낮았기 때문 아닐까 싶다. 그렇게 보면 사실 개인적인 차원에서 실패들은 오히려 장려되어야 하는 게 아닐까.
앵그리버드로 유명하고, 많은 혁신적인 스타트업들을 배출하는 나라 핀란드에는‘실패의 날’을 기념해 모여서 실패를 통해 배운 점들을 나눈다. 또 싱가포르에는 ‘Fucked-Up Night’이라고 해서 가장 창피했던 순간들을 밤마다 모여 서로 공유하기도 한단다. 그런데 그들은 그게 끝이 아님을 안다. 진짜 끝나는 순간은 상투적 이게도, 영원히 실패의 감정에서 일어나지 못하는 순간일 테니까?
#지금 행복하신지
행복하고요. 모든 사람이 어려운 일이 있고, 주변에 더욱더 어려운 사람들이 많잖아요. 또 우리 모두 행복해야 한다는 명제도 어떻게 보면 강요잖아요? 그런 걸 바라지는 않고요. 대신 좋은 걸 찾으려고 끊임없이 노력하는 자세가 아주 중요한 것 같아요. 한 번 살다가 죽잖아요. 자신에게 주어진 걸 해서, 최대한 열심히 좋은 걸 찾고, 더 찾으려고 최대한 노력하고. 그런 과정 자체가 행복이 될 수 있도록 하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이 사회 분위기가 1등만 추구하라고 하면서 그게 행복이라고 역설을 하잖아요? 어떻게 보면 사실 그것도 굉장히 큰 문제죠.
다양성과 연결이 되는 것 같아요?
그죠. 서로 존중을 할 수 있어야 하는데, 옳고 그름으로 접근하는 게 아니라, 다르다는 기준으로 접근해야 되는데. 달라도 괜찮다, 내지는 달라서 좋다고 하면, 좀 더 즐거운 사회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요.
#최근 읽은 책/ 감상한 영화 중에 추천해주고 싶은 작품
혹은 좋아하는 책/영화/공연 중에서 소개해주고 싶은 작품 J
좋은 영화는 너무 많죠. 올해 나온 영화 중에서는 곡성이 최고였어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미학적으로만 우수한 게 아니라, 다양한 종교와 세계관을 잘 접합을 해서 관객들에게 결론을 강요하지 않고, 해석할 여지를 남기면서. 또 장치도 굉장히 치밀해요. 영화 안의 신부가 환생이냐, 아니냐, 변했냐 아니냐를 보면, 여러 방향으로 해석할 수 있는 여지를 주어요. 사실 열린 결말이라고 해서 다 좋은 건 아니죠. 헷갈리고, 방향을 종잡을 수 없는 영화가 되게 많이 있잖아요. 그런데 만약 감독이 치열하게 탐구하고자 하는 문제가 있어요. 거기에 대해 여러 접근법을 시도하면서, 추구하는 방향성은 있는데, 그걸 강요하지 않고, 관객이 스스로 여정을 좇아갈 수 있도록 해주는 열린 결말이라서 좋아요. 미학적으로도 훌륭했고, 한국 영화에서도 이런 작품이 나온 다는 게 좋았어요.
미국 영화도 좋은 게 너무너무 많은데요, 아까 말한 미드, 퍼슨 오브 인터레스트는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의 형제인 조나단 놀란 감독이 만든 건데요, 국가 감시 체계와 관련된 시스템이라든지, 아니면 미국에서 거의 많이 쓰는 크라임 폴리스 프로시 듀럴이라고 해서, 사건 사건을 엮어서 흐름을 잡고 있는 것, 그걸 결합해서 효과적으로 구성했어요. 거기에 국가 음모론이라든지 그런 내용도 접합을 해서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너무너무너무 심도 있게 탐구한, 훌륭한 작품이 되었어요. 캐릭터도 살아 숨 쉬고, 완성도도 굉장히 높아서 친구들한테도 추천을 해주고 싶어요.
책도 훌륭한 게 너무 많은데, 뭘 하면 좋을까요. 소설? 이창래 씨의 소설은 다 좋고요. 아시안 아메리칸 문학의 최고라면 이창래 씨의 최근 작인 On Such aFull Sea도 좋지만, 아시안 아메리칸의 정체성을 정면으로 다루는 초기 작품들도 아주 좋아요. 문체가 뛰어나니 추천을 많이 하고요.
교수님의 이야기는 조곤조곤하지만 강렬하게 이어졌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교수님의 넓어졌다 깊어지는 이야기들은 나를 높았다가 낮아지는 협곡들로 끊임없이 끌고 들어갔다.
교수님께서 들려주시는 삶의 자세들도 좋았다. ‘우리 모두 행복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도 어쩌면 강요잖아요?’라는 것도. 사실 세상만사가 행복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살면서는 지루한 순간들도, 괴로운 순간들도, 어떻게 통제해볼 수 없는 일들도 많이 일어난다. 강강강강강렬한 세기로 극한의 즐거움을 누릴 수도 있겠지만, 진짜 행복하려면 삶의 여정 위에 있는 모든 순간들을 끊임없이 극복해나가는 데 있지 않을까?
그리고 자기만족이겠지만 나 스스로의 이야기도 소중한 이야기의 일부라고 상상하며 활기차게 지내다 보면 어떤 순간들도 끊임없이 극복해낼 수 있지 않을는지 어렴풋이 떠올려 보았다.
감사하게도 교수님과의 첫 만남은 이렇게 실패에 대한 두려움에도 맞설 수 있는 투명 방패를 장착해 주었다. 삶의 전면에 화려하게 드러나지는 않아도 언제나 한편에서 튼튼한 뿌리가 되어주어 인류를 지탱해주는 인문학의 모습처럼, 교수님의 진솔하고 맑은 영혼은 인터뷰를 진행한 나와 이 글을 읽을 독자들에게 새로운 생각의 뿌리를 심어 줄 것 같았다.
결국 '행복'에 대한 길고 길었던 인터뷰 여정을 통해 느낀 점은 '행복'조차도 다양한 얼굴을 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많은 인터뷰이 분들께서 대체로 좋아하는 일 속에서 즐거움과 행복을 느끼셨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소한 작은 것들, 결국 가장 가까운 사람과의 관계에서 행복을 느끼는 경우가 더 많았다. '누구나 행복해야 한다'는 명제도 강요가 된 게 이 사회라면, 결국은 어떤 현상도 정면으로 받아들이는 게 행복에 다다르는 지름길 아닐까. 또 각자 자신이 좋아하는 위치에서,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사회에도 기여하고, 나 이외의 가까운 사람들과 '함께 행복'한 게 결국 다같이 행복할 수 있는 사회로 나아가게 하지 않을까 다양한 생각이 들었다.
결국 행복도 소중한 사람들과 '함께 찾아나갈 때' 더 의미있게 다가올 것 같았다.
‘실패를 해도 끝이 아니잖아요. 사람의 인생은 죽음 후에도 계속되는 거니까요.’
죽음을 생각하면 멈추게 되지만, 죽음 후의 순간까지 떠올린다면 우리는 나아갈 수 있다.
항상 더 나아질 수 있다.
인터뷰를 마치며
신혜린 교수님의 이야기를 들으며 헨젤과 그레텔 이야기가 떠올랐다. 헨젤과 그레텔 이야기에서 남매는 좋아하는 과자들을 따라 마녀의 집에 도달하지만, 못 살게 구는 마녀를 잘 물리치고 행복하게 집에 돌아와 산다. 물론이 이야기와는 반대로 교수님의 이야기는 현재 진행형이다. 교수님도 좋아하는 일을 주섬주섬 따라오셨다. 어려서부터 공상과학 소설 읽기를 좋아하셨고, 영문학을 좋아하셨으며, 잠시 IT계열에서 인턴십도 하셨지만 돌아가신 곳은 행복한 비교문학의 세계였다. 교수님의 세계 속에는 마녀 같은 등장인물들도 있었을 것이다. 궁금한 것을 물어보아 바보가 되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이라는 마녀도 있었을 테고, 말씀은 안 하셨지만 행복한 일을 좇아가기만 해도 되려나 하는 ‘고민’도 있으셨을 것이다. 다만 교수님은 그런 마녀를 물리치며 순간순간 좋아하는 문학들과 함께 앞으로 나아오셨다. 미국 사회와 학계 모두에서 소수자라는 입장도, ‘동양인’ 혹은 ‘동양인 여성’이라는 이미지 모두에 대한 편견 또한 더 큰 틀에서 보면 물리칠 수 있는 것이었다.
게다가 ‘실패를 해 봤으면 어때요’라는 쿨함이라니. 인생에서의 낭비가 없다는 말, 나중에 다 거름이 될 거라는 말 또한 큰 힘이 되었다. 지난 편에서의 “태도”처럼 ‘언젠가 결국 다 잘 되리니’라는 무작정 믿는 마음으로 선택한 일을 일단 해나가는 것만큼 우리 세대에게 필요한 방어막은 없지 않을까. 또 문학을 통해 다양한 세계를 여행하시면서 교수님만의 세계를 구축하셨을 것을 생각하고, 우리보다 훨씬 많은 세계를 간접 경험하셨을 것을 생각하니 더 신뢰가 갔다. 사실 마음의 근육도 실패를 해야 생긴다. 결국 우리 모두 뭐라도 해보고 더 많이 고꾸라져가며 성장할 수 있지 않을까.
에필로그
나도 다시 한번 신혜린 교수님의 이야기를 정리하면서 과거를 되돌아보았다. 겨울 방학을 지내 오면서는 내가 왜 이런 인터뷰 여정을 가고 싶었을까? 스스로에게 물으며 심리학 책들을 찾아 읽는 시간이 되기도 했다. 나는 인정을 받고 싶었다. 바깥을 돌아다니며 나도 이렇게 멋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배우며 나도 멋있는 사람이 되겠다는 인정. 그렇게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받을 만한 글을 쓰려다 보니 사실 정리를 하면서는 공허해지기도 했다. 가상의 독자들에게 어떤 배움과 만족을 줄 수 있을까? 만족을 줄 수는 있을까? 내 글의 깊이는 너무 얕지 않은가? 내가 불러낸 생각들이 나에게 화살을 돌렸고 한 편 한 편 세상에 글을 내보내는 게 무척이나 부끄럽기도 했다. 그리고 그런 보이지 않는 대상에 대한 공포는 글을 쓰고 싶지 않다는 생각으로 이어지기도 했고, 일을 미루게도 했다.
하지만 그냥 있을 수는 없었고, 때로 전문가의 도움도 받으며 다시 여쭤보러 다녔다. 브런치에서 좋아하고 존경하는 작가님께 이럴 때는 어떤 선택을 하면 좋을지 덧글로 여쭙기도 했고, 더 많은 책들을 읽거나 혹은 블로그에 자신의 생각 기록들을 남겨나가고 계신 많은 분들의 글들도 더 파고들었다. 친구들에게도 비판해 달라며 물어보았지만, 때로는 더 혼란해지기도 했다. (그럴 때는 글을 쓰면서도 나조차도 내 마음의 소리에 귀기울여야 겠구나 깨달을 수 있었다.) 그래도 그렇게 내가 찾아다니는 글들 속에는 나와 비슷한 고민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이미 삶의 순간들을 지나쳐 오신 다른 분들에게 내 고민은 이미 진즉에 해결된 고민이기도 했다. 참 감사한 일이었다. 또 무엇보다 엄마와 아빠께도 계속 여쭤보고, 계속 지지해주신 덕분에 나는 마지막까지 글을 포기하지 않고 써 내려갈 수 있었다.
따라서 이 글은 나만의 글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정리는 내 입, 귀, 손가락을 이용해서 했지만 내가 보고 듣고 느낀 많은 세상의 소스들은 결코 나만의 것이 아니었고, 인터뷰이 분들을 포함해 모두 각각 다른 방식으로 멋진 인생을 살아가고 계신 분들을 통해 내게로 건너온 선물들이었다. 그 선물들 속에는 수업 시간에 흘러가듯 말씀하신 존경하는 교수님의 한 마디도 있었고, 내가 택한 길이 맞는지 모르겠다며 시험지 한 가득 편지를 써 내려간 데 긴 답장을 주신 감사한 스승의 영향도 있었다. 인터뷰를 찾아다닌 건 나였지만 내 인터뷰에 영향을 주고 글들을 만든 건 결국 내가 살면서 만나 온 가족, 친구, 동생들, 스승들 모두었다. 그리고 이제 이 선물은 독자에게 건너가 마음속에 각자의 질문으로 피어났으면 한다.
이렇게 1부는 막을 내린다. 나는 여전히 여성의 일과 미래에 관심이 많다. 하지만 맨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인류의 반쪽만을 위해서도 아니고, 결국 함께 살기 위해서는 함께해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혼자 일하는 것도 좋아하지만 나는 함께 일하는 게 더 좋고, 리더가 되는 것도 좋지만 때로 뒤로 빠져 다른 친구들이 보지 못하는 부분을 줌인하는 것도 좋다.
또 인터뷰 여정을 통해 깨달은 건, 지금 학생의 위치에서 이런 집필을 해보는 것도 좋지만 무엇보다 사람 구실을 하기 위해서-여기서 사람 구실이라면 돈을 벌어서 경제적 자유를 획득하고 부모님의 부담을 덜어드리며 온전한 인간으로 즐겁 게 홀로 서는 것을 포함-일단은 취직을 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점이었다. 또 아직 어디든 업계에 들어가 활동해보지도 않고, 인터뷰이님들의 고견에 대해 정리하는 것이 모순이지 않을까 계속 고민하며 한계를 느끼기도 했다. 그래도 마라톤을 포기하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4학년이고 현실적으로 밥 벌어먹을 생각을 해야 하기에 앞으로 2부 집필은 학교 수업과 인턴, 학기 생활들로 다소 간헐적으로 업로드될 것 같다.
그래도 그간 기다려주신 독자분들, 눈팅이지만 읽어주시는 분들 모든 분들께 감사의 인사를 드리고 싶다. :)
그간 정말 감사했습니다!!
곧 2부로 뵐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