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K-드라마, '열혈사제'를 보고 있는데 첫째가 쓰윽 옆에 앉더니 여장을 한 김남길을 보고 어? 저 사람 남자인 것 같은데 여자로 둔. 갑. 했네.라고 한다.
김남길의 여장은 아름다웠다.
아하하하, 둔갑? 참으로 기이한 단어 선택이었지만, 영어를 기본으로 쓰는 이 곳에서 둔갑이라는 단어 선택을 해 준 것이 기특하고 귀여워서 애들을 학교에 보내고 혼자 있는 나에게 옅은 미소를 짓게 만들어 주는 단어가 됐다. 보통 변장이나 변신이라고 하지, 둔갑이라고는 하지 않는데.. 전래동화에서 여우로 둔갑한 곰 이야기를 읽어주었던 생각이 났다. 그래 그 책에서 둔갑이라는 말을 배웠겠구나 했다.
실로 요즘은 둔갑의 시대다. 손톱을 먹고 사람이 된 들쥐 같은 이들이 득실댄다. 가짜 뉴스는 진짜로 둔갑을 하고, 화장으로 열등한 곳을 지우고 다시 그린다. 트랩이라는 드라마에서 소시오패스 이서진은 훌륭한 앵커이자, 자상한 가장, 좋은 뜻을 품은 정치 입문자로 둔갑을 한다. 둔갑한 이를 보는 우리는 그냥 속고 만다. 블라인드 스팟. 누군가의 말에, 가식적인 둔갑에 우리는 얼마나 속고 또 속이며 살아가는 것일까.
버닝썬으로 장자연 사건을 덮고, 정준영으로 버닝썬을 덮는다. 조선일보의 힘은 고 이미란 씨의 살아생전 억울함을 덮고도 남아, 죽고 나서 2년 반이 지난 다음에야 겨우 언론의 힘을 빌어보려 하는데 무엇이 두려운지 언론사들은 사건의 언급을 회피한다.가장 힘이 센 들쥐가 세상을 삼키고 있다.
그래서 진실되게 살아가는 것이 힘이라는 생각이 든다. 있는 모습 그대로 살아가는 것은 내면의 힘이 없이는 할 수 없는 것이다. 동아일보나 조선일보의 처음의 시작을 어땠을까. 일제 치하 조선인의 억울함을 이야기하고자 했을 것이다. 욱일기를 지우고 현장 사진을 내고 조선인의 마음에 힘을 주기 위해 은유적인 표현을 써가며 그렇게 시작된 언론사들이다. 지금은 그들이 일본이 되었다. 그리고 군림한다. 가진 자들은 더 이상 진실되게는 살 수 없는 것일까. 초심으로 돌아가기엔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버린 것일까. 누가 그 다리를 부셔버린 것일까.
진실되게 살아가는 자들만이 종국엔 울림의 힘을 가지게 될 것이다. 비리를 덮고 범죄 속에 발을 들여놓은 사람은 그 힘을 발휘할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 현장에서 침묵하면 안 된다. 알려야 하고 진실이 무엇인지 조금 더 집요하게 살아야 할 것이다.
주변을 돌아보면 소위 갑질 하는 사람들이 눈에 띈다. 인간이 인간에게 해서는 안 되는 말과 행동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렇게 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병자인 사람들이다. 모든 것을 직급으로 나누고 자기 아래는 아무렇게나 대하는 반면, 윗사람에게는 정말 깍듯해서 속이 울렁거린다. 호텔에 윗사람의 반신욕 목욕물까지 받아놓으라고 지시한다. 그런 지시가 있다 하더라도 우리 직원들은 그런 일을 하라고 있는 것이 아니라며 안 한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사람을 사람으로 대할 때, 그리고 사람으로서 도리를 다할 때, 세상은 밝아질 것이다. 아니, 진작에 그런 사람들이 있어와서 우리가 이런 사회에서 이런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여성에게 참정권이라는 것이 불과 100여 년 전에는 존재하지 않았고, 제대로 된 안정된 법 체제 국가가 세워지기 전에는 사람을 내키는 대로 살육해대는 약육강식 정글의 삶이 바로 우리 인간의 삶이었다. 그러하기에, 우리가 익숙해서 깨닫지 못했던 그 당연한 삶의 모습을 더욱 드러나게 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목소리를 내야 하고 또 그런 목소리를 들어야 한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성인지 감수성이라는 말은 존재하지도 않았던 말이다. 10여 년 전만 해도 여성경력단절이라는 단어도 생소한 단어였다. 그리고 그런 삶의 모습이 여성의 당연한 것이라고 의심 없이 생각되어 왔다. 이제는 아니다. 성인지 감수성을 가지고 살지 않으면 범죄자가 쉬이 될 수 있다는 경각심이 퍼져 나가고 있다. 우리의 의식이 새롭게 고취되고 수정되면 관련 법안들도 함께 수정되고 보완될 것이다.
모두가 잘 사는 사회를 위해 우리가 기울여야 하는 노력은 어찌 보면 아주 간단하고 명료하다. 새로운 의식과 사고방식에 대해 열린 마음을 가져야 할 것이고, 내가 당장 조금 불편하더라도 그것으로 인해 누군가 피해를 보고 있다면 나의 당연하던 권리도 조금 양보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런 새로운 사고가 우리 다음 세대에도 흘러갈 수 있게 교육하고 알려야 할 것이다. 새로운 사회를 받아들일 때 생기는 부정적이고 우연한 사고들이 하나도 없다면야좋겠지만 그렇지는 못할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새로운 사회를 향한 도약을 멈출 수는 없다. 보완하고 메워서 완전한 그릇으로 빚기 위해부단한 노력이 수반되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