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오미셸 Michelle Nov 30. 2017

삶이 바닥이라고 느껴지나요?

고키 이야기 (비저너리를 시작하게 된 이유)

               180명의 외국인들이 득시글거리는 글로벌 여름 계절학기였다. 절반 정도는 인도 사람들과 필리핀 사람들이고, 나머지는 유럽인들, 중국계 미국인, 혹은 중국계 호주인들이었을 때 유달리 눈에 띄는 사람이 있었다. 일본 태생의 남자 ‘고키’였다. 그가 눈에 띄었던 이유는 몇 없는 동아시아권 국가 출신이라는 점이기도 했지만-전체 프로그램 중에 일본인 1명, 한국인은 나를 포함해 2명이었다.-어딜 가나 주변을 밝게 만드는 그의 에너지 덕분이기도 했다. 

            학교에서는 오리엔테이션 프로그램으로 싱가포르 1일 투어 패키지(그렇다.. 사실 싱가포르는 ‘투어 패키지’로 하루면 될 만큼 정말 작긴 하다..)를 마련해주었는데, 아이들이 병아리 떼처럼 삼삼오오 가이드를 쫓아다닐 때마다 그의 주변은 왁자지껄했다. 대체 어떤 인물일까? 궁금해서 친구와 함께 그의 주변을 맴돌았고, 저녁 식사 때가 되어 호커 센터에 갔을 때에 우리는 그가 쏜 10인 분 어치 꼬치구이 덕분에 맛난 음식을 배불리 먹을 수 있었다. 그리고‘일본의 화장실’에 대한 개그가 30분 간 이어졌다… 

            처음 안 사실이었다. 일본 기업의 화장실 문 안 쪽에는 20분 이상 앉아 있으면 상사가 데리러 온다는 말이 쓰여있기도 하고, 시트가 따뜻해서 잠도 잘 오고, 클래식도 나온다고 했다! (오아우!) 이미 따뜻하고도 습한 나라였던 싱가포르에서 한창 땡볕을 맛 본 우리는 그의 화장실 이야기에 빨려 들어가고 있었고, 일본에 온다면 제발 일본 화장실을 들리라고, 관광 명소라고 온 열정을 다해 이야기하는 말에 배를 잡고 웃었다. 고키 이 양반, 보통 사람이 아닌 게 분명했다. 대체 일본인인데 어떻게 영어를 이렇게 잘 할까? 게다가 영어로 사람들을 이렇게나 잘 웃길 수 있다니? 온갖 호기심이 일었다. 



            그게 고키를 본 첫인상이었다.


            수업 시간도 예외는 아니었다. 교수님께서 질문을 던지실 때마다 그는 항상 가장 앞 줄에 앉아서 가장 먼저 손을 들었고, 회사에서 있었던 일, 자신이 겪은 일 등 풍부한 사례를 들어 발표에 임했다. –그는 이미 회사를 다니고 있는 직장인이었고, 회사의 지원을 받아 짧은 학기 동안 싱가포르에 공부하러 온 상태였다- 적극적이고 당당한 그의 태도를 본받고 싶었다. 

            다음 날부터 나는 자리를 옮겨 그와 같은 조에 들어갔다. 눈치 채지 못 했을 수도 있지만 그가 발표를 하면 나도 발표를 하며 더 집중력 있게 수업에 임했다. 그런지 일주일이 채 안 된 어느 날이었다. 첫 번째 조별 프로젝트를 마치고 기숙사로 돌아갈 쯤에 교실 밖에서 서성이고 있는 그를 만났다. 4일 동안 회사에서 준 업무를 마치고 다른 학교 숙제까지 하느라 집 밖으로 오래 못 나오고 사람들을 너무 못 만났더니 말수가 없어지는 것 같다고 했다. 안 그래도 그의 이야기가 듣고 싶었던 차에 큰 기회였다. 우리는 함께 농담을 주고받으며 서로 어떻게 살아왔나 이야기나 나누자고 스타벅스에 들어갔다. 


            “어쩜 그렇게 매번 컴포트 존을잘 박차고 나올 수 있니? 일본도 적극적으로 손을 들고 발표하는 문화는 아니지 않아?” 


            가장 첫 질문은 평소에 내가 가지고 있던 가장 순수한 궁금증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매번 1등으로 발표를 하는 그의 적극성이 궁금해서 던진 질문이었다. 

            그의 답변은 간단했다. 


            “원래 첫 답변이 가장 쉬워.”


            하하하하. 웃음이 나왔다. 


           “뒤로 갈수록 이미 나온 답변 이외의 새로운 답변을 말해야 하기 때문에 차라리 맨 처음에 답하려고 하는 거기도 해. 이건 반 농담이고, 사실 쉬운 일은 아니야. 중고등학교 때는 발표는커녕 옆 사람한테 말도 못 걸 정도로 반사회적인 성격이었거든. 하지만 컴포트 존 밖으로 나가야만 배울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었어. 그래서 나는 자꾸 내 컴포트 존 밖으로 나가려고 해. 그게 내가 지금까지 살아온 방식이야.”


            살아온 방식?

            그렇게 나는 고키의 전 생애 이야기를 듣게 된다.


            알고 보니 고키는 영어를 배우기 시작한 것도 대학교에 처음으로 입학해서 배우기 시작한 것이었다. 뭐라고? 나는 기함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영어를 그냥 잘 하기 뿐만 아니라, 그 새로운 언어로 개그까지 치는 인사였다. 궁금해서 물어보니, 그는 아이비리그 대학 출신도 아니었다. 커뮤니티 칼리지 출신이었다. 그는 출발선이 중요하지 않다고 했다. 


            그 후에 얼마나 성장하느냐가 중요한 거지. 

            커뮤니티 칼리지 졸업 이후 들어간 회사에서는 아시아 태평양 지역 혁신 대회에서도 1등을 했고, 그 전에는 사내에서 2번의 MVP 상을 받았지만, 어떤 명칭에도 기대어선 안 된다고 했다. 그렇게 말하고 있는 그의 눈에서는 불꽃같은 생기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열정적으로 이야기하는 그의 목소리엔 확신이 가득했다. 



            그럼 대체 뭐가 너의 원동력이 된 거니? 궁금했다. ‘가족’이었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왜 가족이었을까? 또 왜 가족 때문에 그는 미국으로 건너가 영어를 공부하게 된 걸까?


        미국으로 건너가기 전까지 고키는 영어를 할 줄도, 심지어 일본어로 자신을 표현하는 방법도 몰랐다. 줄곧 ‘반사회적’이었기 때문이다. 부모님은 시댁과 친정에서 받는 스트레스를 잘 조절할 줄 모르시는 분들이었다. 객관적으로 친정이 더 부유한 편이었는데 아버지가 그로부터 받는 스트레스가 컸다. 자연스레 스트레스는 아이들에게까지 이어졌고, 고키의 큰 형과 누나는 부모님의 과도한 교육열에 상처를 입게 된다.

          그는 그의 가족을 ‘망가진 가족’이라고 표현했다. 16살의 어린 나이에 큰 형은 집에서 쫓겨나 야쿠자에 들어갔고, 누나는 편집증을 앓아 자살 시도를 했다. 고키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 역시 부모님께 사랑 받는 것이 어떤 것인지 몰랐고, 스스로를 사랑할 줄 몰랐다. 그의 기억에 따르면 뭉툭한 칼로 손목에 자해를 해서 자살을 시도했던 첫 나이는 11살이었다.

        긴 사연이 있지만, 고키가 야쿠자에 들어간 형을 말리러 야쿠자에 들어가기도 했었다. 두목이 잡힌 덕분에 운 좋게 빠져나왔을 뿐이었다. (고키의 형은 부모님으로부터 받지 못한 인정을 야쿠자 집단에서 받고자 했던 것인데, 사실은 그게 부모님으로부터 받고 싶었던 사랑과 인정이었다. 이를 부모님께 이해시키고, 그들을 화해시키는 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고 했다.)

    또 부모님께 가장 많이 듣는 말이 “왜 이것밖에 못 하니? 너의 능력이 이것뿐이니?”라는 다그치는 말이었던 고키 역시 늘 주눅이 들어 있었기 때문에 자신감은 물론이고 자존감도 바닥이었다. 고등학교에 들어갈 무렵에는 다시 죽을 생각도 했다. 하지만 그대로 죽을 수는 없었다. 중학교나 고등학교를 제대로 다니지도 못 했고,(의무 교육이라서 나갔으나, 심한 왕따로 인해 사회적으로는 격리된 채 단 한 번도 수업에 참석하지 못했다.) 이미 거리를 떠돌고 있는 신세였지만 차라리 죽을 각오로 살아보자고 결심을 했다고 했다. 물론 그가 자기 자신의 한 몸을 가누기도 힘든 때인데, 혼자 힘으로 가족을 일으킬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한 편의 막장 드라마를 보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되물었다.

            어떻게 그렇게 마음을 먹게 되었니?라고.

            “너를 믿어주는 사람 단 한 사람만 존재하면 돼”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부모님께 단 한 번도 사랑이나 인정의 표현을 받고 자라지 못한 그였다. 다행히도 당시 고키 곁에는 여자 친구가 있었고, 여자 친구의 어머니 가고 키를 몇 년이고 기다려주었다고 했다. 너는 할 수 있다고, 뭐든지 할 수 있고, 될 수 있는 사람이라고 마주칠 때마다 믿고 떠올리게 해주었다고. 물론 쉬운 일은 아니었다. 자존감과 자신감이 바닥이었던 그에게 적어도 1년은 필요했다. 당시 그는 그 자신을 가장 멍청한 상태였다고 회상한다. 단순한 일, 사소하고도 작은 일 그 어느 것도 할 수 없던 시기였는데, 그분 덕분에 고키는 새로운 일에 도전해볼 생각을 하게 된다. 

            ‘환경을 바꿔보면 달라지지 않을까.’ 고키는 생각했다. 아는 나라가 미국뿐이었기에 밤낮 아르바이트비로 번 돈을 탈탈 털어 미국행 비행기에 오른다. 그리고 처음 입학한 곳이 미국 뉴욕 주 북부에 위치한 커뮤니티 칼리지였다.

            물론 미국에서의 생활도 녹록지는 않았다. 충분한 생활비가 없었던 그는 게토에 터전을 마련했다. 또 처음 갔을 때 여느 나라 사람들과 다르지 않게 그 역시 첫 학기를 일본인 친구들과 어울리려고 했었다. 하지만 이내 친구들은 그를 그룹 밖으로 몰았다. 다시 왕따가 된 것이다. ‘가족을 살리기 위해’ 미국에 도착했던 그는 그의 꿈을 친구들에게 말하고 다니거나, 적극적으로 의견을 표출하거나 했는데, 놀 줄도 모르고 특이한 애라며 다른 일본인 친구들은 그를 피해 다녔다. 하지만 지금 돌아보니 오히려 그렇게 일본인 그룹에서 쫓겨났던 건 자신이 다른 인종의 친구들과 가까워질 수 있었던 좋은 기회였다며 그는 긍정했다. 



            무슨 꿈을 말하고 다녔니? 궁금했다. 알고 보니 이미 그때 그는 30살에 자신이 벌고 싶은 목표 금액을 써서 주머니에 넣고 다니고 있었고, 그런 그의 꿈에 대한 이야기를 친구들에게 하고 다녔다. 일본인 친구들은 특이한 애라며 손가락질하거나 피하기도 했지만, 외국애들은 특이한 이야기가 궁금하다며 그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그 금액은 19살의 어린 고키가 계산해 보았을 때 가족의 빚을 다 갚을 수 있는 금액이었다. 외국인 친구들은 고키의 나이를 따지지도, 출신 배경을 따지지도 않았다. 오히려 ‘특이함’을 재밌게 보았다. 그렇게 하나둘 외국인 친구들과 사귀기 시작한 고키에게 다른 친구들이 미리 시험 팁을 주기도 했고, 함께 어울리며 결국 다음 학기에 고키는 모든 과목에서 A를 맞았다. 

            물론 그것도 고키는 혼자만의 노력은 아니었다고 했다. 고키는 한 교수님의 말씀을 인상 깊게 들었다.

            “그 교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어.”

            고키가 양 손을 들었다. 단, 두 손의 위치가 달랐다. 왼손은 오른 손보다 조금 낮았다. 그러다가 양 손을 서서히 같은 높이가 되도록 들어 올렸다. 오른 손보다 낮았던 왼 손은 더 빠른 속도로 올라갔고, 오른손은 더 느린 속도로 올라갔다.



            시작점이 이렇게 낮을 수도 있지만, 사람마다 성장의 속도는 원래 다른 거라고. 지금 이렇게 낮은 위치에 위치해도 더 높게 올라가면 되는 거라고. 다시 이야기하지만, 출발선이 중요한 게 아니었어. 성장의 폭이 중요했지. 하지만 그거 알아? 정말 학교는 상관없어. 하버드를 나오고 MIT를 나와도 사람은 힘들 수 있어, 우울증을 앓는 사람도 많고. 나는 그게 컨테이너가 다르다고 생각하는데 사람마다 견딜 수 있는 고통의 정도는 조금씩 다른 거야. 나는 운이 좋게도 남들보다는 좀 더 강했던 거지.


            고키는 자신이 겪은 어려움을 생각하면 다른 누구에게도 그 고통을 겪으라고 말해주고 싶지도 않고, 떠올리기도 힘든 기억이라며 고개를 젓기도 했다. 특히 어렸을 때 부모님께 학대당한 기억들이 그에게 얼마나 고통스러운 기억인지 이야기를 할 때 눈물이 고이기도 했고 찡그리기도 했다. 그래도 용서만큼 아름다운 게 없다며, 지금은 자신에게 그런 부모님들도 정말 용서하기 힘들었지만 용서했고, 편집증이었던 누나도 대학 공부를 하게끔 자신이 돈을 대주고 있다고도 말했다.

            어쨌거나 새롭게 바뀐 미국이라는 환경에서 그렇게 조금씩 자신감을 쌓아간 고키는 커뮤니티 칼리지를 졸업하고, 돈을 벌기 위해 1년 간 뉴욕 NYC의 책 장수로 일했다. 또 그동안 뉴욕에서 댄스 크루도 만들어 거리를 돌며 공연도 하게 된다. 

            아니 대체 춤은 언제 배웠니? 

            “고등학교를 자퇴하고 거리에 있을 때, 헬스장 같은 곳에서 조금 배운 적은 있어. 그 이후 커뮤니티 칼리지에서 운 좋게 만난 일본인 친구가 전문 브레이크 댄서여서 그에게 조금 더 배웠고, 뉴욕에서 일할 때 진짜로 크루들과 돌아다녔지. 말로도 나를 표현할 줄 몰랐을 때, 유일하게 나를 표현할 수 있었던 통로가 몸짓이었던 거야.”

            그 말을 하며 웃는 고키의 웃음 속에 고통과 그 깊은 역경들을 다 이겨낸 승자의 웃음 모두가 섞여 있었다. 

            그렇게 그는 춤 동아리를 시작으로, 그의 행동반경을 넓혀가게 된다. 월가의 한 스타벅스에서는 FX 트레이더 중 거물이었던 한 사람 덕분에 돈을 벌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기도 한다. 월가 사람들은 대체로 바쁘지만 바쁜 공간에서 서로 말을 건네는 일도 잘 하는데 마침 한 신사가 고키에게 말을 걸었다. 놀랍게도 그 신사는 FX 트레이더 중 거물급에 해당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고키에게 과제를 내주었다. 외환 차익 거래(FX Trading)를 일반인들과 다른 필요한 사람들을 위해 가르쳐 주는 강좌를 열려고 하는데 얼만큼의 사람들을 모아 오면 그 수수료를 고키에게 주겠다고 한 것이었다. 첫 시험이었다. 그리고 고키는 그 시험을 통과했다. 이 경험을 통해 그는 외환 차익 거래에 대해서 뿐만이 아니라 어떻게 비즈니스를 할 수 있는지 배우게 된다.

            이후의 과정도 순탄치는 않았다. 미국에서의 학생 비자가 만료된 고키는 일본으로 돌아왔다. 일본 대학을 졸업해야 어느 회사이건 들어갈 수 있었던 그는 다시 알바를 전전했다. 이자카야 알바, 번역 알바 등 몸을 아끼지 않고 일했던 그는 한 번은 1주일 내내 잠들어버렸던 적도 있다고 했다. 온몸이 마비가 된 경험을 그때 처음 해봤는데 유체이탈을 해서 자기 자신을 자기 자신이 내려다보는 모습이 인상 깊었다고 했다. 또 그 많은 알바 중에 이자카야 알바 가사실 가장 힘들었는데 주방 일도, 서빙 일도 아닌 취객을 다독여 돌려보내거나 손님이 게워낸 음식을 치우는 일이 가장 힘들었다고 했다. 고키는 그렇게 해서 모은 돈으로 4년제 일본 대학을 찾아 들어간다. 단 한 군데를 찾았는데, Temple University, 일본 캠퍼스였고, 전액 장학금을 준 데다 커뮤니티 칼리지에서의 학점들을 인정해주었다. 그리고 졸업 때에는 10등 안에 들며 졸업했다고 한다.

            다행히 이후 매번 장학금을 받고 학교를 다녔고, 그곳에서 또다시 창업의 기회를 얻어 냈으며, 첫 직장은 교수님들의 추천으로 들어가게 된 PwC였다. 



            여기까지 들으며 나는 몇 번을 박수를 쳤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박수를 받으며 누구도 겪으면 안 되는 일들을 겪었기에 자신이 그만큼 성장했던 것 같다며 겸손해하는 고키가 내 눈 앞에 있었고, 수많은 역경을 극복해낸 후 지금 이 순간의 삶의 목표를 다시 이야기하는 한 남자가 있었다. 


            그렇다면 지금 이 순간의 그의 삶의 목표는 무엇이었을까?


            그는 이미 19살에 정해 둔 목표 금액 이상을 매년 벌고 있을 뿐만 아니라, 직장을 갖고 난 후 목소리를 낼 수 있게 되었을 때 ‘부모님께 우리 형제들에게 그렇게 대했으면 안 되었다’고 부모님을 설득하고 용서해 가족을 되살리기 위해 노력하기 시작함으로써 가족을 정상 궤도로 올렸다. 그가 번 돈으로 편집증이었던 누나도 치료를 받고 교육을 받고 있다. 그는 19살 때 그의 꿈을 모두 이룬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의 꿈은 달랐다. 


            “세계 평화야.”


            그의 표정은 진지했다.


            그리고 작은 부분에서부터 긍정적인 영향력을 미치는 사람이 되고 싶어. 사실 되게 단순하게 살려고 노력해. 긍정적인 영향력을 미치기 위해서 더 높은 자리에 올라가서 더 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그래서 CEO가 되고 싶어. 또 사실 단순하게 살지 않는 사람들을 경계하는 편이야. 자기 자신이 누구고 뭘 해야 할지 잘 모르고, 자기 삶에 대해 할 말이 없다면 미사여구가 많이 붙는 거기도 하거든.



            내가 이전 수업 시간에 들은 그의 목표는 한시바삐 지금의 회사(어네스트 앤 영)의 C레벨이 되어 불합리한 시스템을 개선하는 것인 줄로만 알았는데 그의 ‘인생 목표’는 다른 것이었다. 또 그는 때로 그의 장례식을 떠올리며 산다고 했다. 죽음은 끝이지만 진심으로 그 자신 덕분에 삶을 바꾸고 고마워하는 사람들이 많아져서, 많은 사람들이 그의 장례식에 찾아올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가 생각하는 ‘비즈니스’란 그런 것이었다. 사람을 돕는 일. 일본에서 처음 한 창업도, 돈을 벌기 위한 목적도 있었지만 인터넷을 쓸 줄 모르는 할머니 할아버지 노점상 분들을 도와 드리기 시작하다가 배우고 있던 코딩을 활용해 디지털 마케팅을 해드리게 된 것이었다. 지금도 EY의 해외 각국의 여러 지사를 돌아다니며 불합리한 시스템을 바꾸는 업무 외에도, 신입 사원 교육, 사원 재교육 및 동기부여 프로그램 교육 등 다양하게 회사와 회사를 다니는 사람들을 돕고 있었다. 그에게 비즈니스는 돈을 버는 일인 동시에 사람을 돕는 일이었다. 

            매일 아침 한 시간 밖에 잠을못 잔다면서 어떻게 그렇게 매번 활발할 수 있니? 물었을 때 돌아오는 대답은 이랬다.


            CEO들이었다면 어떻게 행동했을까 생각하곤 해. CEO는 함께 일 하는 사람이어야 하는데, 축 쳐져 있고 활기가 없다면 직원들이 함께 일하고 싶지 않지 않겠어? ‘Fake it till you make it (그렇게 될 때까지 그렇게 보여라)’이라고, 실제로는 기쁘거나 활발하지 않더라도 웃고 떠드는 행동을 먼저 하면 기분도 따라서 행복 해질 때가 있어.

            질문 공세는 나한테서만 오지 않았다. 나는 유독 그를 대상으로 많은 질문을 퍼부어 대긴 했지만, 팀원들과 팀 프로젝트를 할 때, 다른 학교의 과제를 하지 않거나 수업을 듣고 있지 않지만 사람들과 함께 할 때 그의 배경을 알고 있거나 그의 에너지를 느낀 사람들 역시 그에게 많은 질문을 했다. 하지만 그때마다 그는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는 걸 주저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 시간들 동안 다른 사람들의 질문에 성심성의껏 대답하며 분위기를 밝히고 다른 이들을 도와주는 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모든 일에는 ‘단순히 다른 이들을 더 돕고자’하는 그의 진솔함이 함께했다. 




            우리에게는 많은 사회적인 틀들이 있다. 때로는 그 틀들을 ‘통념’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일반적으로 그래’라는 말로 원칙처럼 만들기도 한다. 20대까지는 어떤 일을 하고, 10대까지는 어떻게 살아오고. 그런 틀들 밖의 사람을 칭하는 명칭 역시 다양하다. 혁신가에서부터 아웃라이어, 혹은 아웃사이더까지. 

            고키의 이야기에서 내가 배운 몇 가지 지점이 있다면 그 이야기는 우리가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어온 ‘꿈을 가져야 성공할 수 있어’도 아니고, ‘꿈을 가져야 해’도아니었다. – 물론 아무 꿈도 없이 20년 후의 내가 어떤 모습에 가까워질지 이루는 건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 대신 그 어떤 사회적인 시선도 깨부수고, 가능하지 않다면 주어진 환경을 바꾸는 결단도 무릅쓰며 “개썅마이웨이”를 유지해 원하는 목표를 향해 나아왔다. 누구도 상상할 수 없는 시간들을 그는 견디고 나아왔으며 그 자체만으로도 박수받기에 충분하기도 하였는 데다가 지금은 자기 자신만을 위해 살고 있지 않다. 많은 분투가 있었을 것이다. ‘내가 소중하게 여기는 부서진 무언가’를 되찾고자 발을 내딛는 용기와 지속성. 결과보다 중요한 건 그 태도와 순간들을 헤쳐 나온 그의 태도들과 순간들이었다. 

            또 그가 바라보는 비즈니스에 대한 시각도 본받을만했다. 그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을 비즈니스의 본질이라고 생각했다. 경영학 수업에서도 많이 회자되는 내용이다. 하지만 직접 실천해보기 전까지는 피부로 느끼기 어려울 때가 많은데, 고키는 삶 속에서 자신의 문제와 가족의 문제, 주변의 문제들을 도움으로, 창업으로, 해결하며 나아온 게 ‘삶에서의경영’을 배운 게 아닐까 싶었기 때문이다. 또 그와 동시에그 자신과 자신의 가족의 문제가 해결되었을 지라도 자신의 꿈이 이루어진 그 자리에 안주하지 않았다. 이제 그의 목표는 세계 평화다. 한 순간에서 다음 순간으로 넘어갈 때 그냥 살지 않고, 다른 이들에게 도움이 되려 노력하는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한다. 

            그러면 그가 실질적으로 기울이는 노력들에는 또 어떤 것이 있을까? 그는 매일 6시 반에서 7시 사이에 일어나며, 단 시간에 가장 많은 칼로리를 소모한다는 운동을 매일 하고 있다. 건강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당은 거의 섭취하지 않으며, 과일을 최대한 많이 먹으려고 하는데 CEO가 되면 건강도 중요할 뿐만 아니라 그런 식습관을 유지하는 게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서 가장 좋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는 한 번에 집중할 때에도 최대한으로 집중하는 내면과 외면을 기르고자 늘 노력하고 있었다. 이렇듯 내면에서도 이미 평화를 찾고 그렇게 살아가다 보면 세계 평화에도 가까워질 수 있는 게 아닐까? –물론 이건 고키의 방식일 테고, 다들 각자 나름의 방식으로 말이다-)



            마지막으로 다음은 고키를 지켜보며, 또 고키의 이야기를 들으며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이다. 고키는 진심으로‘누구나 가능성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들’이라고 믿고 있었다. 자신이 누구나 동등하게 돕는 이유도 그래서 그렇다고 했다. 컨테이너는 조금씩 다를 수 있고, 운에 따라 어떤 사람을 만나느냐도 달라질 수는 있겠지만, 자신이 받은 게 많다고 생각해서 자신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준 사람들이 많았던 것만큼 자기 자신도 많은 사람들을 도우며 선한 영향력을 갚으려고 노력한다고 했다.

            그렇다면 왜 모두가 그처럼 노력하지 못하는 것일까? 단지 많은 사람들이 중간에 포기하거나, 안 좋은 길로 빠지는 이유는 어쩌면 ‘온전히 그 잠재성을 믿어주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고. 그가 3에서 5년 동안 인도 지부에서 직원들을 교육하고 생활하고 지켜보며 느낀 바가 그랬다. 지금은 인도 지사 등지로도 회사의 시스템을 개선하려 출장을 가는데 그때마다 다양한 인도 사람들을 마주친다고 했다. 그 사람들도 처음에는 우왕좌왕하고 나쁜 일을 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2~3년이고 믿고 기다려주면 변화하는 모습을 보았다며 이제는 자신이 다른 사람을 믿고 기다려주는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했다. 이 얘기를 하는 고키의 얼굴은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어느 누구든 끝까지 믿어준다면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려서든 변하기 마련이라고.

            또 GRIT을 아냐고도 했다. 열정과 포기하지 않는 힘. 자기 자신은 그 힘을 믿고 있으며, 되돌아보면 힘들었던 하루 가지 나고도 다시 지속해 열정을 불태웠던 게 도움이 되었던 것 같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고키의 이야기들을 들으며, 우리 주변에는 얼마나 많은, 우리가 알지 못하지만 정해진 규격에 딱 맞지 않다고 줄에서 배제된 ‘고키들’이 있지는 않을지 여러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리고 그 ‘고키’의 일부일부들은 곧 우리 자신의 일부이지는 않을지 싶었다. 여러 가지 이유로 우리는 ‘정상’의 궤도에서 벗어날 때가 있다. 그런데 그렇다면 그 정상은 누구 기준이람? 원래 기준은 각자여야 하지 않을까? 성장의 속도도 각자의 기준으로, 발전의 속도도 각자의 기준으로. 여러 생각이 얽혔지만 결론은 그랬다.

            서로가 서로를, 각자가 각자의 반짝반짝한 잠재성을 믿어주며, 아직은 내가 밝게 빛나는 별빛이 아니더라도 스스로부터 강하게 믿어야 한다. 그리고 더 많이 서로에게 기울고 때로 어깨도 내어줄 수 있어야 한다. 고키가 그랬듯, 또 우리 하나하나가 그렇듯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각기 다른 빛을 안고 태어난 존재들이다. 지금 이대로도 아름답고, 나아지려고 노력하는 모습도 아름답지만 결코 어느 누구도 혼자는 아니다. 우리는 모두 과정 중이며 우리 안의 능력과 희망이 가득한 잠재력들을 믿으며 용기 있게 함께 저벅저벅 나아간다면 좋겠다. 

매거진의 이전글 대망의 구글 캠퍼스, 신규 회원 밋업을 다녀오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