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다면 여성들만 이러한 불편함을 겪고 있는 걸까요? ‘성별’의 문제에 있어서 ‘성차이’가 아니라 ‘성차별’적인 측면을 들여다보면, ‘남자니까 남자다워야지’라는 말도 꽤 폭력적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한 번도 남성으로 산 적이 없기에 직접적으로 그 불편함을 겪어본 적은 없지만, 제가 조사해본 바에 따르면 남성들도 불편함을 호소하고 있었습니다. 또 지나친 남성성의 강조를 멀리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남성들도 있었고요. 결국, 남성들도 일상 속에서 ‘남자다워야 해’라는 프레임의 피해자일 때가 많아요. 이 글들을 통해 이야기하고 싶은 ‘페미니즘’은 남성들도 그 불편한 프레임으로부터 얼마든지 자유로워질 수 있다고 이야기하고 싶은 것입니다.
책 ‘맨 박스’의 저자 ‘토니 포터’는 성인이 된 어느 날, 아주 고통스러운 날, 기이한 경험을 하게 된 것을 이야기합니다. 바로 동생의 장례식에서 눈물을 쏟지 않는 아버지를 보게 된 것이지요. 여기에 의문을 갖게 됩니다. 왜 아버지는 늘 강인한 모습만 지녀야 하는 걸까요? 아버지의 등이 왜소하게 느껴질 때가 오듯이, 우리의 아버지도 아버지이기 이전에 다양한 감정을 가지신 한 사람의 인간이지 않을까요? (물론, 이후에 아버지는 울음을 터뜨리십니다. 어머니와 누이동생들이 잠시 자리를 비웠을 때요. 그리고, 이내 울음을 터뜨린 것에 대해 아들에게 사과하십니다.)
물론 모든 아버지가 이처럼 강인한 모습만 가지고 계시지는 않습니다. 저희 아버지도 매우 감수성이 풍부한 분이세요. 올림픽에서 메달을 따는 선수만 보아도 눈물을 닦으시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한 번도 아버지를 ‘약한 존재’라고 여긴 적은 없지만, 가끔 엄마께서는 아빠께서 눈물 지으실 때 저를 툭툭 치며 아버지 감수성이 또 폭발하셨다고 장난스레 웃곤 하셨습니다. 그리고 남자와 눈물이 어딘지 어울리지 않는 단어라고 배워온 건 부정할 수 없는 현실입니다.
아버지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인데요, 잠깐 저희 아버지 이야기로 넘어와 보려 합니다. 저희 아빠는 회사원이십니다. 30년 넘게 한 회사를 다니셨고, 은퇴도 얼마 앞두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저희와 친해지신지도 얼마 되지 않으셨지요. 저회 아빠는 회사원이셨기 때문입니다.
모든 집이 다 저희 집 같지는 않을 수 있어요. 가정적인 아버님들도 계시겠지만, 저희 집은 그러지 못했어요. 적어도 저희 집처럼 한 부모가 가정을 부양할 경우에, 또 그 부양자가 회사원일 경우에는 쉽지 않은 일이 ‘집에 일찍 들어오기’였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는 초중학교 때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많이 없습니다. 어린 제게 아버지는 늘 집에 왔다 가시는 ‘손님’ 같았습니다. 일주일이 7일이면 3-4일은 회사에서 술을 드시고 오셨거나, 늦게 오셨고, 그러다 보면 주말에는 아버지 혼자만의 시간을 두고 쉬셨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나쁜 기억들만 있는 건 아닙니다. 아빠는 짬을 내어 저희와 자전거를 타러 한강에 함께 다녀왔고, 가족 여행 때마다 도 함께 계셔주시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양육”과 “교육”은 늘 어머니의 몫이었고, 아버지께서 아버지 스스로를 ‘돈 벌어다 주는 사람’이라고만 인식하신 것은 아닌지, 저는 때로 서운했습니다.
그렇게 어릴 때는, 집에 늦게 들어오시는 아버지, 술을 자주 드시는 아버지, 회사에 오래 계시는 아버지를 저는 잘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최근에 ‘페미니즘’ 관련해서 공부하면서 아버지의 힘듦을 더 잘 이해하게 되었다면, 그렇게 되었다고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앞 단원에서 여성들이 커리어 사다리에서 많이 탈락되는 과정을 살짝 언급한 적이 있지요? 이러한 탈락들은 사실 여성들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결국 여성들의 직업 사다리 탈락은 남성들에 대한 피해로 되돌아옵니다. 물론 양육의 문제로 경력이 단절되는 건 주로 여성이고, 다시 직장에 복귀를 하더라도 여성들은 직장을 포기하지 않은 남성이나 여성보다도 적은 월급을 받고 다시 커리어를 시작하기 어렵게 되는 것도 여성입니다. 결국에 이런 불편함은 임금 격차로 이어지는 거지요. 표면만 보면 여성만 불리한 위치에 놓이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생긴 남녀의 페이 갭은 여성에게만 그림자를 드리우지 않기 때문에 여성의 커리어 단절 문제는 여성들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이번 인터뷰를 통해 만나 뵌 유연실 님께서는 (*SAP 싱가포르, 구글 싱가포르를 거쳐 지금은 업플 라이를 운영 중이신)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문제는 이게 여성들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거죠. 남녀 간의 페이 갭이 심화되면 자연스럽게 남자들이 경제적 부담을 더 많이 지게 되잖아요. 생활비, 육아 교육비, 은퇴 비 등 지출 비용은 점점 더 늘어나는데, 남자가 그 큰 부담을 혼자 짊어지는 건 너무 힘들죠.
그렇습니다. 저희 아버지는 늘어나는 지출 비용의 풍파 앞에서 혼자 서 계셨던 겁니다. 자식은 셋이고, 가족들에게 떳떳한 가장이 되려면 사회생활도 아빠 노릇 못지않게 잘 해야 합니다. 술이 없으면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회식 자리에서 술을 못 한다고 뺄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렇게 아버지는 서투르게, 서투르지만 아버지 나름대로 아버지의 몫을 다 하기 위해 노력하신 게 아닐까라는 생각이 이제는 들었습니다.
이는 ‘저희 아버지’의 특수성이라면 특수성입니다만, 그렇다면 대한민국의 남성들은 ‘남자’이기 때문에 힘든 점은 또 없을까요? 앞에 잠깐 언급해 듯이, ‘감정 표현’과 관해서 남성들은 여전히 괴로움을 겪을 때가 많습니다. 약해 보이지 않기 위해서요.
남성들은 남 앞에서 감정을 드러내는 것에 대한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분노를 표현하는 것은 예외입니다.) 우리는 남성으로서 감정을 공유하거나 내보이는 건 나약함의 증거라고 배웠습니다. 남자는 강하고 여자는 약하다고 배웠습니다. 분노를 제외한 모든 감정을 억누른 채로 살고, 아무리 힘들어도 약한 모습을 보이지 말라고 배웠습니다. 우리가 배운 ‘남자’가 되는 법의 대부분은 여성의 성향이나 관점이라고 생각되는 것들로부터 거리를 두는 데서 시작됩니다. 남자다움의 정의를 여성과 차별되는 성향으로 구분 짓습니다.
앞서 언급한 맨 박스에서 나오는 글입니다. 어떤가요, 어느 정도 동의하시나요? 동의하신다면 왜 동의하시고, 동의하지 않는다면 왜 동의하시지 않으시나요?
TED의 한 남자 배우는 다음과 같은 고백을 하기도 했습니다.
저는 평생에 걸쳐 제 스스로가 아닌 어떤 남성이 되려고 가장해왔습니다. 스스로가 약하게 느껴질 때 강한 척, 불안정할 때 자신 넘치는 척, 실은 상처받고 있을 때 강인한 척을 했죠. 대부분의 시간 동안 그저 '쇼'를 해왔다는 생각인데요, 이제 그런 가장은 지겹습니다. 그리고 지금 여러분께 말씀드릴 수 있는 건, ‘누구나를 위해서 언제나 남자답게 행동하는 건’ 굉장히 기운 빠지는 일이라는 거예요. 맞죠?
어느 정도 공감하시나요?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이 남성이라면 방금 이 배우의 고백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왜 우리는 이렇게 피곤한 족쇄를 차고 있어야 하는 걸까요? 우리를 자유롭지 못하게 하는 ‘성별’의 고정관념을 깨고 이 너른 세상을 훨훨 누빌 수는 없는 걸까요? 또 그렇게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또 다른 글도 봐봅시다. 불편함은 일상생활에서 뿐만이 아닙니다. 기업 내부의 측면에서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왜 굳이 남성만 높은 직급으로 계속 올라가야 하는 걸까요? 한 조사기관에 따르면 1/3의 남성은 굳이 높은 직급으로까지 올라가고 싶지 않다고 말했습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높은 직급은 더 많은 책임, 필요하다면 더 많은 야근(?)을 요할 테지요. 또 직선적이고 신속한 의사 결정과 리더십이 필요한 자리이니 만큼 성격이 맞지 않는다면 높은 자리가 꺼려질 법도 합니다. 남자라고 장군 같기만 하고 리더십이 넘치기만 할 수 있을까요?
또 그런 남성들에게까지 굳이 높은 자리를 권해야 하는 걸까요? 생각해볼 문제입니다.
그렇다면 경제적인 측면은 어떨까요. 앞서 언급했듯이, 우리는 남자아이들에게 ‘나약한 자가 되면 안 된다’고 가르치는 것과 더불어 ‘남자는 물질적으로 남성성을 표현할 수 있다’고 가르쳐왔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모두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합니다>의 치마만다 응고지에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만일 남자아이든 여자아이든 남성성과 돈을 연결 짓지 않도록 배운다면 어떨까요? ‘원래 남자애가 내는 거야’ 대신 ‘남자든 여자든 돈이 더 있는 사람이 내는 거야’라는 태도를 취한다면 어떨까요? 물론, 지금까지 누려 온 이점이 있기 때문에 오늘날 실제로 돈이 더 많은 사람은 대체로 남자일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지금부터 아이들을 다르게 키운다면, 앞으로 오십 년 혹은 백 년 뒤에는 남자아이들이 자신의 남성성을 물질적 수단으로 증명해 보여야 한다는 압박은 더는 느끼지 않을 것입니다.
올 어바웃 러브라는 책에는 다음과 같은 의견도 있었습니다.
"많은 남성들의 내면에는 어린 시절 상처받은 모습 그대로의 소년이 웅크리고 있다. 그 소년은 억압적인 부모와 가부장제 질서에 눌려 침묵을 강요당한 채, 자신의 느낌을 있는 그대로 드러낼 기회를 한 번도 갖지 못했다.... 남자든 여자든 진실을 말하는 상대를 막아서는 안 된다. 그렇게 되면 우리 사회에는 거짓말이 더 낫다는 생각이 팽배할 것이다. 진정한 사랑을 하기 위해서는 서로의 진실에 기꺼이 귀를 열 줄 알아야 한다. 게다가 무엇보다 중요한 사실은 진실을 이야기하는 것은 그 어떤 경우에도 최고로 가치 있다는 점이다. 거짓말은 사람들을 기쁘게 할지는 모르지만, 그런 상황에서는 결코 사람들 사이에 진정한 사랑이 싹틀 수 없다."
남자든 여자든 고정된 ‘여성성,’ ‘남성성’을 버리고 있는 그대로의 나 자신을 사랑할 수 있게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렇게 프레임을 제거한 나 자신은 더 이상 나 자신이 아니게 되는 걸까요? 아니면 정 반대로 성별을 벗어난 진정한 나 자신이 되는 걸까요?
또 그렇게 나 자신을 향한 사랑이 상대를 향한 진정한 사랑으로까지 이어진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함께 더 읽어보면 좋을 자료들.
치마만다 응고지에의 ‘우리는 모두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합니다’에 나오는 글귀입니다. 다음과 같은 의견에 동의하시나요? 동의하신다면 왜 동의하시고, 동의하지 않으신다면 왜 동의하지 않으시나요?
아들을 다르게 키우는 법
"젠더는 세계 어디에서나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리고 지금 나는 여러분에게 현재와는 다른 세상을 꿈꾸고 계획하는 일에 나서자고 요청합니다. 지금보다 좀 더 공정한 세상을, 스스로에게 좀 더 진실함으로써 좀 더 행복해진 남자들과 좀 더 행복해진 여자들이 살아가는 세상을 말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우리 딸들을 지금과는 다르게 키우는 것입니다. 우리 아들들도 지금과는 다르게 키워야 합니다.
지금 우리가 남자아이들을 기르는 방식은 아이들에게 몹쓸 짓을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남자아이들의 인간성을 억압하고 있습니다. 남성성을 대단히 협소한 의미로만 정의합니다. 남성성은 좁고 딱딱한 우리와 같고, 우리는 그 속에 남자아이들을 밀어 넣습니다.
우리는 남자아이들에게 두려움, 나약함, 결점을 내보이는 것을 두려워하라고 가르칩니다. 자신의 진정한 자아를 감추라고 가르칩니다. 왜냐하면 남자아이는, 나이지리아 표현으로, 단단한 남자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우리가 남자들에게 저지르는 몹쓸 짓 중에서도 가장 몹쓸 짓은, 남자는 모름지기 강인해야 한다고 느끼게 함으로써 그들의 자아를 아주 취약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남자들이 스스로 더 강해져야 한다고 느낄수록 사실 그 자아는 더 취약해집니다."
또한 여러분은 ‘성별로부터의 자유’를 떠난, ‘사랑’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다음은 ‘올 어바웃 러브’에 나온 ‘공평한 사랑’에 관한 내용입니다. 다음 글을 읽고 공평한 사랑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떠올려 봐도 좋을 것 같아요.
공평한 사랑
"남성 지배 사회를 철폐하기 위해 노력하는 남성 사상가들은 남자들이 권력의지를 벗어던질 때에만 사랑으로 되돌아갈 수 있다고 말한다. 스톨텐버그는 ‘남성성의 종말’에서 남자들이 정의를 사랑하게 될 때, 즉 사랑은 누구에게나 공평하다는 것을 받아들일 때 남자들은 자신의 진정한 자아를 되찾게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공평함은 사람들끼리 맺는 관계 속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다’ 자기 자신은 물론 다른 사람과 공평한 사랑의 관계를 맺을 때 남자들은 가부장제의 남성성이라는 숨 막히는 족쇄에서 헤어날 수 있다. 스톨텐버그는 남성성의 종말 가운데 ‘남자들은 어떻게 해야 여자들과의 관계를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끌 수 있을까’라는 장에 이렇게 썼다.
'남녀 사이의 공평한 사랑은 가부장제의 남성성이 부각되는 상황을 원천적으로 차단한다. 공평한 사랑보다는 여전히 가부장제의 남성성에 계속 집착할 때 여성과의 관계가 어떻게 귀결되는지는 불을 보듯 뻔하다. — 양식 있는 남자로 살아가는 법을 배우는 것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충실하겠다고 결심한다는 뜻이며, 다른 남자들이 남성성이 어떻다는 등 떠들더라도 개의치 않고 당신의 사랑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다.'
남자와 여자가 자기 자신과 타인에게 충실하고, 공명정대한 사랑을 실천한다면 거짓이 둘 사이의 충만하고 애정이 넘치는 관계에 금이 가게 하거나 사랑을 방해하지 못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다시 아버지 이야기로 돌아오겠습니다. 아버지도 자식들을 보고 싶으신 마음은 어머니와 똑같습니다. 어쩌면, 그 애틋한 마음은 어머니의 그 마음과는 또 다를 수도 있지요. 그렇다면 양육의 부담만 나눌 것이 아니라, 가정을 꾸리는 즐거움도 함께 나눈다면 어떨까요? 어떻게 하면 가족을 함께 꾸리는 즐거움을 함께 나눌 수 있을까요?
이코노미스트에 따르면 놀랍게도 북유럽 성평등 지표 최상위권에 빛나는 스웨덴은 워킹 맘에게만 좋은 환경을 제공하고 있지 않았습니다. 남성 육아휴직 제도에서도 높은 수치의 사용률을 보였기 때문이지요. 90%에 달하는 스웨덴 아빠들이 육아 휴직 제도를 사용하고, 이제 막 아빠가 된 남성들에게 이 시스템은 더 이상적인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2013년에는 34만 명의 아빠들이 육아 휴직을 사용했는데 대략 7주에 달하는 기간을 사용했습니다. 여성들도 아이들과 시간을 보내기 위해 더 많은 시간을 휴직하지만 대체 아버지들은 왜 자녀를 양육하기 위해 그토록 많은 시간을 쉬는 것일까요?
40년 전, 스웨덴은 성 중립적인 유급 휴가 제도를 도입한 첫 국가였습니다. 이 제도는 아이 한 명당 180일 동안 90프로에 달하는 임금을 주며, 부모들은 그 일수를 마음대로 분배해서 사용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빠들에게 그 제도는 거의 통하지 않았습니다. 제도가 시행된 첫 해, 오로지 0.5%만의 남성들이 유급 부모 육아 휴직 제도를 사용했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오늘날은 부모 유급 육아 휴직 제도 비율이 25%에 달합니다. 첫 번째 이유는 제도가 더 관용적으로 변한 것도 있는데, 첫 째 아이일 경우 유급 육아 휴직 일수는 180일에서 480일로 증가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육아 휴직 일수를 더 공평하게 나눌 수 있도록 제도 자체도 더 수정되었습니다. 1995년에는 소위 ‘아버지의 달’이라고 불리는 달이 처음으로 도입되었습니다. 이러한 개혁 아래, 부모 중 한쪽이 적어도 한 달 이상을 육아 휴직을 할 경우, 그들이 받은 전체 휴직 일수에 한 달을 더 추가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제도는 2002년에 더 확대되어서, 부모가 각각 최소 두 달의 휴가를 낸다면, 가족 전체가 두 달을 더 휴직을 할 수 있도록 확대되었습니다.
그리고 변화는 일어났습니다. 스웨덴 아빠들이 더욱 육아를 할 수 있도록 더 많은 책임을 지게 된 후로, 여성들의 수입과 자신이 직접 체크한 행복도 모두가 상승했습니다. 남성들이 기저귀를 갈 수 있도록, 또 놀이터에서 아이들과 놀 수 있도록 아버지에게 임금을 주는 것은, 곧바로, 가족 모두를 위한 일이라고 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출처 : 이코노미스트 https://www.economist.com/the-economist-explains/2014/07/22/why-swedish-men-take-so-much-paternity-leave)
남성성이란 무엇일까요?
또 우리들의 아버지들도 이렇게 유급 육아 휴직을 누리는 것은 너무나도 먼 이야기일까요?
아버지들의 행복을 위해서는 스웨덴의 사례가 그리 먼 사례가 아니었으면 하는 작은 바람도 갖게 됩니다. 또 남성들 전체의 행복을 위해서도 우리 모두가 고정된 성별 관념으로부터 더더욱 자유로워질 수 있었으면 하고 바라보는 밤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