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차와 상관없이 매일 6시에 일어나 8시면 차에 타는 일정이 3일째에 이르자, 차만 타면 졸음이 밀려왔다. 뚱이 표현에 의하면 가이드가 마이크를 잡는 순간, 우리는 고개를 끄덕끄덕하는 인형이 되고 만다. 처음엔 창 밖의 풍경을 눈에 담으려 정신이 없었다면, 어느새 우리는 차 안으로 쏟아지는 해를 가리기 위해 썬스크린을 내리기 시작했다.
영웅시대가 다 같이 졸기 시작하면 가이드는 영웅님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러면 여지없이 귀는 쫑긋, 여기저기서 까르르 소리가 울려 퍼진다. 세상 편한 '흐흐흐' 가이드가 아닐 수 없다. 엄청난 공통점을 가진 영웅시대가 손님이니 아무 말이나 영웅! 을 던지면 만사 오케이다.
미국은 땅이 넓어 차가 없으면 안 된다는 말을 많이 들었지만 어디 좀 이동하려면 가까운 곳은 한 시간이고, 잠깐 국립공원이라도 다녀올라치면 세 시간이 걸린다. 왕복 6시간. 목적지에서의 관광은 1시간 정도. 하나의 일정으로도 하루가 가는 코스다.
여행의 꽃은 무엇일까?
물론 이 여행의 포인트는 토요일에 시작하는 이틀간의 '임영웅 LA 콘서트'지만 다들 내심 기대하는 한 구석은 아웃렛 쇼핑일지도 모른다. 한 시간을 달려, 아웃렛단지에 졸던 사람들을 내려놓으니, 순식간에 뿔뿔이 흩어져 쇼핑을 하느라 정신이 없다. 간간이 마주치는 사람들의 손에는 하나, 둘 쇼핑백이 들려있고, 언제 졸았던가 싶게 쌩쌩한 모습들이다.
엄청난 바람이 불었다. 어제만 해도 반팔을 입으며 마냥 행복해했는데, 경량패딩이라도 입지 않으면 쌀쌀한 바람이 뼛속까지 스며들듯했다. 머리카락은 산발을 하며 하늘로 떠다녔고 정신이라도 붙잡으려면 어디라도 들어가야 했다. 지팡이인 나는 다리 아픈 엄마를 부축하고 뚱이는 재빠른 쇼핑을 다니기에 정신이 없다.
걷는 것을 불편해하는 엄마는 항상 신발 타령을 한다. 이것저것 운동화 신어보기에도 시간은 빠듯하다. 간간이 명품에 눈이 돌아가지만, 나는 효녀 지팡이, 입지도 않을 블링블링 옷 따위에 시간을 뺏기지 않도록 엄마를 살살 구슬린다. 다행히 화려한 나이키 운동화가 있어 가볍게 쇼핑을 마무리한다. 그새 나도 덤으로 운동화를 고르는 센스. 엄마 플렉스라도 눈치는 항상 보인다.
다른 관광지에서는 1시간도 안 되는 자유시간을 주던 가이드가 이곳에서는 무려 2시간 반을 주었지만 아웃렛을 다 돌기엔 턱 없이 부족한 시간이었다. 부랴부랴 차 안으로 모인 사람들의 얼굴엔 생기가 돌았다. 세차게 불어온 바람으로 상기된 것인지, 쇼핑으로 한껏 부풀어 오른 것인지, 잠이 마구 쏟아지던 타이밍에 기가 막히게 사람들을 다시 살려 놓는 흐흐흐 가이드다.
쇼핑을 마치니 다들 해피한 기분이었다. 여새를 몰아 드디어 미국식 샐러드바에 입장을 했다. 접시에 각종 샐러드와 파스타, 타코등을 잔뜩 담았다. 따끈한 수프로 찬기운까지 몰아내니 어느새 나른함이 몰려왔다. 한잠 자면 딱 좋은 이 시간, 이름만 들어도 잠이 올 것 같은 사막지역으로 3시간을 달리기 시작했다. 우린 '그냥 완전' 끄덕끄덕 인형이다. 잠을 몰려오게 하는 잘 짜인 스케줄에 덥석 올라탄 영웅시대다.
곤한 잠에 빠졌던 우리를 흐흐흐 가이드가 깨웠다.
"흐흐흐흐, 자 이제 쟈슈아트리 국립공원에 거의 다 왔습니다. 밖을 한 번 보세요. 너무 멋지지 않나요!"
붙어있던 눈을 가까스로 떠보니 창 밖이 온통 모래색이다. 생전 처음 보는 바위산과 메마른 땅 위에, 자그마한 나무들이 듬성듬성 보이기 시작한다. 생경한 풍경을 얼른 동영상에 담았다.
"창 밖에 보이는 나무가 쟈슈아트리에요. 너무 신기하죠? 이곳은 아주 먼 옛날 바닷속, 해저면이었어요. 그런데 그 바닥이 솟아올라 지금 보시는 돌산과 신기한 나무가 되었다고 합니다. 이 지역 외에는 쟈슈아트리를 볼 수 없어요"
흐흐흐 가이드는 죠슈아트리는 '쟈슈아'로 오렌지카운티는 오렌지'카우니'로 발음하는 30년 미국 이민자다.
와이파이는커녕 데이터조차 터지지 않는 그곳, 죠슈아트리 국립공원. 일반적으로 미국 서부 여행에서 잘 안 가는 관광지라던데 우리는 그곳에 내려졌다. 그런데 이상했다. 나는 마치 그곳이 어린 왕자가 착륙했던 지구의 어디쯤이 아닐까 하는 착각에 빠져 들었다. 수도 없는 죠슈아트리가 어린 왕자의 삐죽삐죽한 머리 같았고 하늘의 모양까지도 이 날을 위해 완벽하게 준비된 것만 같았다. 어쩌면 나는 이런 곳을 좋아하는 오지형 인간일까. 가려면 요세미티국립공원을 가야지, 그랜드캐년을 가야지, 죠슈아트리국립공원이 뭐냐고 하던데, 나는 좋았다. 죠슈아트리가. 혹시 나는 어린 왕자? ㅋㅋㅋ 생각은 자유니까.
I LOVE YUNA KIM
한 시간여의 죠슈아트리 국립공원을 둘러본 후 다시 차에 올랐다. 끄덕끄덕 인형이 될 시간이었지만, 이상하게 잠이 오지 않았다. 콧바람을 쐿더니 졸음이 달아난 걸까. 이런 시간엔 뭐? 돌아오는 차 안은 임영웅 DVD와 함께 떼창이 시작되었다. 왜냐고? 내일은 드디어 이 여행의 목적! 영웅님의 콘서트가 있는 토요일. 그러니 슬슬 시동을 걸어줘야 하지 않겠나.
유명한 임영웅 유튜버 '59TV'의 '별나사 노래자랑'에 나간 이력이 있던 엄마는 영웅시대의 요청에, 노래 한 소절을 불렀다. 나는 도저히 할 수 없는 걸 하는 우리 엄마다.
두 명씩 조를 이루어 같이 먹고 자고 하는 사이 사람들은 부쩍 친해진 느낌이었다. 물론 뚱이와 나, 엄마는 셋이서 한 방을 쓰는 막역한 21조였지만 어쩐지 오랜만에 붙어서 자는 느낌은 다른 조의 짝꿍들이 친해져 가는 과정과 다르지 않았다.
그나저나, 오늘 저녁엔 정인이를 만날 수 있으려나. 3시간을 다시 달려가야 하고 저녁도 먹어야 하고. 늦지 않게 호텔에 도착해야 할텐데. 잘 터지지도 않는 핸드폰만 초조하게 보는 나다.