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지금이 몇 신데, 아직도 집 밖이야?
날이 선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로 들려옵니다. 밤 열두 시였어요. 그리고 친구들과의 팟캐스트 녹음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였지요. 집에서 통금은 없었지만 저는 꽤나 일찍 집에 돌아들어가는 편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조금이라도 늦으면 이 사단이 났어요. 귀가 시간이 늦으면 대역죄인이 된 듯한 기분이었지요. 물론 걱정하시는 부모님 마음은 알지만, 저는 그런 상황 자체가 답답했어요. 남동생한테 대하시는 태도와는 180도 달랐거든요.
제 남동생은 그 후 얼마지 않아 밤을 새우고 집에 아예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알고 보니 친구들과 함께 사우나에 놀러 간 거였어요. 하지만 부모님께서는 안전하게 귀가는 하는지, 어딜 가 있는지 여쭤보시지도 않고 주무셨고, 다음 날 아침에 늦게 들어와서야 들어왔구나 확인하셨습니다. 물론 친구들과 더 멀리 여행을 가는 것은 말할 것도 없었겠지요. 그리고 이런 다른 상황은 살면서 제가 느낀 ‘불공평’의 일부에 지나지 않습니다. 물론 저도 잘 압니다. 부모님께서 저를 걱정하시는 마음이 들 수밖에 없고, 드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이 됩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한 편으로는 그 마음이 왜 당연한 마음이어야 하는가 의구심이 드는 거예요. 왜 몸조심은 여자가 해야 하는 거고, 성희롱이니 성폭행이니 돌이킬 수 없는 엄청난 일이 벌어지면, 여자가 더 수치심을 느껴야 하는 걸까요? 엄연한 범죄의 피해자인데도요? 저도 게임 롤을 좋아했지만 피시방에서 밤을 마음껏 새우는 남자아이들을 보면서, 국내 무전여행을 몸과 깡만 갖고 훌쩍훌쩍 다닐 수 있는 남자아이들을 보면서 늘 비슷한 의문들이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것을 막을 수 없었습니다.
작년 한 해, 서점가를 휩쓸었던 책 82년 생 김지영에 보면 다음과 같은 대목이 나옵니다.
늦은 밤, 학원이 끝나고 고등학생이었던 김지영 씨는 공공 버스를 타고 집에 돌아가는 길이었어요. 갑자기 웬 낯선 남자가 말을 걸어오는 겁니다.
“몇 번 타세요?"
“네? 왜요?”
“데려다줬으면 하는 것 같아서.”
“네? 아니에요, 아닌데요. 가세요.”
왠지 모를 섬뜩함을 느낀 김지영 씨는 버스 문이 닫히기 직전까지 기다렸다가 버스에 와다다 올라탑니다. 하지만 이런, 그 남자도 뛰어서 함께 탔어요. 놀란 김지영 씨는 식은땀을 줄줄 흘리면서 남자 몰래 한 아주머니께 휴대폰 빌리기에 성공하는데요. 아버지께 다급한 연락을 드립니다. 하지만 어두컴컴한 집 앞 정류장은 다 와 가고, 왠지 혼자 그 정류장에 남자와 단 둘이 남겨질 위기에 봉착하는데요, 아니나 다를까. 김지영 씨가 정류장에 내리자, 남자도 따라 내립니다. 외진 정류장에는 개미 새끼 한 마리 없었고, 뒤따라 내린 남자가 낮게 읊조리며 김지영 씨에게 다가오지요.
“너 항상 내 앞자리에 앉잖아. 프린트도 웃으면서 주잖아. 맨날 갈게요, 그러면서 흘리다가 왜 치한 취급하냐?"
김지영 씨는 몰랐습니다. 자신이 프린트를 줄 때 어떤 표정으로 누군가에게 주는지. 그때 다행히, 버스에서 핸드폰을 빌려 준 아줌마가 다급히 버스를 세우며 내려서 김지영 씨를 찾고, 마침 연락을 받은 아버지도 김지영 씨를 데리러 옵니다. 하지만 크게 혼나는 건 김지영 씨 쪽이었지요. 왜 그렇게 멀리 학원을 다니느냐, 왜 아무 하고나 말 섞고 다니느냐, 왜 치마는 그렇게 짧냐...
그러고도 더 이어지는 이 이야기는 82년에 태어난 김지영 씨를 주인공으로 끌어나가고 있지만, 2018년인 지금이라고 상황이 별반 다르지는 않아요. 그 점이 저는 가장 책을 읽으면서 속상한 부분이었습니다.
사실 일상생활에서 겪는 불편함은 이런 작은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82년 생 김지영이라는 책을 읽어도 더 생생하게, 더 자세하게 볼 수 있지만 저는 제 나름의 시각으로 그 불편함을 전달해보고자 합니다.
우선 어렸을 때 반장 선거를 하면서 느꼈던 기분입니다. 물론 회장 따로 부회장 따로 나뉘어 있었고, 심지어 여자 회장 남자 회장 나뉘어서 선거를 했습니다. 하지만 늘 저는 불편한 기분을 버릴 수가 없었던 때는 회장으로 선출되기 전보다도 선출된 후였습니다. 원래 회장이라는 자리가 마음가짐과 몸가짐을 조심해야 하는 자리이긴 하지만, 저는 특히 더 어떻게 하면 “남자아이 같이 행동하지 않으면서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을까”가 제 지상 최대의 고민이 되었거든요. 그리고 그런 고민은 사춘기에 접어든 제게 아주 불편한 일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저는 항상 가능하다면 두 배 이상으로 몸가짐을 조심했었는데요, 그 바탕에는 ‘혹여 미움을 살까 봐’라는 조심스러운 심리가 늘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그 마음이 어떤 심정이었는지, 지금까지는 잘 몰랐는데 마침 최근에 그 심정을 잘 정리해둔 책을 발견했어요! 그 책에서의 표현을 빌려와 볼게요.
“친구들로부터 놀랐던 점은 '호감 가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 엄청나게 애쓴다는 것이었습니다. 또 호감을 얻는 것은 아주 중요한 일이며 그 '호감 가는' 성격이란 구체적으로 정해져 있다고 믿도록 교육받았다는 점이었습니다. 그리고 '호감 가는' 성격의 구체적인 속성에는 화를 표출하거나 공격적이거나 너무 큰 목소리로 반대하는 것은 포함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모두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합니다’라는 책에서 ‘치마만다 응고지에’라는 작가가 쓴 말입니다. 정확한 표현이었습니다. 막상 회장으로 활동할 때는 몰랐는데, 저는 늘 저런 마음가짐으로 활동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호감 가는 성격이려고 노력하는 기질은 중고등학교를 지나 대학교 때까지도 지속되었지요.
저는 늘 발표를 준비할 때면 거울 앞에서 몇 분씩은 꼭 ‘목소리 톤’ 조절을 했습니다. 발표를 할 때 혹여 너무 공격적 이어 보이거나, 나대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을까 하고요. 또 옷도 너무 남성스럽거나 지나치게 딱딱해 보이지 않게 입으려고도 했어요. 더 많이 공감을 얻고 호감을 받기 위해서였지요. 발표를 할 때에도 이렇다 보니 소개팅 자리는 말할 것도 없었습니다. 나중이 될수록 그런 자리들이 부담스러워진 건 따라서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었어요. 그리고 이게 저만의 문제가 아니었다는 걸, 단순한 문제도 아니었다는 것은 책의 다음 구절을 읽고 깨닫게 됩니다.
"우리는 여자아이들에게 남자아이들이 그들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걱정하도록 가르치는 데 너무 많은 시간을 쏟습니다. 하지만 거꾸로는 하지 않습니다. 남자아이들에게 어떻게 하면 호감 가는 사람이 될지 걱정하도록 가르치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여자아이들에게 화내선 안되고 공격적 이어선 안 되고 터프해서도 안 된다고 가르치는 데 너무 많은 시간을 쏟는데,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나쁘지만 더구나 돌아서서는 똑같은 행동을 한 남자들을 칭찬하거나 면책해줍니다. 전 세계 어디에나 여자들에게 남자의 마음을 끌거나 남자를 기쁘게 하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어떻게 하지 말아야 하는지를 가르치는 잡지며 책이 넘쳐납니다. 그에 비해 남자들에게 여자를 기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가르치는 글은 훨씬 적습니다.”
이 일은 교육의 문제입니다. 게다가 남자와 여자에게 가르치는 출발점이 다른 건데, 저는 생각보다 큰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저는 이 문제를 ‘영혼의 전족’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이런 식의 교육은 자유롭고 다채로운 우리들의 영혼이 여러 방면으로 피어나는 걸 막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여자아이들에게 자신을 움츠리고, 자신을 위축시키라고 가르칩니다. 우리는 여자아이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야망을 품는 것은 괜찮지만 너무 크게 품으면 안 돼. 그러면 남자들이 위협을 느낄 테니까. 설령 남자와의 관계에서 네가 가장 노릇을 하더라도, 사람들 앞에서는 특히 그렇지 않은 척해야 해. 안 그러면 남자가 기가 죽을 테니까."
여자아이들이 태어난 모습 있는 그대로 살아간다면 대체 어떤 일이 일어나기에 이러는 걸까요?
뿐만 아닙니다. 취업 시장에서 ‘여성’이라는 점은 극복하기 어려운 장애를 안고 있는 것과 다름없다는 말도 들려왔습니다. ‘여대’라는 공간에서 똑같이 교육받고, 똑같이 꿈을 키워오고, 또 똑같이 배움을 나누던 입장에서는 다분히 이해가 가지 않는 상황이었지요. 많은 친구들이 그렇듯 저 역시 대학교 4학년 동안 소위 말하는 ‘여대’에 다니면서 자연스레 ‘당당하고 멋진 커리어 우먼’을 꿈꿔왔습니다. 그 모습은 회사에서 어떤 어려움과 역경에도 굴하지 않고, 자신의 목소리를 내며 팀과 회사의 성장을 이끄는 리더의 이미지와도 비슷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꿈은 헛된 꿈이었는지, 소위 고학년으로 올라갈수록 동기들 사이에 자조 섞인 한숨이 피어올랐습니다. 학점 따기가 더 빡빡하다는 ‘여대’라는 공간에서 경쟁을 하다가 이제는 취업을 하려나 예상했는데 취업은 바늘구멍을 뛰어넘는다는 이야기들이 들려왔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이유 중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여자라서”였습니다.
"청년 취업 시장에서 여성들은 흔히 ‘남자가 최고의 스펙’이라는 자조 섞인 탄식을 내뱉는다. 비슷한 혹은 더 뛰어난 스펙을 지니고 번번이 남성들에게 밀리는 현실을 빗댄 표현이다. 질 좋은 일자리로 여겨지는 대기업 공채를 보면 매년 남녀 응시 비율은 비슷한데 취업에 성공한 신입 사원 성비는 압도적으로 남성이 높다. 요즘처럼 고용이 얼어붙은 때에 여성 청년 구직자들이 느끼는 이 불문율은 차라리 ‘철의 법칙’이 되고 만다. 반면 질 나쁜 비정규직에선 여성이 꾸준히 늘고 있다. 통계청이 2015년 8월 발표한 ‘경제활동인구조사 부가조사 결과’를 보면 비정규직 근로자 627만 명 가운데 여성은 339만 명 (54.0퍼센트)이다. 1년 전에 견줘 남성 비정규직은 2.0퍼센트 증가한 반면 여성은 4.3퍼센트나 증가(13만 8천 명)했다. 임금 격차도 심해졌다. 비정규직 중 고용의 질이 가장 떨어지는 ‘시간제 노동자’ 월평균 임금이 남성은 79만 3천 원, 여성은 66만 6천 원으로 12만 7천 원의 차이가 난다. 지난해는 7만 원 차이였다. ‘차별의 이름’ 비정규직이 여성한테 집중되면서 ‘빈곤의 여성화’는 갈수록 깊어지고 있다.
남자들이 취업 잘 된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다’ 잘 안 되는데, 여자들은 ‘더’ 잘 안된다는 것이다. 저렇게 말해도 자꾸만 ‘세상이 좋아졌다’는 분들이 많다. 공무원 같은 경우는 절반이(49퍼센트) 여성이라면서 증거자료도 내민다. 하지만 1~3급 고위직 여성 공무원은 전체의 4.5퍼센트에 불과하다. 10대 그룹에서 여성이 임원으로 승진할 확률이 0.07퍼센트이고 공기업의 경우는 (사실상 제로를 뜻하는) 0.002퍼센트다. 기업 이사회에서의 여성 비율을 보면 한국은 2.1퍼센트로 OECD 국가 평균 16.7퍼센트에 비해 매우 낮다. 전체 노동자의 남녀 임금 격차도 36.6퍼센트로 OECD 국가 평균 15.6퍼센트보다 배 이상이다. 그러니 과거에 비해 ‘회사에’ 여자들이 증가했지만 여전히 OECD 국가 중 ‘유리 천장 지수’가 1위다. 지하철이 ‘출근하는 여자들로 붐빈다고’ 세상 좋아진 거’ 아니라는 말이다. 20대 대기업의 여성 직원 비율은 14.5퍼센트에 불과하다. 근속 연수도 남성은 13.8년이지만 여성은 9.2년이다.”
아무리 과거에 비해 교육 환경과 교육의 질이 나아졌다고 한들 무슨 소용인가요. 그 배움을 펼칠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면요? 많은 친구들이 밝은 미래를 꿈꾸며 대학에 입학했다가도 공무원 준비를 하거나, 고시를 택하는 이유도 분명 이런 현실과는 무관하다고 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점차 낮아지는 결혼율, 출산율 등을 종합적으로 생각해볼 때 ‘고용의 불평등’도 한몫하지는 않을지 생각이 떠오르는 건 자연스러운 것 같아요. 지금 내 몸 하나의 미래도 챙기기가 버거운데, 어떻게 다른 사람과 함께할 미래를 그리고, 가정을 꾸리고, 새 생명을 꿈꿀 수 있겠나요? 개인적으로는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뿐만이 아닙니다. 저는 아직 겪어보지 못한 출산, 육아에 관한 고민을 인터뷰이 분들께서도 하고 계셨습니다.
Enoughome 창업자셨던 이정현 님께 업무로 인해 결혼 혹은 육아에 관해 고민해본 적이 있냐고 여쭤봤습니다. 돌아온 답변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지금도 매일 고민해요. 결혼한 여성으로서 일과 가정의 발란스를 맞추는 일은 참으로 많은 결정이 필요해서요. 확실히 회사 내에서 여성 분들이 육아와 회사를 병행하기가 쉽지 않을 거예요. 왜냐하면 육아 휴직을 내고 자리를 비우게 되면, 그 기간 동안 같은 직급의 사람들이 승진하는 경우도 봤어요. 진급에서 누락이 되는 거죠. 자리를 비운 동안, 회사에서는 그 기간 동안 열심히 일했던 사람한테 자리를 주지, 없었던 사람에게 주기는 어렵잖아요. 그래서 진급 누락이 계속되는 사람이 만족을 못 하는 거고, 퇴사하는 경우까지 생기는 거죠.
저도 출산과 육아 문제 때문에 스타트업을 시작한 것도 있어요. 미국에서 육아를 하려면 홈오피스로 일을 하고 싶은데. 제가 뉴욕에서는 셰어 오피스를 했었거든요. WeWork는 아이도 데려갈 수 있고, 강아지도 데려갈 수 있는 오픈된 업무 환경이에요. 그런 이유들로 창업하는 사람들이 있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게다가 위 워크의 커뮤니티 매니저 김정현 님의 답변은 다음과 같았고요.
“정말 이건 화나는 일이지만, 한국 사회에서 어쩔 수 없이 아직 일어나고 있는 일인 것 같아요. 예를 들어, 제 친구가 임신을 하게 되었을 때, 조직 평가를 받을 때 그전까지는 A를 받았는데 이제는 임신을 했다는 이유 만으로 갑자기 꼴등을 받았어요. 그렇게 했을 때, 조직장의 이유는 아무래도 너는 임신도 했고, 육아 휴직을 하게 될 텐데, 네가 이번에 팀을 위해서 희생을 한 번만 해라고 하셨다는데, 저는 그건 정말 용납할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는 사고방식인 것 같아요. 그런데 그건 흔히 일어나는 일이고, 부당하다고 말할 수 있는 배출구도 사실 많이 없고. 그게 정말 너무 안타까워요. 그리고 육아 휴직했다는 이유만으로, 주홍글씨처럼 남아서 나중에 이직을 할 때에도 쉽지가 않아요.”
이런 상황에서는 당연하게도 정말 임신은? 출산은?이라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여자도 똑같이 일을 통해 성취감을 느끼고 싶고, 공부한 만큼 실력을 발휘하고 싶은데, 임신을 했거나 육아를 해야 한다는 이유만으로 차별 대우를 받는다면 누가 쉽게 아이를 선택할 수 있을까요? 그렇다고 물론 기업 입장에서도 업무의 양을 생각한다면 바로 육아휴직을 남발하기도 힘든 구조인지라 진퇴양난일 수 있지요.
그렇다면 끊임없이 고령화, 저출산의 굴레가 계속된다는 이야기일 수 있는데, 정말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요?
그렇다고 저는 함께 흑빛 미래를 그리자고 이야기하고 싶지는 않아요. 대신 더 두 눈 부릅뜨고 현실을 쳐다보자고 제안하고 싶은 겁니다. 제대로 된 현실 인식이 제대로 된 미래로 가기 위한 연결 통로가 되어줄 테니까요. 그리고 이상은 제가 느껴온 여러 측면의 불공평이나 불평등의 단편들을 두 눈 부릅뜨고 바라본 것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